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분 |
터 키 |
그 리 스 |
한 국 |
국토면적(㎢) |
780,580 (남한의 8배) |
131,940 (남한의1.3배) |
98,480
|
인 구(백만 명)
|
71 |
11 |
49 |
평균수명(세) |
73.1 남:70.7 여:75.7 |
79.5 남:77.0 여:81.1 |
77.4 남:74.0 여:81.1 |
GDP(억 달러) |
8,880 |
3,246 |
12,010
|
1인당 GDP($) |
12,900 |
29,200 |
24,800 |
소비자물가 상승율(%/년) |
8.8 |
3.0 |
2.5 |
수출(억 달러) |
1,153 |
239 |
3,715 |
수입( 〃 ) |
1,621 |
808 |
3,568 |
외환보유( 〃 ) |
765 |
36 |
2,622 |
휴대전화(천대) |
52,663 |
11,098 |
40,197 |
현 안 문 제 |
1.에게해에서의 그리스와의분쟁(영토,해상,영공) 2.키프러스문제 3.쿠르드족 문제 4.유프라테스강에 관한 시리아,이라크와의 분쟁 5.EU가입문제 |
1.터키와의 분쟁 2.만성적국제수지적자 |
|
※통계자료출처:미국CIA의 World Fact Book(2008년기준)
3.터키와 그리스의 관계
터키의 나라 현황을 그리스의 현황과 함께 제시하는 이유는 적지 않은 여행상품이 지중해 연안
국가인 터키와 그리스 두 나라를 묶어서 패키지로 다녀오도록 계획되어 있을 뿐 아니라 터키와
그리스 두 나라의 관계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보다 더 심각하게 그리고 더 오래 동안 대립적
인 관계를 가져 왔었기 때문에 두 나라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두 나라사이의
대립 내지는 적대관계는 몇 십 년이나 몇 백 년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이천년 이상의 시간을
넘나들며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기 이전의 지중해 일대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국가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문명을 일으킨 여러 도시국가들이 그리스와 터키의 지중해 연안일대를
제패하고 있었다.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터키지역에 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트로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합군의 싸움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기원전 6~5세기 강력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터키와 소아시아 일대 그리고 그리스의
대부분을 석권하였을 때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웠으며 결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던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 이후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가 되고 로마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로마제국이 지중해와
유럽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과정에서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리스인들이
지중해연안 각지의 도시국가에 진출하여 해상무역을 발달시키는 것을 독려하고 지원하여 주었으며
그리스인 학자들은 로마귀족 자제의 스승이 되거나 로마 권력자의 학문적 자문관이 되어 높은 지위와
보수를 보장받았다. 그리스나 터키나 로마의 식민지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사회적인 지위는
그리스인들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AD324년에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비잔티움에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이후 1,453년에 오스만 터키에게 함락될 때까지 1,123년 동안 로마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군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리스 시민들은 상업적, 학문적, 예술적인
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카스피 해 연안에 살고 있던 투르크 족의 한 지파인 셀주크 인들이 세력을 키워 점차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쪽으로 진출하여 1,071년에는 셀주크 제국을 세우고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셀주크는 1,243년에 몽골군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다.
오스만 1세가 이끄는 또 다른 투르크 인들이 세력을 키워 셀주크의 영토를 차지하고 점차세력을
확대하여 유럽의 발칸반도를 석권하고 명목만 유지하고 있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해상과 육지에서 포위 공격하여 1,453년에 이를 함락시키고 이스탄불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오스만 터키제국의 등장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많은 지식인들과 고급기술자들은 서유럽으로 도피하여 그곳에 헬레네 문명의 학문과 예술을
전파함으로써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오스만 터키의 치하에 남아 있는
그리스인들은 이슬람 제국의 학정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오스만 터키가 점차 세력이 약화될 때인 1,821년에 그리스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이 발칸반도의 다른 민족들의 독립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잔인하게 이를 탄압하였다.
9년간에 걸친 치열한 투쟁 끝에 영국 등 열강의 비호 아래 1830년 그리스 반도의 남쪽에 46,000㎢의
영토를 확보한 신생독립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스는 독립이후 비잔틴 제국의 복원을 목표로 하는 대 그리스운동을 펼쳐서
오스만 터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 1907년에는 국토면적을 64,000㎢로 확장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터키가 패배하여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리스는 군대를 이즈미르에
상륙시킴으로써 소아시아를 포함한 비잔틴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그리스의 뜻이 실현될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터키에서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가 등장하여 터키국민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대항함으로써 그리스의 의욕은 꺾이게 되었다. 열강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이스탄불 수복을 목적으로 이즈미르에 상륙했던 그리스 군이 철수하는 대신 이제까지 발칸반도에서
그리스가 확보한 영토를 그리스 영토로 인정하고 상대방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 국민들을
데려 오는 대규모 인구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키프로스에서만은 인구교환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터키계 주민이 소수인 채로 남아
훗날 키프로스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또한 그리스의 독립에 따른 영토와 영해의 구획이 명백하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기에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오랜기간 동안 두 나라 또는 지역간에 서로 피해를 주고
입는 과정에서 양국국민들의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아주 나빠진 것이다.
