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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비판의 역사
이지양의 논문을 빌려 1764년 5월 20일자 일기를 보면, 이 날 황윤석은 서울 선비 김원행과 만났는데, 김원행이 영호남을 비교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박찬혁이란 선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바탕이 돈실하니 영남 사람인 듯하다. 장래에 큰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해낼 듯하다. 호남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속임수가 많다고들 하는데, 나는 군과 홍생 이외는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바탕이 돈실하여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곧 영남 사람이라는 당시의 세평이었다. 반대로 전라도는 ‘속임이 많다’라고 하여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믿을 수 없고 뒤통수친다는 전라도에 대한 평판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평가 속에서 전라도는 당시 조선에서 완전히 내버려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전라도에 대한 품평이 이어진다.
대체적으로 전라도는 사박(詐薄), 즉 속이고 경박하다는 것이 온 세상의 평가였다. 이는 완전히 반대의 기질을 가진 영남인과 특별히 비교되었다. 경상도는 질각근중(質慤謹重), 즉 진실하고 순박하며 무게가 있는 사람들이라 하여 최고의 호평을 받았지만 전라도는 부박하며 사박함, 즉 경박하고 속임이 많다는 악평을 듣고 있었다.
속임이 많다는 전라도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에 나타난 여러 자료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황윤석 역시 전라도에 부박하고 분열된 기풍이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전라도에 잡술류가 많다는 말도 일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사박하다는 말과 잡술류가 많다는 말은 전라도인의 문화에 대한 오해이다. 하긴 당시 엄격한 선비의 눈에는 판소리를 즐기고 창(唱)을 즐기는 전라도인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잡술류란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흥 많은 전라도인에 대한 뻣뻣한 선비의 비판적 시각이었고, 이 모든 모습은 경박(輕薄)하고 사박(詐薄)함, 그런 것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기록도 완전히 악의적인 기록을 남긴다. 성호 이익은 전라도에 대해,「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夸詐 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면서「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고,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고 하였다. 근엄한 실학자 이익마저 이 지경이었으니, 일반인의 평가는 어떠했으리.
더 이해를 돕기 위해 1955년10월 22일자 중앙대 학보에 실린, 어느 전라도 출신 유학생의 글을 보자.
「나는 전형적인 전라도인이다. 정저지와(井底之蛙)란 말이 있듯이 전라도 내에서만 파묻혀 있으면 틀에 박힌 견문에 발전성이 없을 것 같기에 수륙천리의 길을 더듬어 양반님네들이 살고 계신 서울까지 더좀 배워보겠다고 찾아왔으나, 과연 양반들의 틈에 끼어 전라도인이 살기란 아주 힘이 들다.」고 고백한다.
이어 이 유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맞춤법이 무시된 원문 그대로 적음).
「 2,3일 전에도 S선생님이 소개로 서울 양반과 인사 한 적이 있다. 그는 인사가 끝나자 내가 전라도인임을 듯고서 몸을 움짓하더니 나에게 준 첫 말씀이,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서울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전라도인이라면 아주 질색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며 이 전라도 학생은 서울사람에 대해 한편으로는 분개하고, 한편으로는 차별적 시선에 매우 고통스러워한다. 1955년이라면 6.25 남침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 후의 일이다. 그 폐허 속에서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은 존재했던 것이다. 그 무렵 유행했던,‘하와이 근성 시비’의 일부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참고: 전라도를 하와이에 비유했음. 아마 하와이 사람들이 미국에 점령당하고 난 뒤, 전라도와 같은 핍박을 받은 것을 비유한 것으로 사료됨)
「전라도 개땅쇠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 전라도놈은 송충이나 그 이하의 해충... 전라도 사람은 신용이 없고 의리가 없으며 잔꾀가 많아 깊이 사귈 수 없다. 사회 각층에서 말썽을 일으킨 부류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 대부분이며, 군대에서 탈영한 군인도 이곳 출신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거지나 깡패, 소매치기 등도 전라도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깊이 사귀는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헌신짝처럼 차버리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며... 뒤통수에 대고 욕설을 퍼붓거나 모략을 하는 데도 앞장서는 간사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며 악의적인 품평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지경이니, 전라도 사람들이 어디 가서 고향을 밝히고 살았겠는가? 