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적 관점으로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전설
제2차 세계대전, 엘리트 계층은 이 전쟁을 통해 깨닫는다.
과학적 진일보는 이른바 소수의 초지식인들을 한데 묶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1950년대, 로마 교황청인 바티칸에서 비밀리에 과학자 그룹을 소집한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과학자들에겐 다음과 같은 목표가 하달된다.
"타임머신을 개발할 것."
교황청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펠레그리노 에르네티 신부를 기획감독관으로 임명한다.
에르네티 신부는 교황청 소속 신부 중 가장 명망 있는 신학자이자, 가장 과학적 지식이 뛰어난 자였다.
특히, 그는 양자역학에 있어 음지계의 최고 지식인이었다.
그렇게 에르네티 신부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 12명,
즉 12 사도를 필두로 한 과학자 그룹을 이끌며 타임머신 개발에 착수한다.
이 12 사도 중 두 명은 엔리코 페르미, 그리고 베르너 폰 브라운이었다.
<엔리코 페르미: 이론과 실험 모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업적을 남긴 유일무이한 물리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기여>
<베르너 폰 브라운: 역사상 가장 뛰어난 로켓 과학자 중 하나로, 인류를 달에 보내는 데에 크게 공헌>
한편, 이들 그룹이 개발에 착수한 타임머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타임머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간다는 전제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직시,
애초부터 다른 형식의 타임머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이 구상한 타임머신이란, 바로 과거를 포착하는 기기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토대로 개발에 착수한다.
"모든 물리적 파장은 에너지를 생성시키고,
그렇게 에너지의 형태를 빌어 생성된 흔적들은 차원 어딘가에 기록으로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흔적들을 빛과 소리라는 형태의 에너지로 재구성한다면,
그 흔적의 발생진원을 영상 및 음성의 형태로 송수신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곧 이들은, 과거에 발생한 에너지를 음극선관(CRT, 브라운관)상에 빛과 소리로 재구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들은 이 타임머신 기기를 이용해 원하는 특정 과거를 포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완성시켰으며,
실험을 통해 다음의 과거를 영상 및 음성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 '고대 로마 문학의 아버지'인 퀸투스 엔니우스의 생전 마지막 희곡 <티에스테스>를 포착
(그의 작품 원본은 대부분이 유실된 상태였음)
·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연설순간을 포착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연설순간을 포착
· 베니토 무솔리니의 연설순간을 포착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포착
· 골고다 언덕에서 수난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착
헌데,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성공과 함께 얼마 안 있어 폐지된다.
'향후 악용될 소지가 있으므로'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교황청이 직접 폐지를 지시한 것이었다.
이후 인류 최초의 타임머신 기기는 분해되어 교황청 비밀창고 어딘가에 숨겨지면서,
현재는 에르네티 신부의 폭로로 유출된 일부 자료만이 공개된 상태이다.
물론, 여전히 교황청이 타임머신을 개발하려던 목적 및 폐지 이유도 미궁으로 남아있다.
<에르네티 신부의 죽음 이후 그의 유지를 이어
타임머신의 존재를 추가로 폭로한 동료신부 프랑수아 브룬>
<에르네티 신부가 폭로한 타임머신 기기의 기본 구성도>
<에르네티 신부의 설명을 토대로 재구성한 타임머신 기기의 추정도>
<과거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수신 중이던 스크린을 사진기로 촬영한 것>
"open the door.
and teel the world the truth."
- 영화 '천사와 악마' 中
진실
이와 같은 전설의 토대를 마련한 이는, 바로 이야기 속 주연 중 하나인 에르네티 신부이다.
1925년생의 이탈리아인이었던 그는 전설에서처럼 실제로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신부였다.
그는 언어학자이자 음악학자였으며, 해당 분야의 권위자였다. 또 그는 양자물리학 학위도 보유한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지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생전 사제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여담으로, 그는 현대 가톨릭 퇴마 역사에 있어 엑소시즘의 대가이자 원조 격이기도 함).
<1972년 당시의 에르네티 신부>
그런 그가 이탈리아의 유력 주간지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
1972년 5월 둘째 주 잡지와 동료 신부였던 브룬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친다.
"나는 아고스티노 제멜리 신부(주: 20세기 프란치스코회에서 가장 존경받던 인물 중 하나)가 설립자로 있던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 대학교에서, 그와 성가 관련 연구를 하던 중 자기磁氣 녹음기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멜리 신부의 돌아가신 부친이었다.
