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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시대의 전례 사목] (6 · 끝) 신앙의 중심을 찾아서
신앙의 본 모습 되찾기 위해 노력하자
신앙의 중심을 찾아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많이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한편 힘들고 어려운 경우들도 많이 있다. 새로운 환경이지만 우리 교회는 신앙의 본 모습을 되찾고 돌아가도록 힘써야 하겠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일까? 바로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교회의 이상(Utopia)을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전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빵을 나누며, 형제애를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단순하게 표현된 이 하나의 문장 안에 초대 교회의 공동체가 살아왔던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네 가지로 잘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일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만, 교회를 통해 가르치는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구원의 참된 진리를 깨닫고 굳건한 신앙을 다지며 깊게 만드는 일이다.
둘째는 빵을 나누는 일, 곧 성찬례(미사)를 거행하고 함께 하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모이면, 미사인 성찬례를 항상 거행하고 주님을 만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리가 곧 성찬례가 거행되는 자리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말씀 안에, 성체 안에, 사제의 인격 안에,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 모습을 다 갖춘 자리가 바로 미사 전례가 거행되는 자리인 것이다.
셋째는 형제애, 곧 친교를 나누는 일이다. 성찬례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공동체가 함께 어울리고 나누는 친교의 자리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 교회는 이 점을 많이 실천하고 있으며, 익숙하며 또 생활화돼 있다.
네 번째로는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매일 기도와 지속 기도를 가리키지만, 그룹이든 개인이든 여러 형태로도 기도할 수 있다. 사제와 수도자는 성무일도가 있고, 신자들도 참여하기도 한다. 아울러 신자들은 일상의 기도, 성월 기도,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 여러 환경에 따른 지속 기도 등 다양한 기도를 한다.
신앙의 본 모습을 찾는 노력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유일하게 불가능한 것은 앞서 말한 것들 중 세 번째의 것, ‘형제애를 나누는 일’이다. 사목 프로그램의 어떤 행사나 잔치도 불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우리에게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모습은 공동체의 친교마저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다. 그러기에 친교를 위한 다른 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축일이나 본당 축일, 명절 등에는 다양한 형태의 간단한 선물로도 친교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선물에 의미와 정성을 담고, 간단한 문구를 적어 보태어 축일을 축하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교우들 간에 친교를 위한 온라인 프로그램을 운영해 서로 안부를 묻고, 필요에 따라 반장이 찾아보거나, 어려운 환경에 처한 교우들에게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사목자가 보내주는 연락이나 말걸기 뿐 아니라, 교우들 간에도 말걸기를 통해 교류하고 소통하는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네 번째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일’이다. 우리는 미사 중심의 기도 생활을 해 왔다. 늘 사제 중심의 기도를 했고, 축복을 받았다. 사제가 있으므로 언제나 미사를 중심으로 기도와 행사를 해 왔다. 성직자 중심의 기도 생활에 익숙하고 여기에만 치우치는데 머문다. 미사 만능주의의 경향이다.
그로 인해 사제가 없이 거행되는 ‘기도 모임’이 잘 실천되지 못했고, 함께 하거나 또는 개별로 기도하는 생활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기에 미사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개인 기도나 가정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들을 보인다. 가정에서 기도할 수 있는 기도 자료를 만들어 보급해 가장을 중심으로 가족이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안내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언급했었지만 미사를 하지 않았을 때 행하는 ‘가족 공소예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치유와 생명의 교회가 되어야
환경이 달라졌지만, 신앙이 흔들리거나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사목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질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의 문제다. 이는 단순한 치유의 문제나 의학적 과제로 남겨놓기에는 부족하다. 복잡하게 꼬인 유전자 변이처럼 우리의 생활도 비정상으로 꼬여 있다. 복잡한 원인을 파악하고, 영혼의 병을 치유함으로써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는 위기의 시대에 맞이한 인간실존과 공존의 문제이며, 또한 구원과 연결된다.
주님은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시면서 이를 인간 해방의 과제로 보신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인간관계의 단절, 상생과 협력의 부재, 자리 다툼, 시기와 질투, 중상과 비방 등 질병이 많다. 인간은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영적으로는 최악의 빈곤 상태다.
