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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 9-18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은 1장은 처음부터 은혜의 근원과 은혜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이신 말씀께서 우리를 포함한 만물을 지으심도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10절 말씀도 참 빛이신 말씀 하나님에 의해 온 세상이 지어졌다고 증언합니다.
“(참 빛이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요 1:10).
그런데 그분은 죄로 멸망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친히 오셨습니다. 이 역시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참 빛이신 말씀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이때 참 빛이신 그분은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역시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로써 지옥의 멸망으로 향하던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인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은혜 중 은혜입니다.
이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던” 우리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은혜의 실체이며 근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은혜의 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6-17절).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영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할 때 은혜와 진리의 속성이 영원한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다윗이 마침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그 못된 사울에게 자비를 베푼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복을 빈 것입니다. 이는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7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지어다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음이니라 하니라](삼하 2:4-7)
즉,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은 진리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성품의 본질 역시 진리와 은혜입니다. 우리의 본문은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예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시공간의 영역으로 들어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는 역사와 공간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째는 창조 사역이며, 둘째는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 사역입니다. 즉, 창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와 은혜를 볼 수 있고, 또한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와 은혜의 절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장래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리 그 자체가 되시고 영원한 은혜의 본질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님과 주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진리이며 은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요, 그 은혜의 실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을 따라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처럼 우리 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이며, 이에 넘쳐 흐르는 그 충만함으로 인하여 주를 믿는 성도에게도 끊임없이 흐르는 은혜인 것입니다.
한편, 사람이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때는 창조주의 영원한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을 무한히 느낄 때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될 때 사람에게는 무한한 감격과 평강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며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할 때, 그 때가 우리에게 가장 엄숙하고 행복하고 보람된 순간이며 이에 감사가 충만하게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평강과 감사와 거룩한 환희를 누리며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영접하여 그분과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은혜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기쁨을 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러므로 지옥의 멸망으로 향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은혜와 진리의 근원이며 본체는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원한 이 속성이 이 땅에 오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었으니 예수님 그분은 시공간에 나타난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의존하며 믿으면 그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은혜의 실체 및 근원과 연결되어 있으니 은혜가 차고 넘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65세 정도의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죽음을 코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축복합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
80세 정도의 베드로 역시 로마에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에 주의 백성에게 당부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90세 정도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마지막 계시를 받으며 언급한 말입니다. 이 언급은 성경 전체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이 세 분의 사도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인생을 마치면서 가장 분명하게 아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가장 중요하며 주의 은혜가 그들 인생의 전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디도서를 보면, 바울이 의식하는 은혜가 참으로 멋지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바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라고 묘사합니다. 그 후 바울은 그 은혜로 임한 열매들을 나열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들은 계속적으로 발생되는 열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첫째 열매는 “구원을 계속 주신다”는 뜻의 형용사 (소테이리오스)가 쓰이고 있고, 둘째는 “계속 양육한다”는 뜻의 현재 분사형 동사 (파이듀오우사)가 쓰였으며, 셋째는 “계속 바라보게 한다, 계속 기다리게 한다”는 뜻의 (프로스데코메노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갖고 있는 은혜의 개념입니다. 즉,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고, 구원 받은 그 사람을 계속 가르치고 양육하면서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 그리고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저주 가운데 예수님을 부인하였는데, 심판과 버림을 받기보다 영원한 사랑 및 사도직을 부여 받을 때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서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친히 겪으면서 주의 은혜를 알게 되었으니 그 은혜가 얼마나 그의 뼈 속 깊이 사무쳤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은혜를 맛보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사도 요한의 경우는 주의 은혜로 모든 하나님의 계시를 마무리 합니다. 이때 사도 요한은 주의 은혜는 마치 무지개와 같다는 사실을 암시하여 줍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주께서 맹세로 맺으신 언약에 대한 주의 완전한 신실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얼마든지 믿고 언제라도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2).
여기서 무지개는 주의 언약에 대한 주의 신실하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때 무지개는 여러 다양한 색채를 띠는데 이는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의 특성이 다양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여러 종류의 유혹을 받아 쓰러지는 것처럼, 우리가 받는 주의 은혜는 모든 다양한 종류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다양한 특성과 색채를 띱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골고루 주의 은혜의 특이한 색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여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주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연합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연합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는 주의 은혜를 풍성하게 가져오십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이 말씀은 성령과 함께 주의 한량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말할 때는 그 은혜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보면 은혜와 평강을 비는 인사에서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3-4).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살후 1:2, 딤후 1:2, 몬 1:3).
요한이서 1장 3절의 표현은 약간 다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의 은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고 말하면서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았다고 하니, 율법은 구약 시대에 주어진 것을 의미하고, 은혜와 진리는 영원한 본질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하니 메시아로 인한 영원한 새언약 시대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진리와 은혜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알려줍니다(롬 3:20; 갈 3:24). 즉, 율법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려는 것, 즉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성경이 알려주는 율법의 기능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의 기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략하게 제가 정리한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율법의 기능입니다.