이 일화를 통해 나는 한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 인해 파생된 음성과 시각정보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태로 남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나는 곧 저명한 과학자들과 접촉해 이러한 가설을 설명했고,
이어 12명의 과학자는 나와 함께 팀을 구성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 중 둘은 페르미 박사와 폰 브라운 박사였다.
우리 그룹의 프로젝트 목표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음성과 영상으로 CRT 상에 수신 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우리는 이 타임머신 시스템에 '크로노바이저(Chronovisor)'라고 이름 붙였다.
크로노바이저는 버튼과 레버로 원하는 과거 시기를 설정한 뒤,
해당 과거를 추적해 음성 및 빛의 파장을 수신받아 CRT 상에 음성&영상을 송신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이 음성 및 영상 정보는 한번 발생하면 파괴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해 다시금 에너지로 재구성할 수 있기에,
시공에 상관없이 특정 과거를 추적해 재구현하는 게 가능했다.
우리는 처음 시작으로 비교적 현대인 무솔리니 연설장면(주: 1900년대)을 추적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다음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의 베네치아 공화국 폐지 선포 연설
(주: 1790년대)을 추적했다.
역시 성공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기원전 63년의 로마를 추적했다.
그리고 당시 키케로의 역사적인 연설문 첫머리인
'Quousque tandem abutere, Catilina, patientia nostra?
(카틸리나여, 도대체 얼마나 우리의 인내심을 남용하려 하는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몸짓과 억양은 아주 인상적이었으며, 실로 위대한 웅변이었다.
이어 우리는 기원전 169년의 로마를 추적했다.
그곳에서 엔니우스의 비극 <티에스테스>가 상연되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지금은 유실된 그의 해당 작품을 보며 텍스트를 수기로 기록했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목격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는 예수 그리스도, 유다의 배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상까지 모두.
우리는 카메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과정 전체를 촬영했다.
이후 우리는 1970년 전까지 합의하에 모든 크로노바이저를 해체했다.
과거 언제 어느 때고를 볼 수 있는 이 장치가 악용된다면,
이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독재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방송에 방영된 크로노바이저 부품>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에 실린 실제 기사>
당시 이러한 요지의 주장과 함께, 그는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에 십자가 수난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 얼굴을 촬영한(스크린 화면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만인 1972년 8월, 그의 거짓말이 들통 나고 만다.
그가 공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이, 실은 나무 조각상을 촬영한 엽서 사진을 변조했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
문제의 엽서는 당시 이탈리아 토디 지역 순례지에서 한국 돈 몇백 원에 판매되던 것이었다.
<좌: 에르네티 신부가 공개한 사진 /
우: '돈키호테' 조각상으로도 유명한 스페인 조각가 로렌조 코야우트 발레라의 예수 그리스도 조각상>
그가 직접 크로노바이저를 통해 기록했다던 <티에스테스>에 대해서도,
당시 엔니우스의 최고 전문가였던 프린스턴 대학교 캐서린 오웬 엘드레드 박사는 다음과 같은 혹평(?)을 내렸다.
"희곡 분량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짧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이미 일부 알려져있는 내용에 포함된다.
또 대부분의 라틴어 단어들이 실제 <티에스테스>가 쓰여진지 250년 후에야 사용되던 것들이다.
구성 역시 극작가가 썼다고 보기 어려우며,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쓴 것이라고도 보여지지 않는다."
이 밖에도, 그의 주장엔 분명한 오류가 존재한다.
그는 1950년대에 페르미와 폰 브라운을 필두로 한 과학자 그룹과
이탈리아 내에서 크로노바이저를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상 페르미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래 1954년 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꾸준히 연구활동을 이어갔다.
또 폰 브라운의 경우에도 1945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래 1977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 정부의 보안관리 아래
역시 그곳에서 꾸준히 연구활동을 이어갔다.
이처럼 실질적인 증거가 전무한 데다 주장들에도 오류들이 존재해 곧 에르네티 신부의 크로노바이저 폭로는
당시 빈번했던(20세기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미스터리 hoax의 나날이었음)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실 그즈음엔 역사상 가장 정교한 모조품 중 하나인 '토리노의 수의'가 한창 진위여부로 떠들썩하던 때라,
크로노바이저는 그리 오랫동안 관심을 끌진 못했다.
<말년 당시의 에르네티 신부>
결국, 에르네티 신부는 이후 자신의 주장에 대한 추가 물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1994년 4월 8일 사망하면서
크로노바이저는 그의 사제 생활에 있어 유일한 오점으로 남게 된다.
(1993년 한 인터뷰에서, 1950년대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크로노바이저에 대한 이야기를 금지시켰다고 주장한 게 마지막).
