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양승국신부-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성주간 피정 프로그램으로 영화 ‘유다’를 보았습니다. 유다는 제자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그나마 꽤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의를 보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세상 바꾸기’였습니다. 제대로 된 혁명이었습니다.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무장해서, 힘으로 한번 전복시켜보는 것이 그가 꿈꾸고 있던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런 유다에게 예수님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가득 찬 채.
만 명, 이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명성과 능력에 유다는 내심 흡족해합니다. 자신의 계획이 차곡차곡 가시화됨에 기뻐합니다. 그리고 가끔씩 그런 자신의 계획을 예수님께 아룁니다.
“선생님,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합니다. 이 사람들 손에 무기 하나씩만 손에 들려주면 로마 주둔군, 그 녀석들 충분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번 로드맵을 구상해볼까요?”
이처럼 유다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남달랐습니다. 신앙이 대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아들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있어 성공의 지름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성취의 도구였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쌓아나갈 수 있는 발판이었습니다.
이런 유다는 향해 예수님께서는 잘못 설정된 방향을 바로 잡도록 반복해서 타이르십니다.
“여보게, 자네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네. 내 방법은 그게 아니라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발 마음을 바꾸게.”
불행하게도 유다는 끝까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유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다른 제자들 역시 완벽하게 순수한 동기로 예수님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 같은 경우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대놓고 다른 사도들과 다투었습니다. 어쩌면 상황은 유다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구분되는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에게는 나름대로 쇄신과 정화의 길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관에 대한 수정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초보적인 신앙이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의 신앙은 성장이 없었습니다. 쇄신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관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자기 성취의 도구로 바라봤습니다. 그 결과가 배신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놀라울 뿐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유다를 몰아세우시지도 않으십니다. 끝까지 자신의 계략을 숨기는 유다에게 드러내놓고 욕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의 잘못을 다른 제자들에게 떠벌이지도 않으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다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제자, 끝까지 속이는 유다에게도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빵을 포도주에 적셔 나눠주십니다. 배반 전에나 배반 후나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대하십니다.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묘사입니다.
3년이란 세월을 같이 동고동락했던 다른 제자들, 웬만하면 눈치 챘을 텐데, 예수님께서 끝까지 함구하신 관계로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끝까지 유다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태도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막나가도, 우리가 아무리 죄 속에 빠져있어도, 우리가 아무리 방황을 거듭해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코너로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모욕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기다리십니다. 그저 참아주십니다. 끝까지 우리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면
-김종기신부-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길인 동시에 아들로서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길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들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불리한 입장이 되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실망스런 태도를 보이며 돌아서버리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때론 참고 견딜 수 있는 작은 어려움도
쉽게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약한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인간적인
굴욕 속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다짐하며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5분 지났어요
-서효경 수녀-
눈에 문제가 생겨 안과에 갔다. 간호사는 눈물검사를 한다며 작은 칩을 두 눈에 꽂더니 5분만 기다리라고 했다. 눈이 따갑고 매웠다. 조금 있으니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 눈이 따가워 뜰 수가 없는데 간호사는 오지 않았다. 수녀 체면에 사람들 많은 데서 간호사를 부를 용기가 없었다. 속으로 ‘예수님, 예수님, 간호사가 저를 잊어버렸나 봐요. 간호사를 불러주세요.’ 하며 예수님만 찾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간호사를 불러주었다. “여기 계신 수녀님, 5분이 훨씬 지났는데요.” 간호사가 다가왔다. “수녀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예수’ 그 이름밖에 찾을 수 없는 처지에서 예수님을 부를 때 그 순간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구해 준다면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해 준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 이름밖에 부를 수 없는 처지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때 나는 그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찾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예수님의 공동체라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찾는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 주어야 한다. 오늘날 신앙 공동체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구하는 이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받는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살려드려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과 봉사자들은 자신의 직무와 능력으로 하느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져야 한다. 만일 사사로운 이익과 자기의 욕망을 앞세워 약자들이 찾는 예수님의 이름을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직무 남용이요, 유다의 배신을 재현하는 일이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 교회 안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이름을 외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화요일에...
-오상선신부-
오늘의 무대의 중심인물은
유다와 베드로이다.
예수 수난극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인물이다.
유다는 성월요일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는데,
오늘은 더욱더 그 역할이 분명해 지기 시작한다.
<스승인 예수를 팔아먹을 자>라는 것이다.
유다 또한 일말의 양심은 있었을 것이고
나름대로 예수를 존경은 하고 있었다.
또 나름대로의 기준 하에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존경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될 뿐이었다.
예수를 팔아먹는 자는 처음부터 준비된 악인은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유다적 사랑과 존경을 예수께 드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예수를 팔아먹을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유다를 나쁜 놈으로 치부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은 예수를 어떻게 사랑과 존경하고 있는지,
상황에 따라서 예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는
그런 나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으뜸 사도인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늘 큰소리치지만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할 자>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으뜸사도 역할을 맡으라고
인정받은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연약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손치더라도
정말 순탄치 않은 위기가 닥치면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할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자, 이렇게 본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유다와 베드로,
어떻게 보면 상반된 인물인 것 같지만
실상은 같은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나는 유다이기도 하고 베드로이기도 하다.
<예수를 팔아넘길 자>가 될 수도 있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하며 배반할 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유다와 베드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각자 직시하고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라고 촉구하신다.
따라서
그 누구를 유다같은 놈이라고 힐책하고 비판하지 말자!
그 누구를 베드로같은 배신자라고 욕하지도 말자!
내가 바로 유다이고
내가 바로 베드로가 아닌가?
내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게되는
유다이고 베드로란 말이다.
그리고 겸허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고백하자.
주님, 제가 바로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입니다.
제가 바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입니다...
아, 주님!!
독서강론 :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자.
-: 경규봉 신부-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종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당신의 종을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을 위해서 그를 뽑으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이 능력과 힘을 가지고 전파됨으로써 당신의 영광이 빛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생각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수고와 고통을 인정하시고 그에 대한 보상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와 고통은 결국 목적할 만큼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며, 나아가 온 세상의 빛으로 세워 온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이 예언은 메시아(그리스도)의 강림을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에 따라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 하고 복음을 전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온갖 질병과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해주시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얽매는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해방시키시어 자유롭게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질병과 악령,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루가 17,11-17).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마태 12,24)라고 비난했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했으며(마르 2,7), 급기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 죽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마태 23,36)는 주님의 말씀처럼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수효 또한 많지 않았다(1고린 15,6).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거부로 이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은 온 세상으로 보다 쉽게 전파되어 나갔던 것이다(사도 13,46). 결국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3-25)라고 말한다.
세상의 가치기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도 승리할 것이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간다.”(1요한 2,17)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신다.”(히브 1,11)
그러므로 다 지나가버릴 세상 것에 연연해하지 말자.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가치를 추구하자.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자. 나 자신이 오늘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임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묵상말씀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