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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4. 성령강림 후 열한째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39편 21-24절
찬송 / 470장 · 내 평생에 가는 길
성서 / 출애굽기 32장 1-14절, 마태복음 4장 1-11절
말씀 /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출애굽기 32장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 4장 4절)
김윤식 목사
Ⅰ
어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사은회를 열었답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앞에 모시고 스승의 노래를 불렀지요. 그런데 한 학생이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다 같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요. 그동안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사하는 마음일지 아니면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알 수 없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의 표정은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차 보였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눈물을 그치고는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반드시 새겨야 할 가르침을 남겨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자 존경받는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매일 성경을 읽어라. 돌아보니 나에게 성경 말씀보다 더 힘을 주는 것이 없었다. 둘째, 너희 몸을 단련할 운동을 매일 하여라. 진리를 머리로만 익히려고 하지 말고 몸으로, 너희의 생활로 익혀라. 셋째, 설교는 꼭 교회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말씀을 전하여라. 시사평론이나 수필 같은 이야기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훨씬 더 잘한다.”
정말 단순하고 평범한 가르침 아닙니까? 그렇지만 스승이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가르침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 특별하고 비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평범한 데 있다는 것이었지요. 현실의 고된 어려움과 세상의 시험을 뚫고 나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가장 기초적인 일의 반복과 기본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고 하여도 초보적인 스케치는 언제나 바른 자세로 반복해야 하는 것이고,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훈련은 누구나 계속해야 하는 것처럼 스승이 남긴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들은 목회의 길을 나서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깊이 새기고, 언제나 반복해야 할 신앙의 기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Ⅱ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나님만을 섬겨라”. 언뜻 듣기에 정말 평범하고 단순한 가르침이지요. 신앙인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을 법한 말입니다. 이 말씀들은 어떤 말씀이지요?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서에서 함께 받아 읽은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사탄을 향해 하신 말씀이지요. 예수께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탄의 교묘하고도 집요한 유혹과 시험을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과 유혹들은 완전히 낯설거나,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과 그 시험에 대한 대답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시험받고 훈련한 시간과 그 가르침들을 압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한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누구든 경험하는 유혹과 시험이기도 하고, 그 대답은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험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었지만, 그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홍해를 건너며 이집트의 군대를 물리치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곳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그 백성의 무리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을 인도하시며 지켜주셨지요(출 13:21-22).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도자인 모세를 따라 나선 곳이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없는 곳이지요.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향해서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였을 때가 좋았다고 항의합니다. 이집트 땅에선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광야에서 다 굶어 죽게 생겼다는 항의였습니다(출 16:3). 또한, 광야에는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마르자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까지도 의심하기 시작했지요(출 17:7). 길을 안내하는 모세만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의심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산으로 향했을 때, 사십일이 지나자 폭발하고 말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은 불안과 걱정과 염려가 의심이 되었고, 그 의심이 마침내는 불신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자기들이 새롭게 의지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으로 된 장신구들을 모두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아론은 그것들을 녹여 황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원한 신”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은 안심하고 기뻐하면서, 즐거워하였지요. 그러나, 사실 금송아지 형상이 생겼다고 해서 그들의 현실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금노리개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기뻐하면서 자신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안심하고 만족한 것일 뿐입니다. 즉,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안을 삼고, 자기들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금지한 방식으로 불안을 이겨낸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먹을 것이 없으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항의하고, 마실 물이 없으니 마실 물을 달라고 항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지도자가 없어진 이스라엘이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염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 아닐까요? 하지만, 문제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굶주림과 목마름과 불안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고사는 것을 무기로 그들을 끝없이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었지요. 더 큰 문제는 목마른 사람들에게 불의와 불법과 부정과 거짓으로, 그렇게 만들어낸 불안으로 더욱 목마르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비록 우상이고, 거짓이고, 야만이더라도, 그 탐욕의 속내가 불 보듯 분명하고 뻔하더라도, 순응하고, 절하고, 따르기만 하면, 높은 자리도 주고, 명품도 주고, 고급술도 주고, 기름진 쾌락도 마음껏 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마주한 배고픔과 굶주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고픔과 굶주림을 핑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들의 불안 때문에 불의한 세상의 유혹과 우상의 탐욕을 따르게 된 데 있었던 것입니다.
Ⅲ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픔과 굶주림에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십여 일을 굶으셨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고 목마르셨을까요? 그런데 바로 이때 사탄이 배고픔과 목마름에 힘겨워하시는 예수께 찾아와 집요하고도, 교묘한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첫째,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첫째 시험입니다. 돌들이 빵이 된다면, 그렇게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다면 누구든 굶주림에서 해방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빵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적게 거두고도 모자라지 않고, 많이 거두고도 남지 않았던 신비한 만나처럼, 사람이 빵으로 자기 배만 불리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셨지요. 그 가르침을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길은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을 무기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길도 아니고,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되신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이 아니라,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나누어 먹고도 남는 기적을 보여주셨지요.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나누는 참된 기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온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고, 스스로 온 생명을 살리는 빵이 되어 주셨습니다.
둘째 시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하는 시험입니다. 그래도 상하지 않는 능력을 보여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도 상하지 않는 능력이 있어야 신앙인이고, 그렇게 하는 이가 신이라는 시험입니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상하는 것이 인간이지요. 그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래도 안 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상한 일이고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의심부터 해보아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닐까요? 어쨌든, 그렇게 사람들에게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답게 꼭대기에 서라는 유혹과 거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도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꼭대기가 아니라 가장 밑바닥에 서셨지요.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이들이 우러러 보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작은이들을 하나님처럼 섬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약하고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셨습니다. 언제나 작은이들 안에 있는 큰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믿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작은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 형상을 따라 자신을 빚어가는 사람들, 작은이들에게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심하듯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를 서로 믿고 존중하는 공동체로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시험에서 사탄은 높은 산에서 천하를 보이면서,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것이 부정한 것이더라도, 우상이며, 거짓이며, 불의와 부정으로 얼룩진 것이더라도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그것에 절하기만 하면 부와 권력도 쾌락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길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당하게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께서 마주한 광야처럼 음식과 물이 없어서 목마르고 배고픈 시대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께서 마주하셨던 시험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보다는 그저 세상의 편리를 따라 살아가라는 노예의 유혹이 가득합니다. 갈수록 커져가는 세상의 불의와 부정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마저 불신하게 하지요. 투기와 세습으로 노동 없이도 끝없이 부풀어가는 부와 학연과 지연과 혈연으로 공고하게 세워진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는 이 구조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에게 불안을 잠재울 허황한 주술이나 쾌락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섬기지 말고 부와 권력과 명예의 우상을 섬기라는 유혹으로 가득하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길을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나님만을 섬겨라”는 세상의 유혹에서 승리하는 예수님의 단순하고도 분명한 대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세상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유롭게, 서로 사랑하며,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서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이를 하나님처럼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아마도,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탐욕을 신으로 섬기는 일의 가장 큰 불행은 그 우상과 탐욕을 따라가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마침내는 그 우상을 닮아가는 일일 겁니다. 입이 있어도 온전히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가장 큰 복은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시험은 때로 버겁고 힘겨운 것이지만,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세상의 유혹과 하나님 사이에서, 불신과 믿음 사이에서, 불의와 의 사이에서, 탐욕과 나눔 사이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도록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우리가 책임을 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의 일상이 반복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나날이 깊어지고 성장하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모두를 지켜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