허나, 그의 유지(?)는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바로 브룬 신부에 의해서 말이다. 고대언어 연구자이자 교황청 성서연구원 출신인 브룬 신부는,
에르네티 신부로부터 크로노바이저에 대한 비밀(?)을 직접 전해 들은 유일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64년 에르네티 신부와 처음 만난 이래 수차례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크로노바이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야기만 말이다.
브룬 신부는 지금도 말한다. 크로노바이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한다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듯 2002년에 자신의 저서 '크로노바이저. 바티칸의 새로운 미스터리. 타임머신
(Cronovisore. Il nuovo mistero del Vaticano. La macchina del tempo)'을 출간한다.
내용은, 당연하게도 에르네티 신부와 크로노바이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럴듯한 도시전설이 탄생하면 뒤이어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법.
해당 사진은 크로노바이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널리 퍼져있다.
물론, 크로노바이저 이야기 외에 다른 기타 시간여행 전설에도 종종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실은 독일 화가 요하네스 라파엘 벨레(1848-1936)의 작품, 'Jesus Among the Wheatfields'>
에필로그
에르네티 신부는 임종 직전 <티에스테스> 수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은 거짓이었노라고 고백했으나,
크로노바이저는 진짜였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브룬 신부는 에르네티 신부의 고백은 위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에르네티 신부가 공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이 발레라의 조각상과 유사한 이유를,
조각상 제작 시에 종교적 체험을 통해 십자가 수난 당시의 예수를 목격한 수녀로부터
이른바 모델 어드바이스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그 후 2003년 인터뷰에선 크로노바이저는 클로즈업이 불가능하다며 1972년에 공개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은
크로노바이저에서 얻은 사진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한다.
주간지 인터뷰 당시 에르네티 신부가 해당 사진은 크로노바이저에서 얻은 게 아니라고 명시했었다며 말이다.
재미있게도, 에르네티 신부 역시 1993년 인터뷰 당시 문제의 사진은 크로노바이저에서 얻은 게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주간지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가 뜬금없이
엽서사진을 크로노바이저를 통해 촬영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이라고 실은 셈이 된다.
에르네티 신부의 크로노바이저 주장은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하던 가짜 성유물 토리노의 수의가 그를 흥분시켰기 때문에,
그리고 브룬 신부가 크로노바이저를 끝까지 주장하는 이유는
브룬 신부가 열렬한 초자연현상 지지자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참고로 에르네티 신부 역시 생전 열렬한 초자연현상 지지자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둘은 첫 만남부터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
사실 크로노바이저의 컨셉은 모사품에 가깝다.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작가들에 의해 과거를 보는 이른바 '타임뷰어'가 등장했던 것.
특히, SF문학계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1956년에 발표한 <죽은 과거>속 타임뷰어는
크로노바이저 이야기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죽은 과거>에는 과거를 관찰할 수 있는 타임뷰어, '크로노스코프(Chronoscope)'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크로노스코프가 결국에 가선 학술적 목적의 타임머신이 아닌,
타인의 사생활 관찰에 악용되는 감시장치가 된다는 플롯이다.
에르네티 신부의 주장 중 분명 맞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 인해 파생된 음성과 시각정보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태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디지털이라는 공간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onsuck&logNo=220218975619
첫댓글 실제로 5차원 이상에서는 시공간이 하나라고 한다.
마법사인 프란츠 바르돈의 자서전인 마법사 프라바토라는 책에는
마법거울이 나온다.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과학적인 것이며
다만 기존의 과학기술이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아카식레코드는 에테르 차원에 에너지이고 그것을 인간이 볼 수 있게
작업한 것이 과학자들이 한 일일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모르면 현실성이 없어보이고 허무맹랑하게 밖에는 안보인다.
근데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고 있는게 오히려 더 낫다.
준비가 된 사람들에겐 타임머신이라는 것은 그들의 인식을 높여준다.
진보를 위한 확증 단계가 되는 것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과거 타임머신실험인 레인보우 프로젝트나
50년대의 미국정부의 화성식민지에도 바로 공간이동방법으로서
타임머신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고차원적인 기술들은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마도 소수로 독점하고픈 인간 에고로 인해서 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성보다 과학기술이 넘어서버렸다는 데 큰 위험성이 있다.
"open the door.
and teel the world the truth."
- 영화 '천사와 악마' 中
복사 해온 글이라 위의 부분이 명확하지 않네요.
teel the world the truth. 가 아니라......
tell....같은데
teel참깨, 참기름 이라는 의미밖엔 검색이 안되던데...
아마도
"문을 열고, 세상에 진실을 말하라."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