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19
1월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연중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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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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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avxH6TyQnQ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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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이 또한 지나갑니다!>
다윗 왕이 어느 날 궁중의 세공인을 불러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나를 위해 있는 멋진 반지 하나를 만들라. 그 반지에는 내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도록 하라.”
다윗 왕의 부탁에 세공인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반지에 새길 마땅한 글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공인은 나이가 어렸지만 지혜로운 솔로몬 왕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자는 이런 글귀가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갖은 유형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건강과 질병,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사실 시간과 더불어 ‘이 또한 지나갑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왕 중의 왕, 성왕(聖王)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 그가 남긴 족적은 정말이지 찬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여 강력한 왕조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수도로 세웠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왕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출중한 외모와 탁월한 언변, 심오한 지혜와 다재다능함으로, 그는 즉위 내내 전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과 축복도 아낌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왕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큰 유혹 앞에 여지없이 넘어지고 마는 우리와 비슷한 한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저지른 죄는 되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큰 죄였습니다. 충신 중의 충신이었던 장군 우리야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덮기 위해 갖은 계략을 다 세우고, 끝끝내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합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던 다윗이 오늘 죄의 구렁텅이 속, 다시 말해서 지옥을 살고 있습니다. 어제 만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성왕(聖王)이었던 그였는데, 오늘은 나탄 예언자로부터 고발당하고 지탄받는 부끄러운 죄인으로 서 있습니다.
순식간에 심연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진 다윗왕의 부끄러운 경험은 오늘 우리들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지난 삶을 돌아보면 다윗왕과 도진개진의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태도가 지속적인 겸손, 한결같은 겸손의 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 죄를 짓고 난 다윗왕, 나탄 예언자로부터 신랄한 고발을 당하고 난 다윗왕의 모습이 또한 놀랍습니다. 고발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린 헤로데 왕처럼, 다윗왕도 고발자 나탄의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사무엘기 하권 12장 13절)
그러자 나탄 예언자도 즉시 다윗왕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사무엘기 하권 12장 13절)
다윗왕은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 앞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을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왕처럼 용서받고, 다시 한번 하느님 앞에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잔머리가 아니라, 솔직하고 즉각적인 회개! 바로 그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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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44usXG1n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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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에덴이 되려면 믿음의 나무 한 그루부터 심기 시작하는 수밖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저절로 자라난다는 뜻으로 씨가 땅에 떨어져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와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뜻이 그 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땅에 달려있습니다. 땅이 그 뜻을 받아들인다면 저절로 열매를 맺어 마치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뜻이란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이렇게 그 뜻을 따르기만 하면 분명 좋은 사람들과 사귐이 일어나 행복한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는데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왜 이것을 믿지 않고 서로 미워하고 불목할까요? 왜 단 한 번이라도 이 계명을 끝까지 믿어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그 사람들 안에 ‘그걸 믿어서 뭐가 좋은데?’라는 의문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장 경쟁에서 이기고 원한을 갚고 보복하는 것이 즐겁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맞는다면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땅은 나무가 하나도 없는 사막처럼 됩니다. 새들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지옥입니다.
‘악마를 보았다’(2001)라는 영화는 매우 잔인해서 보시라고 추천해 드릴 수는 없는 요즘 같으면 절대 안 볼 그런 영화입니다. 줄거리는 자신의 약혼녀가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수현이 살인자 장경철을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복수할까만을 생각하며 둘이 대결하는 내용입니다. 수현의 이 복수심 때문에 애꿎은 많은 사람이 희생당합니다. 결국에 가장 잔혹하게 복수는 하지만 장경철은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였습니다. 고통스럽게 보복을 하려 했는데 하나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복수를 한 수현은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뭔지 모를 공허감으로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복수해서 누군가를 죽이면 속이 후련할까요? 나도 살인자가 되는 것일 뿐 나의 고통이 그 사람에게 복수하지 못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고통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악마와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분명 그런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가족을 잃은 고정원 루치아노 씨입니다. 이분은 유영철에게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잃었지만 그를 용서했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유영철의 피해자 가족들은 들고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용서하지 못한 그들은 대부분 자살을 하거나, 알코올 중독, 혹은 우울증 등으로 가정이 파탄 났습니다.
