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북정(戀北亭)에서
2010년 제주도에 내려와서 힘들 때마다 종종 갔던 곳이 연북정(戀北亭)이다. 이곳은 조천 바닷가에 세워진 정자로 선조 32년(1599)에 건물을 보수하면서 이름을 ‘연북정’으로 고쳤다. 여기서 연북(戀北)이란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주에서의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나는 그 정자에 앉아 비슷한 처지를 슬퍼하며 북쪽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나에게 제주도는 유배지였다. 천안에서 부목사로의 마지막 목회를 마치고 유배 가듯이 제주도로 내려왔다. 목회를 그만 두겠다는 나를 억지로 그 분이 끌고오신 것이다. 평생을 육지에서 그것도 서울에서만 자란 나에게 제주도는 너무 낮설고 힘든 곳이었다. 특히 섬이라는 제한된 환경, 육지는 아무리 멀어도 차를 타고 가면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지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단절된 삶, 이질적인 섬 문화, 나는 주류사회에서 밀려 이렇게 변두리 제주도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3년 꿈에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교회 개척을 하였다. 그것도 예배당도 없는 가정교회로 시작했다. 그때는 이렇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어느 정도 계산이 되었지만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할 순 없었다. 건물이 없고, 돈이 없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소위 육지에서 왔다는 교인들, 직분이 있고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이 찾아와 허락하지도 않은 헤게모니(hegemoney)를 주장하며 공동체를 휘저어 놓고 떠나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소속 지방회에서도 나는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번듯한 예배당 건물도 없고, 자랑할만한 교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쪽 업계에서는 둘 다 가지고 있으면 ‘장땡’이고, 아니면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목에 힘을 줄 수 있다. 나는 손에 내놓을만한 패가 없었기에 늘 아웃사이더(outsider)였다. 젠장, 육지에서 밀려 제주도로 내려왔는데, 이곳 제주도에서도 나는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으면 ‘원의 질서’를 만들 것 같지만, 더 치열한 ‘세모의 질서’가 통용되는 곳이었다.
바벨론 강가에서
변두리 인생은 이렇게 서러움의 연속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멋있게 ‘노마드’(nomad)라고 부르지만, 말만 멋있지 실제 삶은 불편과 불평등, 어려움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때 쯤 예언서와 바벨론 포로기를 묵상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새롭게 공부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오래 전부터 유명한 주제라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며, 90년대 초반부터 섬기던 제자훈련 모임에서 산상수훈을 가르쳤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읽는 이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달라지면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그때 새롭게 경험하게 되었다.
하루 아침에 나라가 패망하고, 거룩한 성전이 더러운 이방인의 의해서 짓밟히고, 자신들은 포로가 되어 조상들이 세운 지계석(boundary stone)이 있는 땅에서 벗어나 너무나 생소한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야 했던 유대인들의 충격과 고통과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매일 율법에 의해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을 구별하고, 만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며 정결과 부정결의 삶을 살았던 그들이, 더러움과 부정함으로 가득찬 이방 땅에서 나라 없는 약자와 타자(他者)로, 하나님의 임재와 자신들의 부정결을 해결할 수 있는 성전의 부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었을까?
그때 예언자들이 외쳤던 것이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 나라(왕국)의 회복이었다. 그 하나님 나라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질서의 전복(顚覆)’이다. 지금 유대인들이 경험하는 있는 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와 체제가 구원자 메시아를 통해서 그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그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내세는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 아니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이 땅에 새롭게 시작될 하나님 나라(왕국)을 의미했다.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
구약 예언자들의 선포가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한 번 오시는 것처럼 예언 되었지만, 신약에서는 두 번 오신다. 우리는 그것을 초림과 재림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 예언자들의 시각에선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두 가지 사건이 한 사건인 것처럼 혼재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재는 예수님은 성육신으로 인간의 역사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되고 성취되었다.
두 번 오시는 메시아, 그 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그 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부른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씨 뿌리는 비유로 표현하자면 농부에 의해서 씨가 밭에 뿌려진 것이다. 하지만 밭의 상태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임한다. 환영을 받기도 하지만 배척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크리스텐덤(Christendom)적인 사고에 갇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까지)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성공과 번영, 영광, 능력이라는 단어들을 무대 뒤에 숨겨 놓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산상수훈(특히 팔복)에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두 단어로 정리하고 싶다. 하나는 ‘전복’(upside down)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변두리’(outsider)이다.
팔복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전복과 변두리 인생
시작하며
0. 하나님 나라란
1. 무리가 아니라 제자 (5:1~2)
팔복 전반부 : 하나님과의 관계
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5:3)
개념 정리 : 가난이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3.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5:4)
개념 정리 : 슬픔이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4.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5:5)
개념 정리 : 온유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5:6)
개념 정리 : 의란? 주리고 목마름이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팔복 후반부 : 세상과의 관계
6.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5:7)
개념 정리 : 자비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7.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5:8)
개념 정리 : 마음이란? 깨끗함이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8.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5:9)
개념 정리 : 평화란?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9.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5:10~12)
개념 정리 : 의란? 의를 위하여 박해을 받는다는 것은? / 왜 복이 있는가? / 어떤 복이 있는가?
팔복으로 살아가는 삶
10. 소금과 빛 (5:13~16)
소금의 짠 맛 / 맛을 잃은 소금
세상의 빛 / 착한 행실
마치며
11. 하나님 나라는 ‘변두리의 삶’이다.
12. 하나님 나라는 ‘전복된 삶’(upside down)이다.
첫댓글 올~~
책 집필이 시작되었군요~
기대됩니다.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