강준만 교수가 쓴 ‘전라도 죽이기’ (개마고원, 1995) 엔 이런 상황을 경험한 어느 전라도 청년의 글이 실려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당시 전라도인의 감정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교수님께서는 양심적인 언론과 지식인, 국민들이 나서면 지역차별 감정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해소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제가 겪은 바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역차별 감정이 골이 깊으며 전라도 대 경상도의 문제가 아니라 호남 대 비호남이 대결로 되어있으며, 이 양쪽은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매체, 사람들을 통해서 순간순간 절감하고 확인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일본놈들보다도 전라도놈들이 더 밉고 싫으며 전라도 사람들은 악(惡) 자체라고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란 사실입니다.(중략)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어떤 놈들 좋은 일 시키라고요! 하지만 우리 전라도 독립투쟁을 위해서라면 앞으로 기꺼이 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 개 같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와 같은 차별과 모욕, 한 같은 것은 남겨줄 수 없으니까요.」
이런 상황이었으니, 전라도 차별이 망국적인 현상이 아니었겠는가? 필자(筆者) 역시 이런 전라도 차별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위의 전라도 청년과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살펴본 결과, 호남차별과 지역감정이 박정희대통령과 경상도 사람들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은 오해임이 밝혀졌을 것이다. 다만 현대 산업화 이후 호남지역에 대한 차별과 박대가 심화될 때, 그때 당시 집권세력이 영남정권이었기에 생성된 오해일 뿐이고, 사실은 남남갈등을 조장하고자 하였던 북한의 공작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만큼 호남인에 대한 비하(卑下)의식은 오래된 역사를 지녔음이 이 모든 사실을 증명한다.
[기획논단]전라도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5부)
전라도의 비극
3․4부에서 살펴본, 지역혐오감과 차별에 대한 역사성이 거의 유전적이며 진화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윤석 이후 나타난 고매한 학자 성호 이익마저 그런 평을 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은 서적과 구전(口傳)을 통해 얻어들은 것들이 악의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호 이익이 전라도에 대한 악평을 쓴 근거를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주장이라면, 성호 이익이 전라도 사람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익 선생은 그 근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니 누구한테 얻어들은 풍월을 기록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선조(先祖)들의 기록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싶다. 어린 시절 필자(筆者)의 경험으로 전라도 사람 한번 만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경우를 많이도 보았었다.
그리하여 지역혐오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전라도 사람이라면 모두 박멸시켜야 할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악의는 직접 체험이 아니라, 전설의 고향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 속에서 더해지고 입혀진 오해들로 발생된 것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사람이라면, 이 지경에 이르러 누군들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겠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영조 대에 호남인들의 이주정책도 그런 차별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일이다. 지금 울릉도 인구 중 영조시대 이주해온 전라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죽하면 독도도 전라도 방언(전라도는 돌을 ‘독’이라 함. 그래서 전라도 이주민들이 독도를 독섬이라 불렀고, 후일 한문 표기를 위해 섬을 ‘섬 도(島)’자로 바꾼 것임)에서 나왔을 것인가.
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러 전라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1589년 정여립의 난 이후 250여년이 흘러갈 때까지, 호남선비들은 등용에 제한을 받았으니 위로는 출세길이 막히고, 아래로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뜯어 먹히는 신세가 되었다. 호남의 곡창지대로 뇌물을 바쳐가며 자리를 차고 들어온 관리들은 말 그대로 탐관오리들이었다.
학정(虐政)과 수탈이 얼마나 극심하였는지, 정약용은 유배지 전남 강진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애절양(哀絶陽)
노전에서 젊은 부인 울음소리 길고 긴데 /관청 문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향해 부르짓네
남편이 출정 나가 돌아오지 않음은 오히려 있을 수 있지만
예로부터 남자가 스스로 생식기를 잘랐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시아버지 돌아가 이미 상복을 입었고 갓난 아이는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 이름이 군적에 올랐다네
짧은 언변으로 하소연하러갔더니 범같은 문지기 버티고 있고
이정이 호통치며 마굿간에서 소마저 끌고 갔지요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자 피가 자리에 흥건한데
아이를 낳아 이런 재난을 당한다고 스스로 한탄하더이다
- 하략 -
이재(李齋) 황윤석의 집안도 무려 5백석을 거두는 부농(富農)이었다. 그때는 농업기술과 수리시설이 등이 낙후하여 쌀 수확량이 200평 한 마지기에 한 가마 정도였으니, 500석지기 부농이란 논을 약 10만평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일기를 보면, 보릿고개에 이르러 황윤석은 집안의 식량을 걱정하고 있었다. 훗날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조병갑 고부 군수 같은 이들의 수탈이 없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속 인물"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집필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동상.
