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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성김 원동파 원문보기 글쓴이: 정균
| 예천 용문의 의성김씨 남악종택(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예천을 가다 예천군은 신라시대 때 수주군(水酒郡) 축산현(竺山縣)이었으며, 이후 757년 예천으로 바뀌었고, 속현으로 영안현ㆍ가유현ㆍ은정현ㆍ안인현 등이 있었다. 그리고 예천군은 한때 안동부와 상주목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보천군으로, 예천군으로 바뀌었다. 예천군의 일부지역 토질은 비옥하고, 일부 지역은 척박하다. 예천군의 지형은 경상북도의 다른 북부지역과 같이 소백산맥이 북측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소백산맥 너머에 충청북도가 있다. 따라서 예천군의 북부지역은 높이가 1,000m 이상 되는 산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도 높고 낮은 산이 많다. 남쪽지역은 남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예천군은 높고 낮은 산에서 시작한 내성천과 한천이 군의 중심 지역의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른 후 호명과 개포 경계에서 합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한천은 현재 예천군 하리면 앞을 흐른 후 예천읍 중앙을 흐르는데,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금천이 합수하여 수량이 증가한다. 금천은 산으로 둘러싸인 용문면 면소재지를 가로지르면서 주변 들녘을 적시고 있다. 그리고 금천을 따라 928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따라서 용문면의 실개천과 마을길은 금천과 928번 지방도로를 향하고 있다. 이번 용문면 순례도 928번 지방도로를 달리면서 시작했다. 도로 주변 산의 나뭇잎과 들녘의 벼 잎은 여름비를 머금어 더욱 더 싱그럽고 진한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구계리 의성김씨 남악종택은 용문면소재지를 지나는 928번 도로에서 서쪽 유천면으로 난 2차선 도로를 이용한다. 928번 도로와 2차선 도로는 상금교가 연결하고 있으며, 상금교를 건너면 농지정리가 된 들녘이 도로 북측과 남측에 펼쳐져 있다. 북측의 산자락에는 예천권씨 초간종택이 동측 들녘과 면소재지를 바라보면서 동향을 하고 있다. 2차선 도로 주변에는 구계지에서 시작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구계리는 2차선 도로 위를 지나는 콘크리트 구조의 높은 농수로를 지나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와 같은 농수로는 경상북부지역의 지형을 고려해 축조한 구조물로 지형 변화가 심한 농경지를 적시고 있는 주요시설이다. |
새 터에 새 삶을 시작한 의성김씨 남악 김복일 구계리는 2차선 도로를 향하면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세 개의 산자락 끝에 있는데, 중앙의 산자락을 중심으로 나머지 산자락이 주변을 감싼 형국을 하고 있다. 남악종택은 중앙의 산자락 끝을 등지고 동향을 하고 있다. 구계의 물은 고택의 북측과 마을 중심을 흐르며, 마을을 벗어나면서 농경지의 북측 산자락을 따라 흐르고 있다. 농지정리를 하기 전 마을의 출입은 물길을 따라 난 작은 길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계리 가옥들은 마을 중심을 흐르는 실계천 변 마을안길에서 서측과 남측으로 난 샛길을 이용한다. 중심을 관통하는 마을안길은 구계지를 지나 용문면 직리에 다다른다. 남악종택은 마을 중심에 있는 마을회관을 지난 후 중심 안길에서 서쪽으로 난 샛길을 이용한다. 샛길에서 서측을 보면, 계곡물을 이용한 논이 있고, 산자락과 논 사이에 있는 남악종택이 한 눈에 들어온다. |
방문하던 날, 빈 고택으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종택의 종손과 종부가 계셔서 반겨주셨다. 현재 종택에는 현 종손과 종부가 집을 가꾸면서 살고 있다. 특히 안동 천전리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반겨주셨다. 이는 과거 용문에 터를 잡은 의성김씨 남악 김복일 선생이 안동 천전리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는지……. |