사람들은 왜 믿느냐고 말합니다. 왜 믿는지에 대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아서 행복한 사람들, 곧 용서하고 복수해서 행복한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저의 믿음은 흔들릴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나무를 심어서 그 사막이 정원이 되게 하는 행복을 누리는 이들은 많습니다.
“모래밖에 없던 사막에, 스무 살 처녀가 가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는 이제 숲이 생겼습니다.” 동화에나 나올 듯한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입니다. 황사의 진원지라고 알려진 중국 네이멍구의 마오우쑤 사막. 그곳에서 20년 넘게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을 일군 여인 인위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푸른 초원이었던 마오우쑤는 무차별 벌목과 양 떼로 인해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거기다 기온 상승까지 겹쳐 사막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때때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숨이 막혀 사람이 살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이곳에서 1985년 당시 20대 청년 바이완샹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와 친척들이 사막에 지쳐 떠나갈 때도 겁 많던 그는 외지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이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갓 스무살이던 인위쩐은 그런 바이완샹에게 시집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우연히 알게 된 바이완샹의 부모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노라”라고 약속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사막에 온 지 한참이 지나서였습니다. 사방에는 모래뿐이고 길조차 없는 사막에서 몇 날 며칠을 통곡으로 보낸 인위쩐은 그를 지켜보던 바이완샹이 따라 우는 모습을 보고 점차 원망이 연민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희망의 말을 먼저 건넨 쪽은 인위쩐이었습니다. “여기에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꽃이나 나무가 자라면 여기도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을까요?”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내가 빠져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이곳을 살 만한 땅으로 만들자. 모래를 퍼먹고 살 수는 없잖아?’ 그때부터 인위쩐의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새벽 3시에 집을 나서 70리 길을 걸어가 도착한 묘목상에서 종일 일한 대가로 얻은 백양나무 묘목 30그루를 삽니다. 그 묘목을 업고 다시 돌아와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에 준 물이 단 한 방울이라도 옆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모래를 쓸어 올려 둥그렇게 둑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래 위에서 버티던 나무들은 며칠 뒤 모래바람에 전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위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임업국에 약간의 임차료를 내고 얻은 넓은 사막 땅에 그녀는 다시 600그루를 심었고 그중 200그루가 살아났습니다. 두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든 4㎞의 울타리와 7㎞의 용수로가 나무를 살린 것입니다. 자신감을 얻은 인위쩐은 이후 죽기 살기로 나무 심기에 매달렸습니다. 과도한 작업량으로 인해 첫 아이를 조산하고, 둘째 아이를 유산하기까지 했지만 인위쩐은 “10년 안에 눈앞의 모든 모래 언덕을 숲으로 만들겠다”라는 집념 하나로 나무 심기를 계속했습니다.
실패를 반복하기를 7여 년. 마침내 인위쩐은 사막에 나무를 심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람의 방향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사막을 살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조림 성공률도 80~90%까지 높아졌습니다. 나무가 살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지문이 닳도록 풀씨를 털어내 자루에 담아 모아 모래에 풀씨를 흩뿌리기도 했습니다. 풀씨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날 확률은 만분의 일, 10만분의 일에 가까웠지만, 군데군데서 가는 싹들이 돋아났습니다.
살림도 조금씩 불어났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던 인위쩐은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다. 채소가 살면 사람도 산다”라는 생활의 철학으로 밭을 일구고 채소도 가꿨으며 닭, 돼지, 양도 한 마리씩 불려갔습니다. 버려졌던 땅에 숲이 생기고, 길이 뚫리고, 우물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본 인위쩐과 바이완샹의 친척들도 하나둘 그녀를 도우러 사막으로 들어왔습니다. 풀조차 살기 힘들던 징베이탕에서 80여 명이 일하여 2012년 한 해 옥수수를 재배한 면적이 4000평이었으며 같은 해 참마 5000㎏, 메밀 1500㎏, 녹두 3000㎏을 거둬들였습니다.