우리는 참생명을 위해 모두 일어나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가 코로나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신다. 치료해 주시는 ‘요술쟁이’ 예수님을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똑같이 살아내야 한다. 주님은 위기를 맞이한 우리 마음에서 복음의 싹이 트고 자라나 치유와 참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전례 탐구 생활 (42) 빵과 포도주 축성, 그 실체의 변화
감사 기도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두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러한 행동과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예식, 당신의 파스카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최후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록 빵과 포도주의 초라한 표징 안에 가려져 계시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사 전례 전체의 절정이라고 할 만한 순간에 사제는 예수님께서 몸소 하신 바로 그 말씀을 되풀이하며 빵과 포도주를 축성합니다.
이러한 축성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실제로 현존하시게 되는 장엄한 순간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통하여 빵의 전 실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전 실체가 그분 피의 실체로 변하는 ‘실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빵과 포도주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필리 3,21)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이 특별하고 놀라운 순간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로 실체적으로 변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말하자면 일종의 ‘핵분열’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의 원리가 창조 안에 도입됩니다. 이 변화는 온 존재의 핵심에 파고들어 실재를 변화시키는 과정,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기까지(1코린 15,28 참조)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시작합니다.(사랑의 성사, 11항)
지극히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 순간을 위하여 교회의 전례는 엄청난 공연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룬다고(이사 55,11) 하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사제가 되풀이하는 것만으로 실체의 거룩한 변화가 모두 이루어집니다. 잠깐 한눈팔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짧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 순간, 사실은 세상천지가 요동을 치며 자신의 본질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귀한 단순성’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깊은 절을 하는 우리의 표현이 ‘실체 변화’라는 놀라운 기적에 비하면 사소하고 성의 없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놀라운 일이 벌어질 때 사람이 할 말을 잃듯이, 창조주께서 몸소 활동하실 때 피조물은 침묵 속에 응시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깊은 절과 장궤(長跪)는 그래도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진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여 드리는 최선의 자세입니다.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 구원에 도움이 되기에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가련한 몸부림입니다(공통 감사송4 참조).
[전례 주년과 성모 공경]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우리 모든 인간은 원죄, 곧 하느님과의 단절죄를 가지고 태어나며, 세례를 통해 원죄와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 그러나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평생토록 전혀 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즉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는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믿을 교리’로 선언되었는데, 한국 천주교회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줄 것을 청하였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성 요셉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이어져왔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은총 자체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죄의 흠이 있고 하느님과 단절된 원죄 상태에 있는 여인의 태 안에 잉태되어 오실 수가 없다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당연한 진리로 자리 잡았다.
이 교리에 대한 ‘기원’과 성모님의 ‘독특한 탁월함’에 대한 암시는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창세기에서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라는 표현과 루카 복음에서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라는 표현이 성모님의 원죄 없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창세기의 예언에서 ‘후손’(zera)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들’로도 옮길 수 있는데, ‘그 여자의 아들’이 예수님이심이 당연하기에 ‘그 여자’를 성모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칭호에는 성모님께서 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다는 고백이 전제되어 있다 할 것이다.
성 이레네오(+ 202)는 “동정 마리아는 순종하시어 자신과 온 인류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고 하였고, 더 나아가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이레네오, ‘이단 반박’, 3, 22, 4)고 함으로써 밝힌 ‘하와 – 마리아’의 대조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도 성 바오로를 따라 “죽음이 아담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예수님을 통하여 온 것”(1코린 15,21)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성 이레네오를 따라 “죽음이 하와를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마리아를 통하여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죄 없으심이 당연하듯이, ‘새 하와’이신 성모님도 죄나 흠이 없었다는 초대 교회에서부터의 생각이 성 이레네오에게 와서 분명히 논증된 것이다.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상 구속공로를 미리 입어 원죄 없이 잉태
이와 관련하여 동방 교회의 전통은 마리아를 ‘판아기아’(Panaghia, 온전히 거룩하신 분)라고 찬미하며, 특히 시리아의 성 에프렘(+ 373)은 “예수님, 당신의 모친은 홀로 가장 아름다우신 분, 당신이 티 없으시니, 모친 또한 흠 없으시도다.”라는 성가를 지었다.
서방 교회의 전통에 있어서 성 아우구스티노(+ 430)는 성모님께서 살아생전 죄를 짓지 않았지만 원죄가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원죄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운명이므로, 성모님께서 이를 피해갔다고 ‘규정’하기에는 조심스러웠을 터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원죄가 성관계를 통해서 유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의 히폴리토(+ 235)는 서슴지 않고 “예수님은 썩지 않을 나무로 만들어진 방주이셨다. 이는 그의 장막이 오염과 부패로부터 구제되어있음을 말해 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장막’은 성모님을 뜻한다.
