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동리 목월 문학 기행(1)
초여름 경주에서,
토속적 정서의 香薰에 빠지다
「황토기(黃土記)」의 무대(통일전 앞)
오전 8시 10분에 사상 도서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경주를 향해 출발했다. 사상도서관 주부독서회 회원 15명과 사상도서관 운영위원장 최정주, 운영위원 허맹욱, 그리고 필자 이렇게 18명이 오늘 경주시 동리 목월 문학기행에 참여했다. 버스 안에서 주부독서회 회장이 오늘의 문학 기행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총무가 아침 식사를 거르고 온 사람들을 위한 김밥과 과자 봉지, 그리고 술안주가 든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교통의 흐름이 좋아서인지 출발한지 1시간 만인 9시 10분에 첫 기행지인 통일전에 도착했다.
<황토기의 무대인 통일전 안의 연못에서 기념 촬영>
그 옛날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형이 꼭 용 한 마리가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착안하여 김동리가 1939년 5월에《문장》제4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 바로「황토기」이다. 작가는 작품 초두에 용이 등천의 기회를 놓치고 굴러 떨어져 흘린 피이며, 혈을 찔려 맥이 끊어진 산이 피로 이루어졌다는 상룡설(傷龍說)과 절맥설(絶脈說)의 황토골 유래를 통해, 추락과 저주 및 거세의 함축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억쇠와 득보라는 두 장사가 분이와 설희라는 여자를 사이에 두고 부질없는 힘겨루기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 작가는 두 장사가 끓어오르는 힘을 어쩌지 못하는 것을 일제강점기하의 우리 조선 민족과 한반도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통일전 옆에 있는 마을 어느 집의 담벼락. 담쟁이 넝쿨이 초여름 핵살아래 눈부시다.>
<통일전 뜰에 있는 나무들. 줄기에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통일전을 출발하여 동리 목월 문학관으로 향했다. 버스의 양 옆은 이미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주부독서회 회장이 양 옆의 들판을 가리켜 보이며 저곳이 바로 김동리의 단편「황토기」에서 억쇠와 득보가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는 무대였다고 설명해 준다. 주부독서회 회장이 오늘 회원들을 상대로 삼행시를 지어 푸짐한 상품을 주겠다고 하면서, 나더러 시제를 정해 달라기에 즉석에서 ‘경주시’와 ‘황토기’로 정했다. 필자는 잠시 눈을 감은 채 ‘경주시’라는 세 글자로 삼행시를 지어 보았다.
경 : 경주시 동리 목월 문학관 뜰 앞에 서서 둘러보니
주 : 주인 두 분은 자취만 남긴 채 온 데 간 데 없어
시 : 시간의 물살에 님들을 향한 그리움을 실어 보낸다
동리 목월 문학관
경북 경주시 진현동 550-1
전화 : (054) 741-1750
홈페이지 : http ://www. 동리목월문학관.com
동리 목월 문학관은 토함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불국사 옆문에서 조금 들어가면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입구 쪽에 ‘신라를 빛낸 인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아도 화상을 비롯한 ‘흥륜사 신라십성’, ‘원광법시와 세속 오계’, ‘신라의 불교’, BC 69년의 신라의 시조부터 탈해왕, 미추왕을 비롯한 ‘신라의 왕’, ‘신라의 재상’, ‘충신’, ‘장군’, ‘화랑’, ‘학자’ 등 신라를 빛낸 인물들의 초상화와 업적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신라를 빛낸 역사적 인물들의 업적을 정리해 놓은 신라를 빛낸 인물관>
<입구의 벽에 새겨진 웃는 기와. 미소가 아주 안온하고 아늑하다>
뜰을 지나 앞쪽으로 걸어가면 본관이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1층 왼쪽에는 동리 문학관, 오른쪽은 목월 문학관으로 꾸며져 있다. 지하에는 두 사람의 문학적 업적과 생애, 그리고 문학사적 위치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상관,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그리고 동리목월 기념사업회가 위치하고 있다.
<동리 목월 문학관의 정면. 오른쪽 아래가 지하관이다>
동리문학관으로 들어서면 동리의 흉상이 있고 그 뒤의 유리판에 “동리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라는 이어령의 함축적 예찬의 글이 새겨져 있다. 김동리의 가계를 살펴보면 맨 윗 형이 동리보다 18살이나 많은 김범부 선생이고 모친은 허임순 여사이다. 김지하가 양주동, 이광수, 김범부를 한국의 3대 천재라고 할 정도였으니 맏형 김범부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모친은 학력은 없지만 머리가 아주 명석하고 고집이 대단했다고 한다. 큰아들 김범부가 사서삼경을 낭송하다 뒷 구절이 막혀 생각나지 않으면 마당을 쓸던 어머니가 크게 대신 낭송해 주었다고 할 정도이다.