20년 전 사막에 남겨진 뒤 1주일간 먹지도 않고 펑펑 울었던 여자. 그리고 정부의 지원금 한 푼 없이 사막 1400만 평을 오아시스로 만든 질기고도 강한 여자 인위쩐. 그리고 그는 오늘도 풀씨자루를 들고 아직도 모래로 덮여 있는 사막을 찾아가 풀씨를 뿌린다. 이제 사막은 그에게 황금빛 미래를 약속하는 기회의 땅이다.[출처: ‘사막을 숲으로 바꾼 질긴 여자’, 강미현 기자, 프레시안, 2006.10.20]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진리를 안 믿어도 행복한 사람 한 사람만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마치 사막에 나무를 심지 않아도 정원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막이 정원이 되려면 나무를 한 그루 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사막이고 씨앗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정원이 되어 많은 이들이 쉴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용서와 사랑의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심읍시다. 그러면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상처를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사막에서 정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고, 많은 이들이 내 안에 살아서 그저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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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6-34 :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절)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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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여기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은 그 과정이나 방법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모른다.’ 라는 말을 “모르지만 믿어야 한다.”로,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모르니까 믿어야 한다.”로, 즉 “인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교만은, 또는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있다는 교만은 ‘어리석음’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나옵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5-9) 어떤 일을 하고 나서, 그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거나 자랑하면서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결과도 하느님께서 만들어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도와드리는 일꾼일 뿐입니다.
그런데 모른다는 것 때문에 자연숭배나 우상숭배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20-22) 같은 말이 지혜서에도 나옵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1.3.9) 자연숭배와 우상숭배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등지는 일, 즉 ‘죄’입니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라는 말씀은,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일꾼으로 부리기만 하고 모든 것을 가져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일만 시키고 수확물을 모두 차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들어가서 살 집을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나라이고, 아버지의 집은 우리 집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작고 보잘것없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시작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위대함’은 씨앗 단계에 있을 때나, 나중에 큰 나무로 자란 단계에 있을 때나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시작 단계를 겨자씨가 아니라 다른 씨로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또는 씨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하느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아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창세 15,6) 하느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실 겨자씨가 자라서 겨자나무가 되고, 포도씨가 자라서 포도나무가 되는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고,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씨가 하느님 나라로 성장하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 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바라는 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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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 먹는 밥인 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먹어왔고, 지금도 먹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쌀이 귀했습니다. 잡곡밥을 먹어야 했고, 분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매년 쌀이 남아도는 시대입니다. 매년 40만 톤의 쌀이 남고, 그렇게 남는 쌀을 보관하는 비용이 수천억이라고 합니다. 맛있는 밥은 가마솥에서 지은 밥이라고 합니다. 가마솥의 밥이 맛있는 이유는 밥을 짓는 과정에 압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압력으로 생긴 고온의 수증기는 쌀의 내부부터 익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력밥솥의 밥이 맛있다고 합니다. 90년대 초까지는 일본의 압력밥솥이 인기 있었지만 92년에 국내에서 출시된 압력밥솥이 일본산 압력밥솥을 몰아내고, 우리의 가정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밥맛의 압력을 알아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압력밥솥의 기압은 3기압인데, 한국에서 출시된 압력밥솥의 기압은 1.6기압이라고 합니다. 이 기압의 차이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매일 마시는 커피의 브랜드를 알고 마시면 커피의 풍미를 느낄 수 있듯이 매일 먹는 밥인 쌀에 대해서조 좋은 쌀을 고르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외형이 좋은 쌀을 고르면 된다고 합니다. 동그랗고, 균형이 잘 잡힌 쌀은 씨앗 자체가 좋다고 합니다. 둘째는 생산년도와 도정일자를 보라고 합니다. 최근에 도정된 쌀, 작년에 생산된 쌀을 고르면 된다고 합니다. 셋째는 혼합이라는 표시보다는 단일품종을 고르면 된다고 합니다. 혼합으로 표시된 쌀은 종류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단일품종을 고르면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 어떤 품종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농산물 개방을 대비해서 우수한 품종의 쌀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당뇨에 좋은 쌀, 빈혈에 좋은 쌀, 다이어트에 좋은 쌀, 임산부에 좋은 쌀도 있다고 합니다. 우수한 품종의 좋은 쌀을 고를 수 있다면 맛있는 밥, 건강에 좋은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를 때는 그냥 쌀이었지만 알면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맛있는 밥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는 중세의 신학을 집대성한 학자입니다. 성인이 저술한 신학대전은 교회의 보물입니다. 성인의 성체 찬미가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기도문입니다. 성인에게 감사드리며 오늘은 성체찬미가를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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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오늘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합니다. 씨는 사람이 뿌리지만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서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완성됩니다. 