‘새 하와로서 흠 없으신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감과 ‘원죄 교리’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중세시대 논쟁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1274)는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들긴 하셨으나 모태에 있을 때 원죄가 사해지셨다고 주장했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복자 요한 둔스 스코투스(+ 1308)는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무염시태’를 주장했다. 이는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간 오랜 논쟁 거리였다.
도미니코회의 입장에서는, 성모님을 원죄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공로를 입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는 교리와 배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직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성모님께서 원죄로부터 구원 받았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는 ‘선행구속론’(先行救贖論)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성모님께서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를 미리 입어 원죄로부터 완전히 보호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는 시간의 제약이 없으시기 때문에, ‘아직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지 않았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상 구속공로를 마리아에게 능히 선행적으로 적용하셨다는 것이다.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은총
중세에서 근대로 접어들면서, 성모 무염시태에 관한 신앙은 널리 지지를 받고 여러 교황들에 의해서도 용인되었다. 특히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을 인가했다.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음과 그 성덕의 탁월함에 관한 확고한 신앙은 19세기에 이르러 자유주의를 비롯한 여러 사상들이 가톨릭교회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천주교 신앙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열쇠로 지목되었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성모 무염시태를 교리로 선언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교회 헌장 12항에 의하면, 성령의 도유를 받은 신자들의 총체가 공통적 신앙감을 지니고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 그 총체는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이에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이를 ‘믿을 교리’로서 정리하여 선언하였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491항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구원받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배려이며 은총임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에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에 내려 보내시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공로를 마리아에게 선행적으로 적용하시어 잉태될 때부터 원죄가 없게 하셨으니, 곧 당신과 단절되지 않고 무결한 마리아 안에서 예수님이 잉태되고 인성을 취하게 하신 것이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인 12월8일에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기리는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성모님처럼 깨끗한 상태에서 성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하려는 교회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미사의 모든 것] (34) 영성체 예식
거룩한 성체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 이루다
나처음: 가톨릭 신자들은 왜 성체 영하는 걸 중시하나요?
조언해: 우리가 성체를 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봉헌하시고 제자들에게 “받아 먹어라”(마르 14,22-24) 하셨기 때문이야.
라파엘 신부: 영성체가 왜 거룩하고 중요한 예식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하셨기 때문이야.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에 가톨릭 신자들은 영성체 예식을 아주 거룩하게 여긴단다. 이 일치를 통해 성체를 모신 이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교회와 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과 일치를 이루지. 오늘은 영성체 예식에 관해 이야기해야겠구나.
나처음: 좋아요. 제가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해 성체를 영하지 못해서 영성체에 관해 너무 궁금하거든요.
조언해: 영성체 예식도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여러 예식처럼 여러 단계로 구성돼 있죠?
라파엘 신부: 그럼. 영성체 예식은 ‘준비 예식’, ‘영성체’, ‘감사 예식’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단다. 준비 예식은 사제가 성체를 나누고, 신자들이 합당하게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며, 성찬례에 참여한 이들과의 화해와 일치를 드러내는 예식이란다. 준비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평화 예식, 빵 나눔, 영성체 예식 전 사제의 준비 기도로 이루어져 있단다. 영성체 예식은 사제의 영성체, 교우들의 영성체, 성체 성가로 구성돼 있지. 감사 예식은 감사 침묵 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로 진행되어요.
영성체 예식을 라틴말로 ‘Ritus Communionis’(리투스 콤무니오니스)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하면 ‘공동체 예식’ 즉 ‘공동 참여’, ‘함께 나눔’이라는 뜻이란다. 이 명칭은 4세기부터 사용한 ‘Communio Corporis et Sanguinis Christi’(콤무니오 코르포리스 엣 상귀니스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동참, 또는 나눔)의 준말이란다. 라틴말 Communio는 헬라어 ‘Κοινωνια’(코이노니아)에서 나온 말이란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를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Κοινωνια)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방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라며 영성체가 단순한 친교를 넘어 그리스도와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단다.
조언해: ‘주님의 기도’로 영성체 예식을 시작하는 이유는 뭔가요?