첫째, 율법은 죄를 고발합니다. 가장 깊은, 숨겨진 죄라도 드러냅니다. 율법은 마치 흠 없는 깨끗한 양심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로 인해 더럽혀져 있어서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을 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율법을 볼 때, 율법은 마치 영혼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더러움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결과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곧 하나님의 저자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둘째, 율법은 죄로 더욱 죄를 짓게 하고 반항하게 만듭니다. 율법과 죄는 사이가 전혀 좋지 않습니다. 율법이 항상 먼저 죄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러면 죄는 더 큰 죄를 지으며 율법에게 반항합니다. 예를 들면 ‘죄라는 못된 놈’이 침을 튀기면서 말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율법이 말합니다. “침 튀기는 것은 실례니라.” 이때 죄라는 놈은 이 지적을 듣고 가래침을 뱉으면서 반항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주인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독재자인지 그 본색을 드러나게 합니다.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어지는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첫째, 율법은 율법을 어긴 자를 용서할 수 있거나 율법 아래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죄인을 나오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죄를 지은 사람을 감옥에 넣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죄인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둘째, 율법은 죄로부터, 또는 죄라는 주인으로부터 죄의 노예들을 풀어 주거나 해방 시킬 수 없습니다. 단지 죄를 폭군 주인으로 드러내고 그 악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폭군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을 통해 임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즉, 주의 은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써 죄라는 폭군과 싸워 이겨 우리를 그 암흑과 악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어 승리를 얻게 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것, 즉 죄인을 해방하고 그로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죄를 짓지 않도록, 율법을 지키도록, 율법을 완성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믿음을 통한 똑같은 은혜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갑니다. 이는 율법주의 주장처럼 내가 율법을 이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을 행사하는 나를 통해 율법을 이루어 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은혜 속에 있는 자가 아니며,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아무튼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자들은 율법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제는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 습니다.
이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3:32; 롬 8:1-4)
그러므로 정리하면 은혜는 죄의 종을 의의 종으로, 사탄의 노예를 그리스도의 친구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감사함으로 율법을 이루는 자로, 사형 선고를 받은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죄와 마귀와 세상에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는 자들마다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 은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살게 도와줍니다. 무엇보다 주의 은혜는 계명의 대 강령인 “목숨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합니다.
지금도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에게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성령을 통해 승리의 능력을 얻는 은혜를 입습니다. 더 나아가 은혜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우리 삶을 통해 체험하게 합니다. 은혜는 죄를 사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처럼 거룩하여지고 싶은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이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사는 풍성한 삶은 얼마나 안전하고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그러한 삶을 원하시면 예수님을 믿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분의 행동과 마음과 뜻이 알기 위해 주의 계시가 담긴 성경을 읽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은혜가 전달될 수 없기에 늘 기도하며 성령을 구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 속에서 한량없는 은혜를 누리며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충만한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울 수 밖에 없고 그 사람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일곱 번에 일흔 번 죄를 짓고 쓰러져도 일으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며, 또한 반드시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오는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여 죄에 승리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따라서 은혜입니다.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세 사람이 은혜를 언급하며 숨을 거둘 때, 그들의 영혼이 지극한 자족함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은혜로 마치는 바울의 심정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고백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7-8, 18)
그는 지금 깊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기쁨이 충만하고 평안이 넘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비록 사방으로 갇힌 독방 감옥에 갇혀 있어도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져 있으니 주의 은혜가 차고 넘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삶이 감옥에 갇힌 것과 같습니까? 그러한 분에게 필요한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주의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와 능력으로 감옥과 같은 삶에서도 어느새 나오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서신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서신에 그의 마지막 고백인 주의 은혜를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후서를 연구하여 알지만 베드로후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남긴 베드로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15)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그가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한 후에 주께서 다시 사도직에 회복시키시며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8-19)
베드로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겠다고 다짐한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무한한 은혜를 빚진 주께 십자가에서 거꾸로 죽는 것으로 사랑을 표시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연합하기 위해 주의 죽으심의 방법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마음은 주를 향한 무한한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이제 저주와 맹세로 주를 부인함이 아니라 그저 주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며 십자가에서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똑바로 세워져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게 해 달라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마음이 시린 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분과의 일생의 추억을 돌아볼 때 주를 위해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소원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갖게 된 이유는 오직 주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은혜로 회복되었고, 그 은혜로 모든 죄를 이기었으며, 그 은혜로 영광스러운 자리에 우뚝 서서 모든 신자들을 향해 참된 믿음의 길을 당당하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은혜를 영원토록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은혜는 우리의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며, 우리를 어둠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끄집어 내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우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다름 아닌 주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주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알게 됩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사도 요한이 은혜를 노래하고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본다면 그들은 가장 불편하고 가장 궁핍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외로운 순간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은혜 때문에 두려움과 외로움과 궁핍과 불편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죽음마저 그들에게는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문이니 전혀 두렵지 않고 도리어 반가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은혜의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샘에서 생수의 강이 무한하게 흘러 넘칩니다. 성경은 주 예수의 은혜로 성경을 마칩니다. 이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모든 신자들의 끝은 은혜로 마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명확하게 은혜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은혜는 이 땅에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시공간 안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치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성경은 자명하게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다고 선포합니다. 은혜는 아무데서나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및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은혜가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을 수 없고, 죄 사함이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일반 자연인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 보혈로 인한 은혜가 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 오직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는 영원한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 심판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자신의 죄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늘 아버지와 어린 양 예수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원한 은혜의 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모두 다같이 크게 소리쳐 봅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평생, 그리고 영원히 임하기를 거룩하시고 무한한 사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