4. 한국과 터키의 관계: 터키는 형제의 나라이다.
터키사람들은 한국인을 만나면 형제라고 부르고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한국관광객에게 배워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농담하는 현지인 가이드도 있다.
이들은 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것일까?
가. 고대의 터키와 한국의 관계
터키는 돌궐이다. 돌궐(突厥)을 터키 식으로 읽으면 투르크(Turk)이고 영어식으로 읽으면
터키(Turkey)이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을 투르크라고 부르며 투르크란 이름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돌궐은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匈奴(흉노)라 칭하던 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며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고구려의 기층 민중을 형성하기도 했다.
TV드라마 '주몽'에도 나오지만 고구려가 수, 당과 싸울 때에는 돌궐이 자주 측면에서 공격을 하여
고구려를 지원했다. 특히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 이후 바로 수나라가 망한 것은 수양제가 중원을
비운 사이에 돌궐족이 중원을 공략한데 기인했다고 하며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하고 그 뒤를 이었던 발해마저 멸망하자 많은 백성들은 당나라나 신라의 지배를 받으며
한반도에서 살았지만 일부는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가 682년 동돌궐이 울란바토르에
돌궐제국을 세울 때에 참여했다.
옛 돌궐어로 기록된 돌궐비문(突厥碑文)이 바이칼 호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른바 '오르콘 비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내용 중에 돌궐왕의 장례식 때 주변 각국에서 조문사절이
온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의 사신이 상위에 기록돼 있어 돌궐과 고구려간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당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돌궐은 8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의 용병으로 남하한다.
사라센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이슬람의 대제국이었다.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다.
셀주크 투르크가 몽골에 패해 멸망한 뒤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 투르크를 세워 터키의 아나톨리아반도는
물론 소아시아 일대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 그리고 발칸 반도와 헝가리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여
7세기동안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번영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이후 케말 파샤가 이끄는 국민혁명으로 멸망했다.
현재의 터키인들 대부분은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고 코리아라는 나라 이름이 고구려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고 있기에 고구려 민족의 후예인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6.25전쟁과 터키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유엔사무총장으로부터 한국을 도와 줄 군대의
파견을 요청받은 터키는 즉각 보병 1개 연대와 포병 1개 대대 그리고 지원부대로 편성된 1개 여단
5,455명의 군대를 한국에 보냈다.
이때에 파병된 군인들은 모두가 지원병이었다고 하며 사기가 매우 높고 용감하여 유엔군 사이에서도
터키군의 용맹은 높이 평가되었다고 한다.
1953년 휴전될 때까지 모두 14,936명의 터키 군이 한국에 왔으며 그 중 전사 725명, 부상 2,147명,
실종 175명 등 3천여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터키는 16개 참전국 중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나라였으며
터키군인들의 인명피해는 미국과 영국 다음의 세 번째로 많은 것이었다.
도움을 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터키가 우리를 돕기 위하여 터키사람들이 그들의 고귀한 피를
이 땅에 흘린 것을 잊었지만 터키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가 지구의 동쪽 끝에 있는 옛 형제의 나라를 돕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터키군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터키에는 앙카라의 한국공원 안에 「한국 참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한국에 있는 터키군 참전기념탑>
<터키의 앙카라 한국공원에 있는 한국참전 기념탑>
다. 월드 컵 축구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주최한 월드컵 축구대회.
월드컵이 개최되기 몇 달 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터키 축구협회간부가 만난 한국 사람들이
터키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 줄도 모르더라는 사실이 터키현지의 언론에 보도되었었다.
이것은 터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자신들은 한국을 전쟁에서 피를 나눈 혈맹이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고,한국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하여 월드컵경기를 개최할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이
자신의 일인 듯 기뻐했는데 터키란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는 한국 사회 지도층인사의
언행에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 사람들이 터키를 응원해 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인터넷을 통하여 터키는 우리와 형제의 나라이니 월드컵에서 터키를
응원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6월3일 울산에서의 브라질-터키 경기. 터키가 비록 2;1로 패했지만 터키선수들은 홈구장에서
경기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한국 관중들이 한국특유의 응원방법을 동원하여 요란하고 화려하게
터키선수들을 마음껏 응원해 주었으니 경기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흐뭇하였을 것이다.
