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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당한 사람의 호소
시편 69: 1-15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이 사람이 이번 전도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로 도와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10일 한국을 떠나서 캐나다 토론토에서 11일 부터 13일 주일 밤까지 연합집회를 인도하고, 14일 월요일 아침 위니펙에 가서 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가지 집회를 인도하고, 목요일 아침에는 미국 뉴욕에 가서 뉴욕영락교회에서 그 날 저녁부터 지난주일 밤까지 전도집회를 가지고, 그날 밤 12시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열흘동안에 집회를 세 도시에서 가졌습니다. 밤낮이 바뀌기 때문에 육신은 조금 피곤하지마는 복음을 받아들여 심령이 소생하는 모습을 볼 때 모든 피곤을 잊게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9편은 다윗이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에 지은 시입니다. 그것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반란을 당해 피하여 다닌 때에 쓴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해서 많이 인용이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다윗이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길이 평탄하고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나침반만 앞에 놓고 앉으면 마음먹는 대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생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인생의 가는 길은 험하고, 광야같이 거칠고, 조용한 날보다 바람부는 날이 많고, 맑고 개인 날보다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고, 기쁜 날보다 슬픈 날이 더 많고, 건강한 날보다 병들어 고생하는 날이 더 많고, 안심하고 사는 날보다 불안하게 초조한 심정으로 사는 날이 더 많은 것이 세상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대로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괴로움이 어디는 없으리" 옳은 말씀입니다.
세상 어디에 가면 근심과 걱정, 괴로움과 슬픔, 한숨과 눈물이 없겠습니까? 이번 캐나다와 미국엘 가서 보고들은 대로 한국에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더니 거기는 거기대로 문제가 얼마나 많은 지요!
"사람의 사는 것이 가산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실감이 났습니다. 사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최소한 먹고 입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 더 심각한 문제가 더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저 한마디로 괴로운 세상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괴로움이 오늘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 그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제가 시편을 계속 강해하면서 깊이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어쩌면 인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나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평안한 것보다는 괴로움이 더 많은 세상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길이 이렇게 까지 고달프고 허무할 줄이야 누가 미리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살아 보니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가 지은 기도 시 가운데 시편 90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상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 : 5-10)
역경을 거슬러 살아 본 모세의 인생 경험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만 하더라도 일세의 혁명가요, 자기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기 위해서 일신상의 평안과 명예와 권세를 다 포기하고 나선 애국자요, 민족을 이끌고 나선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그 자신 개인의 생활을 위해서였다면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해서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민족을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는 중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까? 어떤 때는 너무 마음이 괴롭고 화가 치밀어서 지팡이로 한번 쳐도 될 반석을 두 번씩 쳐서 하나님의 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쓴 다윗을 보세요 어린 목동으로 베들레헴 초장에서 양을 치느라 얼마나 수고하고 고생했으며 또 위험한일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과 같이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고와 고생을 감당했고 위기를 모면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쳐 물리친 것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이 국민들 사이에 돌고 이 말이 사울 왕에게까지 들려 사울 왕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다윗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고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오늘 본문 첫 부분은 그의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홀려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시 69 : 1-4)
다윗이 사울 왕 때문에 당한 억울함과 고생도 컸지만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당한 육신의 어려움과 그 마음의 괴로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말대답 한번 들어도 섭섭해서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 아들에게 쫓겨다니게 된 신세가 된 다윗의 마음의 고통은 육신적인 어려움보다 몇 배나 더 컸으리라 짐작됩니다.
더구나 그가 괴로워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5, 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자기 때문에 주를 믿으려는 다른 사람까지 수치를 당하고 낙심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자기가 당하는 어려움은 개의치 아니하고 다른 사람이 손해를 입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떤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7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었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러분,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이 왜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야만 합니까?
의인의 고통문제는 역사를 통해서 해결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해답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이 없는 의, 괴로움을 겪지 않은 선은 완전한 의, 완전한 선이 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의미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구약 성경을 통해서 가장 어려운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욥을 손꼽게 될 것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마귀에게 자랑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왜 욥이 그런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그 대답은 그의 시련의 결과를 보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고통과 시련을 당하기 전에 욥의 의는 채 익지 않은 단지와 같았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유명하신 도예가 최근식(崔根埴)선생님께서 그가 만드신 도자기에다가 제가 좋아하는 성구를 좀 써달라고 도자기를 가져오셨는데 완성되기 직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선 900도의 불에 구워 낸 것인데 마지막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다고 합니다.