라파엘 신부: 주님의 기도를 영성체 준비 기도로 하는 이유는 이 기도로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청하기 때문이란다. 또 거룩한 성체를 영해 그리스도와 일치될 수 있도록 먼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니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해달라고 청하지. 이러한 면에서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영성체 준비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언해도 알고 있겠지만 사실 주님의 기도는 지금처럼 누구나 다 하는 기도가 아니었단다. 초대 교회 때에는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기도였단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지. 그래서 영성체 예식을 시작할 때 사제가 손을 모으고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며 교우들을 주님의 기도로 초대하지.
사제는 주님의 기도에 이어 악에서 구해진 모든 이가 한평생 평화롭게 살며 언제나 구원된다는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해 달라고 청원하면 신자들은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며 영광송으로 주님의 기도를 마무리한단다. 이 영광송은 주님의 기도 응답인 “아멘”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주님의 기도 끝에 아멘을 하지 않아요.
나처음: 그런데 왜 한참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다가 생뚱맞게 서로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죠. 처음 미사에 참여했을 때 엄청 당황스러웠어요.
조언해: 고객님! 당황하셨군요. 영성체 전에 평화 예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라고 하신 말씀을 따르기 위함이지.
라파엘 신부: 언해가 잘 설명해 주었구나. 평화 예식 전문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되어있단다. 이 기도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이지. 곧 주님께 당신이 약속하시고 이루신 평화를 청하는 기도란다. 이어지는 “하느님의 어린양…” 역시 주님께 드리는 기도이지. “하느님의 어린양…”은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약속하신 평화(“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와 부활하신 후 하신 평화의 인사(“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19-23 참조)를 반영한 기도란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방법은 주교회의가 민족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정하도록 배려하고 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벼운 절이나 가볍게 안음, 그리고 손을 맞잡는 동작 등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눌 수 있어요.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는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만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며 평화를 표시하도록 권고하고 있어요.
나처음: 그런데 미사 때 보니 신부님께서 멀쩡한 성체를 쪼개서 들어 보이시던데 왜 그렇게 하시죠.
라파엘 신부: 미사 중에 성체와 성혈을 들어 회중에게 보여주는 예식은 모두 세 번 있단다. ‘성찬 제정과 축성 때’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는 ‘마침 영광송’, 그리고 ‘빵 나눔 예식’ 때란다.
성체를 쪼개는 것을 ‘빵 나눔’ 예식이라고 해. 사제의 이 동작은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행하신 거야. 사도 시대에는 성찬례 거행 전체를 ‘빵 나눔’이라고 불렀어.(사도 20,7.11 참조) 이 예식은 하나인 생명의 빵, 세상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영성체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0,17)는 의미를 담고 있지.
사실 이 예식은 유다인들의 식사 관습에서 유래된 거야. 가장이 둥글고 큰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바친 뒤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지. 그리고 이 빵 나눔을 통해 가족과 벗으로서 사랑과 일치를 다졌지.
사제는 빵을 쪼갠 후 한 조각을 성혈에 섞는단다. 빵과 포도주를 따로 축성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면, 성체와 성혈의 재결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거야. 이런 이유로 성체와 성혈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전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지. 이처럼 성체를 쪼개 나누는 것은 영성체를 통해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와 모든 이가 하나의 생명의 빵 안에서 일치하며 사랑한다는 뜻이 있단다.
전례 탐구 생활 (41)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시도다'가 끝나면 신자들은 미사 전례의 가장 거룩한 순간에 들어간다는 표시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함께, 아버지께서 성령을 선물로 내리시어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고,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도록 청하는 ‘성령 청원’이 시작됩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2양식)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아버지께 봉헌하는 이 예물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3양식)
주례 사제가 제대에 놓인 빵과 포도주의 예물 위에 두 손은 펼치며 청원하는 성령은, 신자들을 ‘한 몸으로’ 모으시어 아버지 마음에 드는 영적 예물이 되게 하시는 바로 그 성령이십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감사 기도 2양식)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 몸이 되게 하소서.”(감사 기도 3양식)
이렇게 성령 청원을 통하여 두 가지 선물이 우리에게 옵니다. 첫째, 성령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교리 교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놓인 예물에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어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가 되게 해 주시도록 간청합니다. 성령의 손길이 닿는 것은 무엇이나 거룩해지고 완전히 변화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떼 4,13) 됩니다. 사제는 희생 제물 위에 은총이 내리고, 이로써 모든 영혼이 뜨거워지도록 성령이 내리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성령 청원 기도는 우리 신원에 대한 중요한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교회는 사회 단체로서 많은 외적인 조직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은 우리가 친교를 이루는 데 핵심적인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면, 우리의 공동체 생활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없다면 계획을 세우고, 조직하고, 법과 지침을 제정하며, 모든 것을 예견하고 통제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모범이 되는 기업과 사회가 있겠지만, 인간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유지되고 활기를 얻을 때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찬례의 성령 청원 기도의 의미입니다.
