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곡의 탄생 일화
율곡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청룡·황룡이 얼크러져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대길할 태몽이라고 여겨 강릉으로 부인을 만나러 내려오던 중이었다. 대관령 마루에 있는 주막에서 주막집 여자가 율곡 아버지의 기상을 보고 유혹하였으나 율곡의 아버지는 꿈꾼 것을 생각하고 거절한 뒤 부인 신사임당에게 와서 율곡을 잉태하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율곡의 아버지는 대관령 주막에 들러 여인의 소망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그 여자는 이미 큰 인물을 낳을 시기를 놓쳤다며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경기도·강원도 일대 널리 전승된 설화)
2. 해주에서의 친구 최립과의 일화
율곡이 관직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녹봉을 가지고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100명이 대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식량이 떨어질 경우도 있었다. 율곡의 남녀 형제들에게는 파주에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있었는데, 율곡이 31세로 이조좌랑이 된 겨울에 남매가 모여앉아 각기 분배 상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100여 식구의 생계를 꾸려가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이항복이 문집에서 밝힌 것에 의하면, 율곡은 해주에 살면서 대장간을 세우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다고도 하는데, 그 역시 대식구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지라 해주 석담으로 와서는 점심을 들지 않았다. 제자들이 까닭을 물으면 양식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만 먹으려 한다고 하였다. 딱한 사정을 안 어릴 적 친구 최립이 재령 군수로 있을 때 쌀을 보낸 적이 있는데 받지 않았다. 자제들이 양식이 떨어졌는데 거절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하였다. "나라의 법에 장죄(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부정하게 재물을 탐한 죄)가 심히 엄하여 받는 자도 동일하게 처벌한다. 우리나라의 수령이 나라의 곡물 아니고서는 다른 물건은 없다. 그러니 무릇 수령이 주는 것은 모두 받아서는 안된다. 최립은 어릴 때 벗이니 만일 자기 집의 재물로 구제해준다면 어찌 받지 않을 이치가 있겠느냐."
3. 임진왜란을 예언한 방화정 이야기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의 어가가 몽진차 임진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궂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 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반찬 없는 밥
율곡이 대제학 벼슬을 사양하고, 잠깐 파주(坡州)로 물러나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율곡 선생 밑에서 부제학을 지낸 최황(崔滉)이란 이가 율곡을 방문하여 겸상을 차려서 밥을 먹는데, 반찬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최황은 수저를 들고 머뭇거리기만 하다 말고 마침내 한마디했다. 『아무리 청빈하기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숫는대서야…… 소생이 민망하여 뵈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율곡은 웃으며,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맛이 있느니!』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속담에 있는『시장이 반찬이지』하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5. 쇠고기를 먹지 않음
율곡 선생은 평소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국법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소를 부려서 실컷 그 힘을 뽑아 먹고, 또 그 고기마저 씹는다는 것은 결코 어질다 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조정에서『쇠고기 못 먹게 금하는 법령』을 내리자, 율곡은 득의한 듯이,『국법으로까지 이같이 금하는 일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된다』하고, 그로부터는 비록 제사라 할지라도 쇠고기는 쓰지 아니했다. (율곡별집 권3)
6. 퇴계와 대좌한 이야기
율곡은 퇴계와 대좌한 일이 있는데, 퇴계는 나이의 고하를 불문하고 제자들에게 절을 하도록 시켰다. 제자들이 불평을 하자 퇴계는 율곡이 동방의 대성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귀신을 퇴치하여 신부를 구한 이야기 등이 전하여지나, 이는 이인(異人)설화가 율곡에게 부회된 것으로 본다. 율곡설화에는 율곡이 국난을 예견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힘쓴 큰 인물이라는 것이 부각되어 있다.
7. 평생의 친구, 성혼과의 일화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윈 율곡은 3년 동안 자운산 선영에서 시묘살이를 마친 후, 금강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성혼(成渾)을 처음 만났다. 열아홉살의 율곡과 스무살의 성혼은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화석정 아래 임진강에 작은 배를 띄우고 놀았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 배가 기우뚱거리자 성혼은 놀라며 허둥댔는데, 율곡은 뱃머리에 서서 태연스레 시를 읊었다. 성혼이 놀라며, "어찌 변화에 대처하는 도리도 듣지 못하였단 말인가?"하자, 율곡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익사할 리가 있겠는가." 조금 후에 풍랑은 가라앉았다. <윤선거(尹宣擧)의 노서기문(魯西記聞)>
한편, 성혼과 율곡은 친구 송강 정철의 생일잔치에 초대되었는데, 가서보니 기생들이 함께 있었다. 고지식한 성혼은 기생을 못마땅히 여기었지만, 율곡은 웃으며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리라네"하며 함께 잔치를 즐겼다. 평생의 반려된 친구로 지내다가 율곡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성혼은 그보다 14년을 더 살면서 율곡을 잊지 못해 그의 기일(奇日)이 되면 늘 소복을 입었으며, 율곡의 인품과 우정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기곤 하였다.
첫댓글 멋진 글 감사합니다, *^^*
율곡 이이의 몰랐던 일화를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존글에 머물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