그렇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작고 하찮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놀랍고 풍요로운 결과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씀은 온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해 본 사람은 작은 씨앗 안에 깃든 가능성과 생명의 신비를 잘 압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금은 부족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씨앗인 우리를 싹트게 하시고, 가지를 뻗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뿌리신 소중한 씨앗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가진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큰 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소중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존속할 수 있었으며 …… 무엇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지혜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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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유난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저에게 있어서 세명의 조카들은 저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욱 저의 조카들에게 부채감이 있는데, 오랜시간 해외에서 유학기간을 거친 덕에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순간을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조카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는데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지만 자세한 면모를 생각해 보면 아이의 교육과 정신적 성장에 있어서 그러할 뿐 육체적인 성장에 있어서는 많은 것을 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때마다 밥을 차려주고 뛰어노는 것은 아이의 육체적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크고 육체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어떠한 면에서 보면 온전히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찌 되는지 모른다”라는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합니다.
사실 씨앗을 심고 농사의 결실을 거두기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적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씨를 뿌리고 나서 물을 주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역할일 뿐 씨앗이 자라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씨앗이 싹트고 그 싹이 자라서 줄기가 나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원초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씨앗이 열매 맺기까지, 한 생명을 성장시켜 결실에 이르게까지 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일에 개입하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식물에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 주는 것처럼 기본적인 노력은 인간에게 맡겨져 있지만 사실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의 은총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에 인간이 개입하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헛된 욕망이 될 뿐이고 오히려 원망만 갖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의 은총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스스로가 좋은 땅, 좋은 양분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 자신 안에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가꾸되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머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겨자씨는 실제로 보면, 우리 손톱의 3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땅에서 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 크고 높게 자라게 됩니다. 이 모습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미소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많은 것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이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개입하고 알고자 하면 그것은 온전히 인간의 욕심이 되고 조바심만 생길 뿐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기대하되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는 창조주의 역할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몸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하루하루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어느덧 제 모습을 갖춰나가는 아이들을 보듯 나에게 잘 맞춰져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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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르코 복음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그분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마르코 복음은 재촉합니다. 마르코 복음 막바지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메시아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또한 멋스러워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당시 유다 사회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지요.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실패 그 자체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저항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대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오늘을 애쓰며 살아갑니다. 신앙이 목적을 가지는 순간, 오늘, 지금의 시간에 대하여 결핍 의식을 지닐 때가 가끔 있습니다. ‘아직 멀었어. 좀 더 노력해야 돼.’라고 되뇌이며 내일의 희망찬 하느님 나라를 꿈꿉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맞갖게 사는 것은 오늘 ‘이렇게 해야 돼!’라는 당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물어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당위’가 어떤 이를 겁박하고 억압하는 일은 없는지, 오늘 나에게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짐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 곁에, 이 자리에서 커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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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곧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과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잘 가꾸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인 까닭입니다. 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말씀이신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에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맺히고, 하는 것은 말씀의 권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이 씨앗을 정성껏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외로운 이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저희를 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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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형제들 앞에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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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에 비길까?"(마르4,26.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두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비록 미미하고 작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 마지막 때에는 엄청난 결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씨앗이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고 했지만, 뿌려진 씨앗은 결코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햇빛과 비가 있어야 하고, 적당한 영양분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조용한 가운데에서 성장하고, 많은 것들이 함께 작용해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선과 악, 그리고 진실과 거짓의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작용해서 성숙에로 나아갑니다.