점점 더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갈 때 아름답고 완전한 도자기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양이나 무늬나 모든 것은 다 되어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완전한 그릇이 되려면 가마에 들어가서 좀더 뜨거운 불에 구워져야 하는 것처럼, 욥이 어려운 시련을 당할 때 그의 믿음이 더욱 커지고, 굳어지고, 완전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욥이 스스로 간증한 대로입니다. "내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내 눈으로 뵈옵나이다" 듣기만 하던 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졌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 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 : 1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였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어서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는 명문대가에서 나서, 최고 학문을 습득하고, 이스라엘 사회의 최고의 지위인 랍비의 계급에 있었으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좋다고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문, 문벌, 학식, 명예, 특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자랑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의 바울의 생이야말로 고생과 수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 번 감옥에 수감되고, 매를 수없이 맞고, 파선해 깊은 바다에서 생의 위협을 당했고, 여행할 땐 강의 위험, 도둑의 위험, 본국인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성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해상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자지 못하고 주리고 헐벗었습니다.
그는 그의 일생을 만물의 때와 같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끝까지 지켰으나 로마 옥중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디모데)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그의 소유라고는 다 떨어진 가죽 뚜껑의 책 한 권과 다 해진 외투 한 벌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가 육신적으로 말하면 얼마나 고생스러운 생을 살아 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위대한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세요. 고린도후서 6장 9절 이하에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가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없는 현실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징계를 받아 죽은 것 같지만 죽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시인은 시편 118편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밤낮 근심하는 것 같으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의 특권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2절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13장 7절에도 "스스로 부한 체하는 자라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지만 재물이 많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다윗이 겪은 어려움을 보세요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들어 왔나이다." 망망한 대해에 떠있는 작은 한 척의 배, 파도가 심해서 물결이 배속으로 부딪쳐서 들어옵니다. 이제 거의 잠기게 된 상태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저물자 무리들은 흩어 보내고 제자들과 쉬실 겸해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를 건너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같은 어부 출신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므로 누구보다도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나게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대로 보면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사납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결은 배에 넘쳐 들어왔습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갈릴리 바다는 때로 낮과 밤에 생기는 기후의 격차로 이따금 예기치 않게 폭풍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운이 지면의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사나운 바람을 일으키고 그것을 갈릴리 바다의 사나운 물결을 만들어 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어부 출신인 몇 사람은 이런 정도로 당황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노련한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라면 손바닥처럼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재주와 기술을 그리고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만은 경우가 달랐습니다. 일생을 통해 배우고 익혀왔던 경험과 익숙한 솜씨와 조력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지쳐 버렸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이제 안되겠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물결은 점점 심해지고 배가 물결에 휩싸일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타고 계신 배 이지만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힘이나 기술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강한 풍랑이 밀어닥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이것은 인간이 외칠 수 있는 긴박한 절규입니다. 이처럼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고백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노력과 의지를 포기한 인간 최후의 외침입니다. 말하자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부르짖는 외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도 있습니다.
우리 개인이나 가정, 교회 그리고 국가에서도 이따금 예기치 않게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이 밀어닥칩니다. 원인도 모르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무서운 물결이 우리를 통째로 삼킬 듯이 사납게 몰아닥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짧은 인생사는 동안 풍랑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 야곱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어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이 야곱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의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풍랑이든 내 힘이나 기술 그리고 경험 가지고 감당하기 어려울 때 우리 인생의 노를 주님께 맡기면 우리 주님은 인생의 노를 맡으시며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가게 하는 기쁨과 축복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을 바로 가지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키십니다. 우리가 생각지 않고, 잊어버리고, 발견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정말 우리가 우리 인생의 노를 예수님께 양도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분명한 목적지인 축복의 항구까지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시편 107편 28-3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이 진리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결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었습니까?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릅니다" 그가 얼마나 안타깝게 하나님을 사모했습니까?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형편을 자세히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당하고 계신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예수님을 깨워야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118편 5절에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옛 날 다윗의 형편처럼 한 마디로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캐나다나 미국에 있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외국에 가서 얼른 적응하기도 어려우려니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고,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하니까 속에 뭉친 것을 풀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짜증을 부리고 다투기를 잘합니다.
여러분, 내 억울한 사정, 괴로운 형편을 사람에게 풀려면 싸움밖에 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결혼한 사람의 절반 정도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29절 이하를 보세요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 드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 지어다"(시 69 : 29-32)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에게 구합시다. 도와주십니다. 힘 주십니다. 이기게 하십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 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 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 : 27-31)
시편 37편 4-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햇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사람의 일은 무엇이나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세상을 괴롭다고만 생각하면 자살밖에 할 것이 없지만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도리어 어려움이 있을 때 도전을 느끼고 일을 해결해 나가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내와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온실 안에서 자라난 화초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쓰러집니다. 그러나 비바람에 거슬리며 태양 빛을 쪼이며 자라난 꽃은 웬만해서는 쓰러지지 아니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 부딪친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비관하지 맙시다. 그러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이길 힘을 주십니다. 젊을 때 고생한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보화를 얻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견디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바울의 간증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와 같은 간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