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로마의 휴일 ]
이보다 상큼하고, 멋스럽고, 로맨틱한 영화가 또 있을까요? 로마와 공주 그리고 오드리 헵번. 이 세 가지 요소를 멋지게 조합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진정한 명장입니다.(사진,스페인 계단에서 헵번과 펙)
1946년도 <우리 생애 최고의 해>로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다진 윌리엄 와일러는 1953년 엉뚱하게도 로마에서 올 로케를 기획합니다. 로마의 멋진 풍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뭔가 어색한 이 궁합은 한 영화감독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170cm의 키(당시 여배우로선 큰 키)에 깡마른 체격, 1950년대는 마를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 등 글래머가 여성미를 주도하던 시기였습니다. 기껏해야 단역에 몇 편 출연한 것이 고작이었던 벨기에 출신의 이 촌뜨기 아가씨를 주연으로 발탁한 와일러의 안목이 놀랍습니다.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 분)가 신문기자임을 알게 되는 앤 공주(오드리 헵번 분), 이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는 만장일치로 오드리 헵번을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선택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단발머리와 그녀가 입었던 투피스를 흉내 내는 ‘헵번 룩’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도대체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어느 정도로 매력을 내뿜었을까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정영일 영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오드리 헵번에 빠지지 않는 남자는 사람이 아니다.”
우아함과 고귀함 그리고 발랄함과 천진스러움….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 한 편에서 여자배우로서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조 브래들리가 신문기자임을 알게 되는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 앤 공주의 표정은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처음엔 반가움 곧 이어진 당혹감 그리고 안타까움에 가득 찬 큰 눈망울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앤 공주가 조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뒤돌아 간 뒤 적막한 기자회견장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조의 무거운 발걸음도 한없는 여운을 남깁니다. 아카데미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각본상과 의상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 뒷 이야기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렇듯이 여러 배우들이 주인공 물망에 올랐습니다. 원래 프랭크 캐프라가 감독을, 남자 주인공은 케리 그랜트, 여주인공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할 예정이었으나, 캐프라의 제작사가 재정난으로 판권을 파라마운트에 팔았고, 감독도 윌리엄 와일러로 교체되었습니다.(사진,진실의 입에서 펙과 오드리)
카프라 대신 연출을 맡게 된 와일러는 제작비가 적어서, 영화전체를 흑백필름으로 하루 동안 두 남녀가 로마 시내를 구경하는 스토리로 찍었습니다.
그랜트는 오드리 헵번이 여주인공을 맡게 되자 "그녀와 공연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다"고 사양했지만, 10년 후 <샤레이드>에서 그녀와 공연한 후 "나와 공연한 여배우들 중 최고"라고 극찬했습니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했다고 합니다. 상남자 펙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예상대로,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 성녀(聖女), 오드리 헵번 ]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 중에서도 오드리 헵번은 절대 타락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연약한 성인(聖人)이며, 다치기 쉬워 보이나 또한 섬세한 우아함까지 지녔습니다.
여려 보이지만 결코 압력에 짓눌려서 무너지는 법이 없었고 연기 생활에서 은퇴하여 유니세프의 어린이를 위한 대사가 되었을 때(그때는 아직 유명인들의 자선 활동이 유행하기 전입니다) 얼마나 확고한 몰두와 헌신으로 그 일을 해내었던지 완고하고 무감각한 정치인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헵번은 진정한 세계주의자의 원형이었습니다. 브뤼셀에서 네덜란드인과 영국의 아일랜드인 부부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자랐고 2차 대전 동안 나치 점령 하에서 지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너무나 심한 고난을 목격했기 때문에 영화 <안네의 일기>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후에 그녀가 거식증으로 고생한 것도 전쟁 동안 겪은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주장도 종종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녀는 전쟁 동안 튤립 구근을 먹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헵번은 암스테르담에서 모델로 활동하다가 파리와 런던에서 단역들을 맡으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다가 1953년에 로마에서 로케이션 촬영으로 만든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에 공주 역으로 캐스팅되었습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그녀는 기자 회견 장면에서 네덜란드어로 몇 마디를 말하면서 그녀의 뿌리가 유럽에 있음을 멋지게 드러냈습니다. 헵번은 다섯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이 재능은 후에 그녀의 인도적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로마의 휴일>의 성공은 헵번을 순식간에 세계무대로 도약하게 했고 겨우 스물네 살의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습니다. 나날이 커져가는 그녀의 명성은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았고 그들은 그녀를 현대적인 젊은 여성의 역할 모델로 삼았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영국의 언론들은 서로 헵번이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려 애썼지만, 이제 그녀가 전 세계에 속한 사람이란 것은 분명해져 있었습니다.이후 헵번의 영화 경력은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953년부터 1967년 사이에 겨우 15가지의 주요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사진, 사브리나에서 험프리 보카드, 윌리엄 홀덴과)
헵번이 영화에서 연기한 역할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교육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휴일> 외에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인 <사브리나>, <파계>,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리고 <마이 페어 레이디>를 보면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의 매력이 언제나 교육과 노력과 적절한 예의범절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헵번이 모든 교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라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1960년대 후반부터 헵번은 점점 연기에서 멀어져 국제적인 외교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니세프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두 번 결혼했습니다. 배우 멜 페러와 닥터 안드레아 도티가 그 상대였고 그들에게서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습니다.
* 은막의 스타를 뛰어 넘은 진정한 스타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그녀는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쌓은 명성과 인기를 아낌없이 구호활동을 위한 기금 모집에 이용했지만, 구호 현장에서는 절대 스타로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인간 오드리 헵번으로서 어린이들을 대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어린아이들을 보듬어 안았으며 아픈 아이의 눈썹위로 기어가는 파리를 쫓아냈습니다. 전쟁지역과 전염병 지역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했으며 아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단지 왕년의 스타로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진심 어린 구호활동에 감동했고 새로운 기부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사진,유니세프 친선대사 시절)
그것은 작지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그녀 이후 많은 명사들이 설사 그들이 진심이든 혹은 가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부와 자선 활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제대로 되돌려 줄줄 아는 영원한 스타였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