오늘 독서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 세바'를 탐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야까지 죽이는 모습을 전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범한 이 큰 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나탄을 보내어 그의 잘못을 꾸짖게 하고, 다윗은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51편'이 전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회개와 용서를 받아들이시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작은 것에 민감하고, 작은 것에 충실 합시다! 다양성과 다름을 하느님의 선으로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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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뿌리는 사람이 거두지요>
마르코 4,26-34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뿌리는 사람이 거두지요>
땅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
낟알을 거둔다지요
땅이 씨를
곱게 품어
어떻게 낟알을
영글게 할까
굳이 몰라도
탐스런 낟알을
거두려거든
정성스럽게
씨를 뿌려야지요
어찌
씨만 그러겠어요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생명도
정의도
평화도
베풂도
품음도
함께도
모두
마찬가지지요
거두려거든
뿌려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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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걀이 되어 바위에 부딪힙시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우리는 오늘도 이 땅의 하느님나라를 일구기 위한 작지만 힘찬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우리의 가슴 벅찬 여정에 크고 작은 걸림돌들이 있겠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고귀한 사명을 충실히 이루어가리라 다짐하면서 새 아침을 열면 좋겠습니다.
나눔과 섬김 가득한 하느님나라와 여전히 거리가 먼, 탐욕과 억압 가득한 거칠고 험한 세상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달걀로 바위치기’라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달걀로 바위치기’라는 말은 이룰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헛된 노력을 일컫는 조롱 섞인 표현입니다. 얼핏 보면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연약한 껍질의 달걀이 굳센 바위에 부딪히면 달걀은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달걀 하나가 부딪힙니다. 바위는 그대로입니다. 또 하나가 부딪힙니다. 여전히 바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천 개의 달걀이 부딪힌다면, 아니 만 개, 백만 개, 수많은 달걀이 바위에 부딪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서히 바위에는 미세한 흠집이 생기고, 마침내 최후의 달걀이 미약한 힘을 보태는 순간 바위는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영웅적인 첫 번째 달걀과 바위를 부순 마지막 달걀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되지 않는 중간의 무수한 달걀들이 없이 첫 번째 달걀과 마지막 달걀만으로 바위를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벗님들, 여러분이 달걀이고, 여러분 앞에 깨뜨려야만 할 바위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달걀로 바위치기’니까 포기하고 주저앉겠습니까? 아니면 기꺼이 몸을 던져 바위에 부딪히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 깨져야할 달걀이라면 어느 달걀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마 바위가 깨지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최후의 달걀이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영원히 기억될 첫 번째 달걀이 되고 싶으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중간의 무수한 달걀 중의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깨뜨려야만 할 바위 앞에서 주저하게 되고, 다른 달걀들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일구려는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나라를 거부하는 굳센 바위 같은 세상과 맞선 달걀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윤 창출을 위해서라면 노동하는 존엄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재물숭배의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만을 참 하느님으로 경배하는 하느님나라를 일구는 것은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습니다.