[미사의 모든 것] (33) 봉헌 전문과 전구, 마침 영광송
성찬 전례 감사 기도 마감하며 장엄하게 노래하다
조언해: 성찬 전례 앞부분에서 이미 주님의 희생 제물 봉헌이 이루어졌는데 성체 축성 이후 왜 또다시 봉헌 기도를 하나요?
라파엘 신부: 성체 축성 후 ‘신앙의 신비여!’ 환호에 이어 사제는 주님과 함께 교회를 봉헌하는 기도를 드리지.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교회, 특히 지금 여기에 함께 모인 교회는 이 기념제로 흠 없는 제물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봉헌한다. 교회는 신자들이 흠 없는 제물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바치기를 바란다. 신자들은 중개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또한 이웃과 나날이 한층 더 완전히 일치하여, 마침내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게 해야 한다”며 이 봉헌 전례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단다.(79항) 처음이가 ‘로마 전문’인 제1양식 내용을 읽어줄래.
나처음: 네!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주님의 거룩한 백성은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의 복된 수난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을 기념하나이다. 저희는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선물 가운데서 이 깨끗한 제물, 거룩한 제물, 흠 없는 제물, 영원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존엄한 대전에 봉헌하나이다.”
라파엘 신부: 잠깐만, 이 전문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미사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이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데 있음을 알려주고 있지. 그래서 미사는 ‘기념’과 ‘봉헌’이 항상 연결돼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해. 처음아 계속 읽어 줄래.
나처음: “이 제물을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일찍이 주님의 의로운 종 아벨의 제물과 저희 조상 아브라함의 제사와 대사제 멜키체덱이 바친 거룩하고 흠 없는 제물을 받아 주셨듯이 이를 받아들이소서.”
라파엘 신부: 자! 이 전문에서 ‘봉헌 기도’임이 잘 드러나지. 교회가 봉헌하는 파스카 희생 제물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그 어떤 제물보다 비교도 안 되는 거룩하고 흠 없는 제물이지만 하느님께서 구약의 조상들이 바친 제물을 받아주셨듯이 이 제물을 받아달라는 간곡한 청원이 담긴 기도란다. 성체성사 곧 미사성제를 ‘찬양 제물’(히브 13,15), ‘영적 제물’(1베드 2,5), ‘깨끗하고 거룩한 제물’(마라 1,11)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이 구약의 모든 제사를 완성하고 이를 능가하는 것임을 일깨워준단다.
나처음: “전능하신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거룩한 천사의 손으로 이 제물을 존엄한 천상 제단에 오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제단에서 성자의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마다 하늘의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내려 주소서.”
라파엘 신부: 이 전문은 요한 묵시록 8장 3-5절에 나오는 ‘천상 제사’의 환시를 연상시켜준단다. 이는 미사가 지상 교회뿐 아니라 하늘의 영광 중에 있는 지체 곧 천상 교회와도 결합돼 있음을 일깨워주지. 그리고 “이 제단에서 성자의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마다 하늘의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내려 주소서”라는 전문에서 미사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적이고 현세적인 은혜를 얻기 위해 봉헌되는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해. 아울러 이 전문이 그리스도와 참된 일치를 이루는 ‘영성체 준비 기도’임을 알 수 있지. 영성체를 통해 친교와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하늘의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려면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이 전문엔 성령에 관한 말이 전혀 없으나 ‘성령 기원’이 함축돼 있음을 알 수 있단다.
사제는 이 봉헌 전문에 이어 주님께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우리를 위해 전구를 청하는 기도를 바친단다.
나처음: 전구요? 갑자기 형광등에 불 들어오는 소리를! 전구가 무슨 뜻이죠?
조언해: 또 아재 개그! 전구(轉求, intercessio)는 다른 사람을 위해 청원하는 기도를 말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병자 등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들과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해 예수님과 성모님, 성인들, 또 교회에 기도를 청하는 것을 전구라고 해.
라파엘 신부: 언해가 잘 설명해 주었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청원하는 대표적인 전구자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지. 그래서 사제는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 전문을 바친 후 “주님 간구하오니”라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죽은 이와 다른 산 이들을 위해 전구를 청하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적인 전구자이신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셨기 때문”이지.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셨지.(로마 8,34) 아울러 주님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성모님께서도, 그리고 성인들도 우리의 전구자이시지.