그리하여 전라도인들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1894년 고종31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탐관오리의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 및 외세(外勢)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그리고 군주(君主)와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보인 농민혁명이었다. 보국 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며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폭정으로부터 구하여 편안하게 하던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침탈과 외국 세력의 내정간섭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고, 드디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제창한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의로운 깃발과 목소리는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고, 전라도는 일본군과 관군의 동학교도 색출을 위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던, 살인과 방화로 초토화된다.
그렇게 수탈당하고, 벼슬길마저 막혀 한이 깊은 백성들이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1차 봉기를 접었고, 이어 일본과 외국세력에 의해 나라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자, 다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쟁터로 나아갔던 것이다. 공주 우금치의 전투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던 흰옷 입은 우리 전라도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전라도의 비극은 뒤를 잇는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강점시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수탈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필두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땅을 빼앗아갔고, 그리하여 호남인들은 땅을 빼앗기고 일본인들의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수탈을 견디지 못한 전라도 사람들은 만주로 간도로 건너갔다.
전라도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후, 제주 4.3 폭동 진압을 거부하는 14연대 좌익 군인들과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은 호남 지역에 ‘빨갱이 고장’이라는 오명(汚名)을 하나 덧씌운다. 그러니까 사기꾼 반역자들이 사는 고장이라는 전통적인 지역혐오 현상에다 이제는 ‘빨갱이 고장’이라는 붉은 색깔까지 덧칠해진 것이다.
당시 여순 반란군과 이에 합세한 지역빨치산들은 토벌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이후 약 2년 동안 야산대, 구(舊)빨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오랫동안 군경과 대립하여 죽고 죽이는 참상을 일으켰으며, 이 묵은 원한이 수많은 빨치산 동조자를 양산하였다. 또한 땅을 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공산당에 가입한 소작인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하여 전라도는 한 많은 ‘빨갱이 지역’이 된 것이었다.
[기획논단]전라도는 무엇을 꿈꾸고 사는가(6부) -순천편
여순반란사건
호남의 비극을 놓고 볼 때, 제주 4. 3과 여순반란사건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동족이 동족을 참살하였던 이 비극은 공산주의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사상이란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황폐화시키는가에 대한 답을 남겼다.
1948년 10월 19일, 남로당은 여수 주둔 14연대에 제주 4.3폭동을 진압하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도록 한다. 그리고 여수 지역 남로당원들을 동원하여 협력하게 하였고, 반란 당일부터 그 다음날까지 이틀 동안 약 200명에 이르는 여수 지역 경찰과 가족, 애국인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여수 지역이 인민공화국 영토임을 선포하였다.
필자(筆者)가 왜 이렇게 여순반란사건을 장황하게 조명하느냐는 이유가 있다. 김대중 정권 이후 여순반란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순천대 학생들이 축제 때 여수14연대기를 들고 나오는가 하면, 반란사건을 국군의 범죄로 몰아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란 이후 빨치산 색출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여순반란의 범죄행위를 모두 국군의 학살로 표현하고 있었고, 심지어 여순반란군을 봉기군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현재 순천 팔마체육관 여순기념비는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거기엔 반란군들이 자본과 제국에 저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천팔마체육관 여순사건 기념탑
순천지역 고등학교 교지(2009)에서는 여순반란군을 봉기군으로, 그리고 이 봉기군의 족적을 찾는 특집을 실은 바 있다. 반란군이 봉기군으로 둔갑한 것은 노무현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에 반역하여 일으킨 반란이 봉기군으로 인정되는 일은 인민공화국의 시각으로 본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인민공화국 입장에서 볼 때, 여순반란군들은 봉기군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노무현 정권 당시 우리 대한민국은 완벽하게 좌익들에게 점령당하였음을 말해준다.
다시 여순반란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1946년 9월 남로당 괴수 박헌영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서 강동정치학원을 열어 대한민국 파괴를 위한 게릴라 양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쟁 전까지 게릴라를 남파하였고, 제주 4.3폭동의 주모자 김달삼도 이 무렵 태백산에서 게릴라로 활동하다 죽는다. 박헌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구폭동을 비롯하여 제주 4.3 폭동, 여순반란사건 등을 지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격변기의 우리나라 상황을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대로 연결해 보자.