한 줌에 지나지 않는 정치권력을 놓지 않으려 힘없는 이를 억압하고 반대자를 배척하는 권력숭배의 세상에서,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하느님나라를 보듬는 것은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하느님과 권력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그만 두어야합니다. 지금은 거친 세상에 짓눌려 미미하지만 언젠가 온 세상을 품을 하느님나라를 보듬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시작된 하느님나라,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 그러기에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세상의 거센 저항과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귀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하느님나라의 싹을 틔우고 줄기와 이삭을 내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 기꺼이 부서지는 달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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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정년 퇴임을 한 어떤 형제님의 말씀입니다. 직장생활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온종일 집에 있다 보니 아내의 잔소리에 너무나 힘들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아내와의 행복한 일상을 꿈꿨는데, 아내는 자신을 짐짝 취급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십니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직장에 있다가 집에 오는 남편을 맞이했던 아내였지요. 그렇게 거의 30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종일 남편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남편은 전과 다른 모습만 바라보면서 아내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형제님께서 얼마 뒤에 저를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부인에게 잔소리를 많이 듣는 남편일수록 당뇨 발병 위험이 낮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부인의 잔소리가 남편을 돌보는 역할도 한데요. 아내의 잔소리를 저의 건강을 위한 영양제로 생각하니까 이제는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상황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생각합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말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아닌 부정적인 마음을 채우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런데 좋은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갑작스럽게 바꿀 수가 있을까요? 이는 단 한 번의 노력이 아닌, 계속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는 씨의 비유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농부가 밤에는 자고 낮이 되면 일어나고 하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씨앗은 싹이 트고 자랍니다. 농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땅은 저 혼자서 줄기를 자라게 하고 이삭을 패게 하며 낟알을 맺게 합니다. 결국 곡식이 익으면 농부는 바로 낫을 댑니다. 추수할 것이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려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곡식이 무르익었을 때 추수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씨를 뿌려 놓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농부가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 실제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부분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물을 막 퍼주고 햇볕만 쬔다고 열매가 빨리 열리지 않습니다. 법석을 떨면서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열매가 맺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성령의 움직임에 인간의 노력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노력보다 계속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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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길지만 짧고, 가장 빠르지만 느리고, 나뉘어 있지만 가장 크며, 가장 무시당하지만 가장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작은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모든 위대한 것들이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긴 것은 시간입니다.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죠. 가장 짧은 것도 시간입니다. 많은 계획이 시간이 부족해서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가장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즐거운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갈 것입니다.
시간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고, 또 끝없이 나눠질 수 있습니다. 현재에 있으면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간 것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후세가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히고 위대한 업적은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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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 훗날을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아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은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순응하고 씨앗으로서의 그 존재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른 것이 됩니다. 아주 커다란 다른 것이 됩니다. 변화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과정 중에 있으며 희망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일 이루어지고 성령께 대한 순응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그 끝은 생각보다 크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으로“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거짓은 100년이 지나도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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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오늘 지금 여기, 순리順理에 따른 삶-
“삶은 선택이다.”, 요즘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물론 좋은 선택을 위해서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하고 항구한 열망이자 꿈이자 비전은, 희망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오늘의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둘 다 하느님의 나라 비유입니다.
언젠가 죽어서 맛보고 체험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선택하여 맛보고 체험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선택입니다. 얼마전 실패인생이라 자인하는 분에게 실패 역시 선택이니 오늘부터 성공을 선택하여 살라 조언한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가톨릭 교회의 최대의 철학자라 공인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지금부터 약1200년전 고작 49세로 끝난 생애이지만 참으로 전무후무의 불가사의의 천재 신학자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신학자였지만 겸손하고 성실하며 따뜻한 사목자였고 도미니꼬회 수도자였습니다.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 위로와 힘을 주는 성인으로 흡사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참 삶의 좌표를 보여 주는, 예수님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여러 일화들은 늘 반복하여 들어도 새롭고 영감을 줍니다. 아무리 자랑해도 싫증을 못 느끼는 몇 일화를 소개합니다.