남악선생은 화살같이 곧고 대쪽처럼 바른 성정을 갖고 불이와 타협하지 않아 생활이 곤궁하였다고 한다. 한강 정구와 오리 이원익은 “지금 세상에 다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으며, 선조 임금도 남악선생의 청렴 강직한 성격을 듣고 감탄하여 『문헌비고』, 『성리대전』등의 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악선생은 죽림리에 가학루(駕鶴樓)라는 집을 짓고, 그 옆에 남악정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남악선생은 29세에 금곡서당을 창건하기 위하여 창립문(創立文)을 돌려 수결을 받았다. 현 종손은 창립문의 복사본을 보여주셨다. 창립문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나이 스물아홉에 무엇을 했지”하고 반문했다. 참으로 내 자신을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
남악 김복일은 예천권씨의 둘째 자녀와 결혼을 하면서 용문의 삶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남악선생은 용문면 죽림리 남악동(남악골)에 터를 잡고 살았다. 남악동의 종택은 한국전쟁 당시 어린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현 종택은 현 종손의 증조부가 취득하여 남악종택으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 고택은 불구당(不求堂) 김주(金迬, 1606~1681)의 후손이 수대에 걸쳐 살았고, 이후 전주이씨가 매입해 살았다고 한다. 불구당 김주는 병자호란 때 청음 김상헌과 함께 척화신(斥和臣)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불구당 가문은 불구당의 증조부 판관공(判官公) 대에 안동에서 예천군으로 옮겨와 금당실에 칩거(蟄居)하였고, 선고(先考) 도사공(都事公) 때에 구계(九溪)에 살기 시작했다. 불구당 김주는 이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남악종택은 1981년 번와공사 시 발견한 명문와의 「崇禎十七年 丙戌三月 日 龍門寺僧 雲補造」 명문을 보면 1644년 이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
남악종택의 배치 및 주변 경관 종택은 전후로 긴 장방형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야산을 뒤로하고 안채가 동향을 하고 있고, 북측 익사 전면에 ‘가학루(駕鶴樓)’라는 편액이 걸린 사랑채가 있다. 안마당의 정면과 남측 익사 전면에는 중문채가 있고, 중문채 정면에는 ‘ㅢ’형 초가지붕의 문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즉 문간채는 중문채와 사랑채보다 정면으로 돌출하여 있다. 따라서 안채로 향한 동선과 사랑채의 향한 동선은 대문 앞에서 나뉘고, 안채는 대문채의 대문간과 중문채의 중문을 통과해야 안마당에 이르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고택의 안채는 외부에 대하여 폐쇄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채 좌우측의 넓은 텃밭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현재 안채의 북측과 남측 익사의 북측과 남측에 종부와 종손은 텃밭을 일궈 갖가지 농작물을 조금씩 가꾸고 있다. 사랑채 북측에는 토마토가 잘 자라고 있는데, 이 토마토는 금주에 올 손자 녀석들이 따먹도록 하기 위해서 종부가 정성껏 기르고 있는 것이다. 옥수수가, 땅콩도 텃밭 한 곁에 잘 자라고 있다. 안채의 남측 담장 옆에는 최근에 새로 지은 화장실이 있다. 남악종택은 안마당 외에 대문채와 사랑채 앞의 마당과 중문채와 대문채 사이 마당이 있다. 중문채와 대문채사이 마당은 좌우로 긴 장방형을 하고 있으며 남측으로 트여 있다. |
짜임새 있으면서 독특한 평면 구성 안대청의 북측에는 서측 위에서부터 1간 방, 1간 마루방, 안사랑방 2간이 있으며, 안사랑방 앞쪽에는 안사랑 아궁이 간이 있다. 안사랑방은 안마당쪽에 쪽마루를 달아 대청과 연결하고 있으며, 북측열 방과 마루, 안사랑방의 북측 기단 위에도 쪽마루를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북측 기단 위 쪽마루 끝에는 아자난간을 꾸며 놓았는데, 이 쪽마루는 사랑채 뒷부분 쪽마루 동선과 연결되어 있는데, 안사랑방 부엌간의 북측 기단에는 북측 뜰로 출입하기 위하여 쪽마루를 놓지 않았다. 날이 눅눅할 때면 종부는 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집의 습한 기운을 제거하였다. 부슬비가 내리는 오늘도 종부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는데, 나는 덥다는 느낌보다 몸이 이내 뽀송뽀송해지는 느낌이다. 남악고택의 중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一’자형으로 서측의 안채와 북측의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고, 동측의 문간채와도 연결되어 있다. 안마당 동측면에 면한 중문채는 3간인데, 중앙에는 바닥이 마루구조를 한 1간 고방이 있다. 고방을 중심 남측에 1간 중문간이 있고, 북측에 사랑방 부엌이 있다. 중문간 남측에는 2간 모방, 마루방 1간이 있는데, 이들 실은 대문채쪽 행랑마당에서 출입한다. |
