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절)
제가 신학공부를 할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역하시던 한 선교사님이 이 말씀을 여러 번 사용할 때에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말씀을 깨닫고 한 없이 받아먹는 기간 중에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고 날마다 목이 터져라 소리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노래를 다시 부르며 문득 내가 지금 후방근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아졌다고나 할까요.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맞바꾸기를 밥 먹듯 할 때는 나의 전부를 주님께 들이댔습니다.
그런데 이젠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적당히 때우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함이 덜하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배부름과 진리 안의 자유로 인해 제 자신이 태만해 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좀 안다는 것으로 충성도가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고백하고, 앉으나 서나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보다 싱싱도가 낮아지고 팔팔한 생명의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별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은 강력한 기운과 온 세상을 맞서 덤비려면 덤벼라 하는 만용에 가까운 용맹도 사라진 듯합니다. 다만 좀 노련해 진 느낌이 들 뿐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와 맞장을 뜨는 기도와 오직 그 분을 드러내고 그 분에 의해 그 분을 위한 삶의 순간순간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건 선교지의 열악한 회중의 도전이 한 몫을 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달음질(고전9:27)을 계속하고, 나를 통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수 있도록(빌1:20) 목표를 재정립하고 그 목표를 정조준 해야겠습니다. 잠시라도 조준선 정렬이 흐트러지지 말아야겠습니다. 조금만 방심을 하면 그만 신앙의 초점이 어리벙벙해 지고 머리 깎인 삼손과 같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간단해져야 합니다. 믿음의 근거도 오직 그리스도이며 삶의 근거도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는 겁니다. 율법의 하라 248 가지, 하지 마라 365가지 도합 613가지 조항이 단 하나의 계명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심을 지키는(요14:21) 단계로 진입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주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많은 훈련과정을 거친 거지요. 고난과 더불어 인내와 연단을 통과한 겁니다(롬5:3-4) 거기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사나 죽으나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첫댓글 아멘!
복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