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정복자 ‘아틸라’와 한민족의 친연성(親緣性)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달렸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종호 과학국가박사]광개토대왕(375〜413)은 즉위 초부터 정력적인 정복사업을 벌려 서로는 요하, 남으로는 한강 유역에까지 세력을 미쳤으며 북으로는 개원, 동으로는 옥저와 예(濊)까지 차지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394〜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되찾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펼칠 때 서양에서도 한민족의 일족인 훈족(Hun)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서기 375년, 기마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하자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고,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서 게르만족이 살게 됐는데 100여년 후인 476년, 로마제국은 게르만인 오토아케르에게 멸망한다. 이후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로 흩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을 만들었으며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진다. 서유럽의 국경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훈족에 의해 유럽의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에 따르면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임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훈족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가 원류인데, 흉노는 진시황시대인 기원전 3세기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혈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심한 부침을 겼었는데 이때 흉노에 속해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 신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둘째, 훈족이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안장에 앉은 채 몸을 돌려 화살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보이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편두(偏頭, 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에서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에까지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머리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머리에 고랑 같은 주름이 쭉 둘러 있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임을 발견했다.
그런데 가야가 있었던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왕도 편두였다는 기록이 있다. 편두는 고대 인도에서 행해진 구습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진 풍습으로 인정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도 편도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
반면에 훈족에게서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일반적인 흉노족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흉노 중에서 편두 습속을 갖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편두를 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의 지배세력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일괄적으로 기마민족의 상징적인 유물로 유명한 대‧소형 동복(銅鍑, cup cauldrons)들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금관과 함께 한국 5천년을 대표하는 유물로 1924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인 기마인물상 토기에서도 말의 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다. 게다가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편두이다.
여섯째,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금관 등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이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 형상(出字形 장식)과 녹각 형상(鹿角形 장식)이 많은데 이는 북방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음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훈족과 한민족을 연계시키지 못한 것은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의 원류를 흉노(몽골-투르크계)로 인식했으나, 그들의 지배집단을 동양계(몽골계)가 아닌 서양계의 투르크 민족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투르크계는 6세기 중엽에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후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을 거쳐 현재 터키 공화국을 이루었다. 훈족을 투르크족으로 예단한 것은 동로마 황제들이 훈족의 지도자들을 알타이어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
동양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지 20년 후, 즉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Attila, 395〜453)가 탄생했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나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게 공물을 주면서 화친을 맺어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따라서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라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인질(현재의 대사와 같은 형태)로 자랐다. 반면에 로마에서는 452년 서로마의 운명을 걸고 프랑스 서남부 살롱에서 세기의 전투를 벌이는 ‘최후의 로마 백작’ 아에티우스를 훈족 진영으로 보낸다.
434년 삼촌인 훈족 왕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의 왕이 되었다. 435년,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하는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지체하자 두 왕은 동로마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로마는 자신들의 잘못을 재빨리 인정하고 마르구스에서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때 블레다와 아틸라는 동로마 사절단에게 말을 탄 채 회담을 하자고 요구했고 동로마측은 순순히 이 제의에 응했다고 한다. 이어 서로마로부터는 서고트인들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 받으면서 훈족은 사실상 서양의 패자가 되었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가 훈족의 단일 지도자가 돼 훈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남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 반도, 북으로는 발트 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서로는 프랑스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으며 치하의 종족 수만도 45여 족에 이르렀다.
이때 아틸라로 하여금 국제전에 개입하게 하는 여인이 등장했다.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는 동생을 황제직에서 밀어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돼,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에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하는것이었으므로 아틸라는 서로마 황제에게 지참금으로 ‘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한 뒤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켜 버렸다.
서로마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 프랑스의 메츠, 랑스, 오레앙 등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근거지까지 접근하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인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훈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하여 대항했다.
451년 6월 20일, 프랑스의 트루와 시(파리 동남쪽 약 210킬로미터) 서쪽에서 세계 15대 전투 중에 하나로 불리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살롱 대전투는 양쪽에서 각각 20여만 명이 참전했고 전사자가 15만 명에 달한 대규모였다. 결과는 무승부였는데 서로마측으로서는 아틸라의 공격을 막아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곧바로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또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였다. 서두에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후, 파두, 베로네,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베니에티암(나도 여기에 왔다Veni etiam)’이라고 외쳤는데, 이 말이 변해 지금의 베네치아라는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 어의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 또는 힐디코로 불리며, 유명한 게르만민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크림힐트로 나오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됐다.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들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그가 잠들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자들은 결혼식 날 과음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살해됐다고 추정한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막내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 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곧바로 분열돼, 469년 훈제국은 동로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로마에 패배한 후 대다수의 훈족은 동쪽의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지만,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몇몇 종족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 정주했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 인들과 융합하여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에 있는 세켈리 족은 자신들의 선조가 훈족이고,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루마니아는 드라큘라 백작 이야기가 나온 곳이기도 한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드라큘라의 원조를 아틸라로 보고 있다. 드라큘라의 모델로 알려진 드라큘라 백작(1431~1476)은 1000년 정도 후대의 사람이다.
서양인들은 아틸라에게 ‘잔인함과 약탈자이자 파괴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었다. 이러한 비난이 따르는 것은 동양인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심장부까지 점령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호령했고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세아 동북방을 호령했다.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신라(진한)와 보다 친연성(親緣性)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한민족이라 볼 수 있다.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서양을 호령한 것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크게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