사랑채는 안채의 북측열과 남측의 중문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정면 3칸에 누마루를 꾸며 놓았으며, 누마루의 기둥 밖으로 마루를 연장하고 계자각 난간을 꾸며 놓았다. 이 계자각 난간은 정면 외에 북측과 마루간 서측에 꾸며 놓았다. 정면으로 돌출한 마루는 정면 마루간을 좀 더 넓게 하고 있으며, 북측과 서측 마루는 안사랑으로 통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의 3간 마루 뒤에는 중앙과 좌측 간에는 ‘田’자형의 온돌방을 꾸며 놓았다. 정면의 2간은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후열은 좌측부터 책방과 지필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방의 천정은 우물반자를 꾸며 놓았다. 지필방은 구전되어 오는 방명으로 현소유자도 확실한 뜻은 잘 알 수 없으나 지류를 갈무리하던 방으로 추정한다. 사랑방의 북측 간은 마루방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데, 뒷방을 옥방(獄房)이라 부르는 것은 하인들이나 기타 훈육이 필요한 사람들을 가두어 두던 방이라 한다. 안채와 사랑채의 기단은 모두 자연석을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윗면을 강회다짐으로 마감했다. 그런데 사랑채의 정면 기둥은 자연석 초석 위에 각주를 세웠는데 사랑채의 정면 누하주만 원주를 사용하였다. 이상으로 남악종택의 사랑채는 다른 가옥에서 볼 수 없는 실을 3겹으로 구성하고 있다. 특히 종택의 사랑채는 정면 마루 외에 동서로 마루를 꾸며 ‘ㄱ’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평면구성이다. 그리고 사랑채는 누형식으로 담장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종손과 종부는 사랑채의 사랑방과 마루방에 앉아 동쪽의 나지막한 야산 너머에서 뜨는 해를 보면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종택의 즐거운 삶 중 하나라고 한다. 이는 한 시점에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자연 경관요소다. 문간채는 ‘ㅢ’형으로 장방형의 행랑마당을 중심으로 중문채를 마주하고 있다. 문간채는 남측에서 북측으로 방 2간, 부엌간 1간, 마굿간 1간, 대문간 1간, 방 1간이 있으며, 북측 끝방에서 중문간쪽으로 창고 2간이 있다. 그리고 중문간과 대문간은 한간 정도 떨어져 있다. 문간채는 뒤편의 안채와 사랑채, 중문채의 기와지붕과 달리 초가지붕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남악종택은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종손과 종부의 귀향, 그리고 종택의 모습 예천 의성김씨 남악 김복일의 후손들은 안동에서와 예천 남악동에 터를 잡았고 이후, 현재의 종택에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종택의 문지방을 넘어 다녔고 마루를 오르내리면서 오갔다. 안채의 대청마루 표면과 사랑채의 사랑마루 표면에 불굴당 김주의 후손, 전주 이씨 일가, 남악 후손들은 오랜 세월 동안 크고 작은 흔적을 이곳에 남겼다. 마루 표면이 헤이고 갈라진 것은 상처라기보다 고택의 연륜이며 종가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집을 아끼던 종부의 온기와 걸레질은 그들의 흔적들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
현재 종택의 꾸밈은 여러 곳에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처마 밑에 일정한 간격으로 화초를 심은 것이다. 그리고 행랑마당도 처마 밑에 화초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을 심어 놓았다. 이런 모습은 백토를 깔아 마당을 깨끗하게 정리한 일반적인 전통가옥과 다른 모습이다. 종손이 이내, “어떻게 꾸미는 것이 바람직합니까?”하고 질문하셨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담장 너머에 좋은 경관 요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담장 안에 꾸미는 것을 군더더기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행랑마당은 화초와 식물을 제거한 후 백토를 깔아 깔끔하게 정리하면 중문채와 대문간이 양명해질 겁니다.” 라고 나는 답했다. 그래도 종부는 못내 아쉬우셨는지, 처마 밑과 행랑마당에 키가 작은 화초를 심고 싶어 했다. 이에 종손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아담한 화초이기 때문에 마당에 앉아 있으면 화초를 심지 않아도 되는데…….” 이에 대하여 종부님은 입가의 미소로 화답했다. 이런 삶의 즐거움은 도심에서 두 분이 잊고 살았던 것으로 귀향하면서 되찾게 된 것 중 하나다. <안동> |
| 통권135호 - 사람 따라 옛집 따라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