작은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주고 받은 대화를 열린 문틈으로 동료 수사가 엿들었다는 전설같은 일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느냐?” 물으셨을 때, “주님,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주님 하나 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다는 답변이겠습니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이 말없는 황소는 그의 부르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 성인은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중 강렬한 하느님 신비 체험을 한 후부터 돌연 집필 작업을 중단하고 다음 같은 사유를 말합니다. “주님의 발현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지푸라기와 같다” 결국 신학대전은 미완의 대작으로 남게 됩니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어는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나는 기다리고 있었네.” 였습니다. 성인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이 없다는 지적에 요한 22세는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라는 명답으로 말문을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성인은 1880년 교황 레오 13세 교황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며, 성인학자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였습니다. 성인의 하느님 향한 열망을 표현한 다음 그의 기도도 감동적입니다.
“오 주 하느님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당신을 알 수 있는 정신을, 당신을 찾을수 있는 마음을,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을, 당신을 기다리는데 신뢰 가득한 항구함을 주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만을 껴안는 희망을 주소서.”
참으로 이외에도 무수한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오는 말그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성인들의 색깔이 참 다양합니다. 우리 역시 참나의 고유한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기억, 기념하라고만 있는 성인축일이 아니라 우리도 성인으로 살라고 분발을 촉구하는 성인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성 다윗의 행태가 충격입니다. 어제 멋진 감사기도를 드린 성 다윗이 오늘 유혹에 빠져 악마가 되어 밧세바를 범한 후 그의 남편 우리야를 사지에 넣어 전사하게 함으로 참으로 천인공노할 대죄를, 완전 범죄를 저지릅니다. 내일 독서에서 나탄 예언자에게 탄로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함을 봅니다.
노자 73장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늘의 그물은 괴장히 넓어서 눈은 성기지만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앙화를 내리는 일은 조금도 빠뜨리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의 그물을, 하느님의 눈을 벗어난 완전 범죄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이 결정적 실수는 잠시 방심한 탓에 유혹에 빠져 하느님 나라를 잊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미풍의 현실은 이제 끝나고 거센 태풍의 고단한 삶을 살게 될 성 다윗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나라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여 살아갈 때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두 하느님 나라 비유가 대동소이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잘 들여다 보라는 것입니다. 무리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지 말고 잘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두 대 원칙이 적용됨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건드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의 방치나 방관이 아니라 깨어 하느님의 나라가 잘 펼쳐지도록 보살피고 가꾸는 섬세한 협조의 노력을 뜻합니다.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무분별하게 주제넘게 간섭할 때에는 십중팔구 “너가 뭔데?” 또는 “너나 잘해!” 두 말마디를 듣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서서히, 은밀히 진행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우리가 할 일은 조급하게 서두르는 일 없이, 깨어 한없이 견디고 기다리는 겸손과 인내의 사랑이, 관상적 자세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한 마디로 100% 하느님 은총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노력의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맞갖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하느님은 물론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선택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택하여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께 잘 협조해 드리며 순리에 따라 겸손하고 성실히 하느님 나라를 잘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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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MncMrSpo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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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았다.(마르 4, 26)
씨 뿌리는
사람을
우리는
몰라본다.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다.
씨앗이
땅을 향하듯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향해
오신다.
우리의 땅에
씨앗이
떨어졌다.
감사하고
기뻐할
선물이다.
씨앗은 땅을
맞이하고
땅은 씨앗을
맞이한다.
사람은
사람의
아들같이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
기쁜소식은
씨를 뿌리는
적극적인
실천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신뢰하기에
예수님께서도
씨를 뿌리셨다.
신뢰의 시간이
기다림과
사랑의
시간이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뿌려진 것이다.
씨앗과 땅은
하나이다.
하느님이
없다면
우리도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이다.
기쁜소식이란
씨앗과
땅이 만나
하나가 되듯
예수님과
사람들이 만나
기뻐하고
춤추는
오늘 여기가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씨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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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마르 4, 28)
저절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 또한
언제나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살아갑니다.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우리모습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이와같이 자연스레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순리라는 흐름 안에
하느님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들 삶 또한
저절로 자라게 하는
하느님 방식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또한
자연스럽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고
자연스레 영글게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자연스러운 순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땅과 줄기
이삭과 낟알
이 모두는 자연스러운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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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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