인천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코스타리카와 1:1로 비긴 터키가 6월 13일에 중국과 예선 마지막 경기를
서울 상암 경기장에서 갖게 되었다. 이미 2패를 하여 예선통과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졌지만 전패만은
모면해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중국을 상대로 터키는 반드시 이겨야만 코스타리카를 제치고
16강에 오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중국은 당연히 한국 관중들이 먼나라인 터키보다는 가까운 이웃인 중국을 응원해 주리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상암 경기장에 모인 6만여 명의 한국 응원단은 터키 선수들이 자국 내에서조차
본 일이 없는 대형 터키국기를 관중석위로 떠다니게 하는 응원과 파도타기 응원 등 신나는 응원을
펼쳐 중국에서 온 몇 천 명의 중국응원단의 응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소리로 터키 팀을
응원해 주었다. 한국 관중들의 응원덕분에 터키 팀은 중국을 3:0으로 대파하고 대망의 16강전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하는 터키선수들의 눈에는 환희와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일본에서 벌어진 16강전에서 터키는 일본을 꺾고 8강에 올랐으며 한국은 이태리를 꺾고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서 터키는 아프리카 최후의 보루인 세네갈을 제물로 삼아 4강에 올랐고
한국은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올랐다.
한국과 터키 자신도 놀란 두 형제국의 월드컵 4강 동반 진출이었다.
비록 4강전에서 한국과 터키는 독일과 브라질에 패하여 결승진출에 실패하고 두 나라가 3~4위전을
벌이게 되었지만 두 나라의 3~4위전은 승패를 초월한 축제의 마당이었다.
두 팀 선수들은 관중들에게 팬 서비스하듯 축구의 황금 스코어라는 3:2의 스코어로
터키가 3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축제를 마무리하였다.
터키에서 한국은 역시 형제의 나라라고 난리가 났었다.
다시 4년 후. 2006 독일 월드컵.
터키는 2006 독일 원드컵에는 본선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터키의 한.터키 친선협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축구응원단이 구성되었다.
자비로 터키에서 독일까지의 여행경비를 부담한 수 백 명의 터키사람들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대 한 민 국 짝짝짝”을 외치며 한국 팀을 응원하였다.
한국은 1승1무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하였지만 터키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앉고
귀국할 수 있었다.
터키사람들은 축구를 아주 좋아한다. 유럽의 프로축구팀에 진출한 한국선수들에 관하여 우리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 박지성 이영표 등의 이름과 그들이 소속한 프로팀은 물론이고 그 팀의 최근 성적까지도
꿰고 있다. 터키여행하며 터키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유럽 프로축구리그에
대하여 공부를 좀 하고 가야 될 것이다.
5.터키여행에 유용한 Web-Site
이스탄불 현지의 한국인 여행사 홈페이지. 터키여행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고,
이 회사를 통하여 한국인 가이드의 수배나 여행안내를 받을 수 있음.
이스탄불 현지의 한국인 여행사. 터키와 지중해지역에 관하여 다양한 여행상품을 운영하고
있으며, 개인여행자를 위한 여행비용의 견적과 여행안내를 받을 수 있음.
http://www.home.turkey.or.jp/kr/destin/istanbul/istanbul.html
한글판 터키관광청 홈페이지로 이스탄불에 관하여 보다 상세한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음.
터키 문화관광부 홈페이지. 가장 풍부한 터키 여행정보를 접할 수 있는 사이트임.
http://english.istanbul.gov.tr/
이스탄불 시의 홈페이지. 이스탄불의 역사,문화유산,날씨등 이스탄불에 대한 여러가지 여행정보
를 갖추고 있음.
http://www.turkishdailynews.com.tr/
터키에서 발간되는 인터넷 영자신문. real time으로 터키의 생생한 뉴스를 볼 수 있고 날씨 등의
현지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용한 site임.
http://www.turkey-now.org/Default.aspx
터키 해외경제관계위원회의 홈페이지. 터키의 경제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 외에
“About Turkey"항목에서 터키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다.
터키항공의 홈페이지. 터키항공의 운항 노선 및 스케줄과 서비스 내용 외에 각종 여행정보가
풍부한 터키항공 기내지 Sky Life를 2001년 치부터 열람할 수도 있다.
터키배낭여행, 터키사랑 동호회의 카페. 터키 여행정보와 터키에 다녀 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을 수 있다.
