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물상(物象)」, 「남행(南行) 길」 평설 / 김광림
물상(物象)
강인한
한 컵의 물이 공중에서 엎질러진다.
물은 침묵이 무서워서 저희끼리 부둥켜안은 채 공처럼 떠 있다.
무서움과 무서움으로 결합된 물의 혼은 허공에서 일순 유리공의 탄성을 지닌다.
(현대시학 1978. 5) ..............................................................................................................................
강인한의 「물상(物象)」은 물 한 방울의 존재성을 표출해내고 있다. 이 땅에도 즉물주의(卽物主義) 수법에 의해 작품을 영위하는 시인이 더러 있긴 하지만 박남수 이후 인한(寅翰) 정도가 때로 성공한 작품을 내놓고 있는 듯하다. 빈틈없이 짜여진 조형적(造型的)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긴장과 공포가 지니는 탄성(彈性) 앞에서 포에지를 만난 반가움에 잠시 취기를 맛보게 하는 작품이다.
(현대문학 1978. 6 「이달의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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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南行) 길
강인한
서울에서 정읍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5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 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 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 지어 날아가는 남행 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 눈이 내린다.
(현대문학 1980. 7월호) ............................................................................................................................................................
강인한의 시는 이렇다 할 시도나 새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안정된 표현 속에 아기자기한 것이 있다. 정적인 발상 속에 자근자근 씹히는 사랑스러움이 있다.
서울에서 井邑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5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 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 지어 날아가는 남행 길 半島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여러 상황들을 통해 인정과 향수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는 희한한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으면서도 테크닉을 부린 흔적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다. 스무드하게 넘기고 있다. 가령 ‘적막한 직선’이라든가 ‘영하 5도의 슬픔’이라든가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혹은 ‘半島의 하반신’ 등의 이미지는 여간한 테크니션이 아니고서는 부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테크닉은 이 시를 한결 다채롭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끝 구절의 “半島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 눈이 내린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여체와 같은 우리나라 국토와 우리 민족의 비극성을 만나게 된다. 이 시에서 그와 같은 상념은 순전히 배면에 숨겨져 있지만 ‘어루만지듯’이라는 표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눈이 내리는 단순한 상황을 통해 우리의 처지와 감정 그리고 역사적 현실까지도 실감케 하고 있다. 관념이 노출되지 않고 표현 속에 용해되어 있다. 이달에 만난 가작의 하나이다.
(부산일보 1980. 7. 15 이달의 詩壇에서)
김광림(金光林)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