다른 사람을 위해 청원하는 전구는 아브라함 이래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일치된 인간 마음의 특징”(「가톨릭교회 교리서」 2635항)이야. 그리스도인의 전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성인들의 통공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해. ‘통공(通功)’은 ‘공로가 통한다’는 뜻으로 내가 쌓은 공로를 내 것으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음을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특히 연옥 영혼을 위해 전대사를 바치는 것도 전구와 통공의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조언해: 전구 전문 중에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 요한과 스테파노, 마티아와 바르나바, 이냐시오와 알렉산데르, 마르첼리노와 베드로, 펠리치타와 페르페투아, 아가타와 루치아, 아녜스와 체칠리아, 아나스타시아와 그 밖의 모든 성인들…”이 나오는데 거명된 성인들은 누군가요? 왜 특별히 이들만 이름을 기억하죠.
라파엘 신부: 이분들은 요한 세례자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공경받던 남녀 각 7명의 순교자야. 스테파노는 교회의 첫 순교자이시지. 전문에 남녀 성인 각 7명씩을 등장시킨 것은 ‘7’이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하는 수이기 때문이야.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계’를, ‘4’는 흙과 물, 불, 바람의 4원소로 이뤄진 ‘물질’의 세계를 나타내지. 3과 4가 더해진 수 곧 7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드러내지.
조언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할 때마다 미사의 장엄함을 느껴요.
라파엘 신부: 그래! ‘마침 영광송’이라고 하지. 영광송은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찬양하는 공적 기도를 말해. 마침 영광송은 미사 전례 중에 가장 중요한 성찬 전례 감사 기도를 마감하는 가장 중요한 환호이자 응답이야. 교회는 이 환호와 “아멘” 응답을 말로 그냥 외지 말고 성대하게 노래로 불러 성부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한단다.
기도를 영광송으로 마감하는 관습은 이미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에 나타난단다. 시편 1ㅡ41장 등 시편에 잘 드러나. 특히 시편 마지막 150장은 내용 전체가 영광송이야. 이 관습에 따라 초대 교회는 “영광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라고 기도하다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때 지금처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확정되었단다. 이를 우리는 ‘소영광송’이라고 해. 영광송은 이 ‘소영광송’과 미사 때 장엄하게 노래하는 ‘대영광송’(글로리아), 그리고 성찬 예식을 마감하는 ‘마침 영광송’이 있어요.
전례 탐구 생활 (40) 감사송, 거룩하시도다
주님께 감사드리자고 초대한 다음 사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감사 기도의 시작 대화부터 ‘거룩하시도다’ 전까지 바치는 이 기도를 ‘감사송’이라고 합니다. 감사송의 내용은 전례 시기나 미사의 성격에 따라 바뀌는데, 주로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하느님 백성의 의무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사순 감사송 1)
사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말하며 감사 기도에 동참하고자 하는 원의를 드러낸 백성 전체를 대신하여 사제가 드리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 미사의 주제와 연관된 본 내용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창조를 두고 감사드리거나, 전례 시기나 축제일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 활동의 특정 측면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성탄 시기에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사실에 감사 드립니다. 성주간에는 예수님께서 사탄에 승리하신 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합니다. 부활 시기에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도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핵심,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감사송으로 감사 기도를 일단락한 다음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어느 날 환시 속에서 어좌에 앉아 계시는 천상 임금님을 보게 되는데, 그분의 위엄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얼굴을 가린 천사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3). 사도 성 요한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어느 주일에 그는 성령께 사로잡혀 천상 전례에 관한 환시를 보는데, 날개가 여섯 달린 천상 생물이 하느님의 어좌 앞에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4,8).
그러므로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는 것은 우리도 이사야나 요한과 같이 천상 전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하늘의 천사들, 성인들이 드리는 찬양의 노래에 결합시켜, 우리도 그들처럼 왕 중의 왕이요 모든 거룩함의 원전이신 주님, 제대 위에 현존하게 되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시도다’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했던 군중의 환호를 따라 합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이 두 표현은 큰 축제일에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부르던 순례의 노래인 시편 118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이 거룩한 도성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시편에 나오는 말로 환영했듯이, 우리도 성당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분은 이제 곧 제대 위 성체와 성혈 안에 현존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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