6. 터키의 문화유산
가. 세계7대불가사의
세계7대불가사의 중 2개가 터키에 있었다.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미테스 신전과 할리 카르나소스의 마우솔러스 영묘가 그것이다.
또한 신 세계7대불가사의 선정시 최종후보에 올랐던 20개에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 "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르미테스 신전>
아르미테스 신전은 지금은 모두 파괴되고 신전의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 이곳이 아르미테스 신전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미테스 신전의 유적 :야후의 위키 사전>
아르미테스 신전은 그리스 신화의 아르미테스 여신을 위한 신전이었다. 아르미테스 여신은 제우스 신이
레토와 관계하여 낳은 딸로 태양신 아폴론(Appolon)과 쌍둥이 남매간이다. 아르미테스 여신은
처녀의 수호신으로 순결과 정절의 상징이었으며 다산(多産)과 풍요의 신이기도 하였다.
아르미테스 신전은 기원전 6세기 리디아의 왕 크로이수스(Croesus)의 자금지원으로 세워 졌다.
이 신전은 길이가 115m, 넓이가 55m이며 18m높이의 이오니아식 기둥 127개가 에워싸는 모양의
신전이었는데 이는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2배의 규모였다.
아르미테스 신전은 BC356년에 한 남자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BC323년 경에 재건되었으나
AD262년에 고트 족의 침입 때에 다시 파괴되었다.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우상숭배금지
지시로 신전이 완전히 폐쇄되었고 아르미테스 신전의 기둥중 상당수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소피아 성당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할리 카르나소스의 마우솔러스 영묘>
할리카르나수스(지금의 터키 보드룸)에 BC353~350에 세워졌던 페르시아제국의 총독 마우솔러스의
영묘. 가로 세로가 각각 32m, 38m에 높이가 45m나 되는 큰 건물형태의 것으로 그때까지 사람이 만든
무덤으로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것이었다고 한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영묘 1층의 기둥사이에는 그리스의 유명 조각가들의 훌륭한 작품들로 장식이 되어 영묘의 모습을
더욱 장려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우솔러스는 페르시아제국의 총독으로서 할리카르나소스 일대를 다스렸는데 그리스어를 말할
줄 알고 자신의 영지에 그리스의 문물을 도입하는데 열심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아나톨리아의 남서해안까지 그의 영토를 확장하고 수도인 할리카르나소스 일대에 그리스 식
시가지와 신전등을 건설하여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 터키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
1.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 유적(복합,1985 )
2. 넴루트 댁 고고유적(문화,1987)
3. 대 모스크와 디브리지 병원(문화,1985)
4. 사프란볼루 시(문화,1994)
5. 이스탄불 역사지구(문화,1985)
6. 크산토스-레툰(문화,1988)
7. 트로이 고고유적지(문화,1998)
8. 하츄샤(문화,1986)
9.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복합,1988)
유네스코의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복합되어 있는
복합유산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 유적,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의 두 가지는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의
복합 세계유산이고 나머지는 전부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 ) 내의 수자는 지정연도이다.
터키의 장구한 역사와 다양한 민족이 명멸하였던 역사의 다양성에 비해 볼 때에 터키의 문화유산 지정은
의외로 빈약한 편이다. 특히 1700여년 동안 로마제국,비잔틴 제국,오스만 터키의 3개 대 제국의 수도로서
수많은 문화유산을 품에 안고 있는 이스탄불이 "이스탄불의 역사지구"라는 포괄적인 분류로
하나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은 불공정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파리 센 강의 제방이 별개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에 비교해 볼 때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나 톱카프 궁전, 불루 모스크가 단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확실히 공정한 일은 아니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제도가 당사국의 지정신청에서부터 지정절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터키가
문화유산제도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적었거나 아니면 유네스코를 설득하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정연도를 보면 그러한 느낌이 더 해진다.
터키는 이천년대에 들어서 단 한 건의 세계유산 지정이 없었다. 중국이 이천년대에 들어 14개의
세계유산을 등록하여 총 37개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는것이나 멕시코가 이천년대에 8개의 세계유산을
추가하여 총 29개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것과 비교해 보면 이러한 느낌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터키의 문화관광부에서는 최근에 19개의 세계유산 지정신청을 유네스코에 제출하고 지정을 위한
자료의 제출등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야 소피아,슬레이만
모스크,톱카프 궁전을 단일 세계유산으로 독립해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을 사랑하고 문화유산을 따라다니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터키의 세계유산 지정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다면 터키를 더 바쁘게 드나들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