<동리 문학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이어령의 글>
김동리(1913-1995) 선생의 첫 부인은 김월계이고, 두 번 째 부인이 소설가 손소희 여사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이 동리보다 서른 살이나 아래인 소설가 서영은이다. 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 동리와 서영은은 서른 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속궁합’은 너무 장 맞았다고 말하지 우리 일행은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서영은은 마음속에서 동리에 관한 모든 것을 지우고 외국 나들이를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김동리의 모친인 허임순 여사의 초상 사진>
<두 번째 부인인 소설가 손소희 여사와의 한 때>
김동리 선생은 키가 158 센티미터의 작은 체구지만 좌익 진영과의 여러 번 논쟁에서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어느 누구와의 토론에서도 박식함으로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1939년 유진오 선생과의 세대논쟁, 그리고 좌익 논객인 김동석과의 계급문학에 대한 첨예한 논쟁은 유명하다. 그는 신춘문예 3관왕이다. 처음에는 시로, 그리고 다음에는 단편「화랑의 후예」와「산화」가 연달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87년에는 단편「무녀도」를 개작한『을화』가 노벨문학상 본심까지 올랐지만 아깝게 탈락했다고 한다.
<김동리의 소설 문학 전집. 울긋불긋한 책표지의 색깔이 샤머니즘의 영적인 세게를 상징하는 듯 하다>
오른쪽의 목월문학관 역시 안으로 들어서면 목월 선생의 흉상이 있고, 그 뒤의 유리판에 그의 유명한 싯귀인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새겨져 있다. 목월 박영종(1915-1978)은 경북 경주시 사면 모량리에서 출생하여 건천초등학교,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시는 초기, 중기, 후기 시로 나누어진다. 초기 시는 자연과의 교감과 향토적인 정서를 배경으로 하여 본원적인 고향을 추구한 시편들이다. 그의 중기 시와 후기 시는 인생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문명비판적 경향 등은 시가 시대적인 상황과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목월 박영종의 흉상 뒤 유리판에 새겨진 싯귀>
<목월의 동시 사랑에 대한 정신이 오롯히 담겨 있는 저서>
목월에 관한 일화도 많다. 소설가 김주영이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학생 김주영은 자신이 쓴 시를 스승인 목월에게 주면서 평가를 부탁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일언반구의 소식도 없다가 우연히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대면했다. 그 자리에서 김주영이 자신의 시에 관해서 말하자 목월 선생은 손을 씻고 돌아서며 “자네는 시에는 재질이 없는 것 같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주영은 소설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은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목월 박영종은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몇 년을 신었는지 구두 밑창이 헤어져 구두 발자국 대신 맨발의 발자국이 찍힐 정도였다고 그의 아들 박동규가 전하고 있다. 단 한 번 외도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묘령의 여인과 제주도에 가서 한동안 지냈지만 곧 그 여인과 이별했는데, 그 때의 심경을 읊은 시가 바로 우리 가곡으로 작곡되어 많이 불려진 ‘이별의 노래’이다. 목월은 1978년 3월인 지병인 고혈압으로 영면했다.
목월공원과 황성공원의 목월 시비
목월공원은 현대호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앞은 보문호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그의 시인 ‘달’이 새겨진 박목월 시비가 세워져 있다. 현대호텔을 옆에 끼고 한 20여 분 걷다 보면 보문호의 수면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만날 수도 있고, 그 호수 위를 느리게 유영하는 백조 모양의 유람선도 만날 수 있다.
경주 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는 황성공원에는 목월 박영종의 ‘송아지’ 시비가 있다. 송아지 시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목에서 부산지역의 또 다른 독서회를 안내하고 있던 시인 김성춘 선생을 만났다. 그 분의 부인은 동화작가 강순아인데, 십 몇 년 전에 동화집의 발문을 썼던 관계로 잘 알아오고 있다. 김성춘 시인과 포옹을 하고 난 뒤 위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김유신 장군상을 구경했다.
<보문호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목월공원의 '달' 시비>
<목월 공원 앞의 보문호, 백조 모양의 유람선이 유유히 떠가고 있다>
<황성 공원 안에 세워져 있는 목월 박영종의 '송아지' 노래비>
<송아지 노래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주부독서회 회원들>
올라오고 있는 주부독서회 회장더러 최정주 선생이 김유신이 타고 있는 말이 암말인가, 숫말인가를 확인하라고 했더니, ‘아마 암말이겠지요.’하고 대답하고 동상을 한 바퀴 휘둘러 나오며 하는 말이 “숫말이네요.”하고 대답해 우리 남자 시 사람은 한 때 모두 음큼한 생각을 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계속>
첫댓글 저도 ...가고 싶어서... 읽고 또 읽습니다.
문학 기행은 언제 가도 좋지요. 의미있고 볼 것 많고...
경주갈때마다 제가 들리는 곳입니다. 조용하고 편안하지요. 경주시에서 참 잘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