북한 인민군 창설(1948.2.8) - 제주 4.3 폭동 -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 대한민국 건국(8.15) -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북한 최고인민회의(8.25) - 인민공화국 수립(9.9) - 여순반란사건(10.19) - 국가보안법 제정(12.20 ) - 미군철수(1949. 6. 30) - 6.25 전쟁(1950.6.25) - 박헌영 총살(1956)
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로당은 여순반란사건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반란군을 서울로 진격할 것을 명하였고, 이를 돕기 위해 광주4연대를 비롯하여 대구 6연대 등 국군부대의 동조 반란을 지시하였다. 물론 전라도 지역 남로당원들과 빨치산들까지 가세했고, 이로 인해 전라도 전 지역은 전쟁터가 되었다. 이것이 6.25 전쟁 후까지 이어져 전라도는 전쟁 기간 좌우익의 극한대립으로 무려 3만 명이 죽는다.
그리고 이들 후손들은 모두 연좌제에 걸려 자손 대까지 복수의 한을 기르고 있었고, 그리하여 빨치산은 대(代)를 이어 나타났다. 오종렬이나 권영길, 박지원이 같은 자들이 바로 한을 품은 빨치산 혹은 남로당의 후손들이었다. 여기에 비전향장기수들이 가세하였으며, 지리산에서 위장 투항을 했던 자들이 살아남아 범민련 같은 단체를 만들고, 대학가에서는 주사파를 양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텔런트 문근영의 외할아버지 류낙진이 바로 위장 투항의 예에 속한다.
이제 주사파의 실체가 통진당 사태로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국민들은 6.25 비극과 대한민국 적화가 시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다시 한번 필자(筆者)는 우리 호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왜 대한민국 파괴의 주동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어찌하여 호남이 대한민국의 적을 양성하고 있는 것인가? 왜 호남인들은 좌익들에게 속고 사는 것인가?
왜 우리는 북한을 잊고 사는가?
[기획논단]전라도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8부)
(해법을 위한 배경)
결국 오늘의 비극은 지난 조선조 선조 이후 420여년에 걸친 전라도 핍박과 멸시와 천대가 그 원인이었던 것이다. 모든 전라도 사람들과 북한에 의해 조종되는, 소위 민주화라는 이름의 좌익들은 적극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호남 출신 국정원 직원이 정보를 김대중의 민주당에게 주고, 정권 교체 후 국정원으로 금의환향 회귀할 것을 장담한 일화도 있었을 만큼, 김대중은 전 호남인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끝내 정권은 김대중과 전라도인에게 돌아갔고, 이윽고 논공행상에서 북한도 그 몫을 챙기게 되었다. 전교조를 비롯한 종북좌파, 즉 주사파 정치활동이 허용되고 대한민국의 적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주사파 정권 수립에 대한 공로로 북한이 얻어간 몫은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돈 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반역을 한 자들이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우대를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결과 친북 종북주의자들이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풀이가 시작되었다. 손충무 씨 등 김대중 정권을 파헤치려는 언론인과 국정원 직원에 대한 극심한 탄압에 앞장섰던 검사나 법관들도 역시 호남의 진보좌파로 추측이 된다. 또한 현재 전교조나 좌파인사에 대한 유리한 판결을 하는 자들도 우리법연구회 소속이라지만, 호남출신이 대부분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우익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정관계에 호남인들이 진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람들을 쳐내야 했던 것이다.
이해찬 같은 경우는, 교사 정년을 3년이나 단축하면서, 자리를 만들어 전교조 해직교사들과 한총련 활동으로 발령받지 못한 미발령교사들 수천 명을 임용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종북좌파가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호남의 정치세력들도 잘못된 길을 걷고 말았으니, 이 모든 것은 결국 잘못된 지역감정에서 출발한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 것이다.
▲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가 지난 달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새누리당이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부지 매입 의혹과 관련한 특검의 수사대상에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 의혹도 포함할 것을 요구한데 대해 "어처구니없는 망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들, 김대중 시대나 노무현 시대에 양성된 정관계 혹은 군사, 경제, 교육, 문화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다시 그들의 시대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잠복한 이들은 민주당을 위해 온갖 정보를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정보력으로 이름난 민주당 대표 박지원의 행각 속엔 진보좌파의 시대를 갈망하는 공무원들의 도움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모두 차기대권마저 빼앗긴다면, 미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다시 5년이라면 이들은 정치일선에서 물러가야 하는 나이를 먹게 된다. 그리고 좌익들도 예산과 인적 지원의 감소로 인해 운신(運身)의 폭이 좁아질 것이다. 즉 진보좌파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인내의 한계가 온다는 것이다. 대부분 민주 혹은 민노당 좌익들에게 출세와 보신(保身), 혹은 목숨줄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남인은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에 거는 미련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반감이 크다.
그러므로 필자(筆者)가 1부에서 미리 밝힌 염려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 지역분열을 통일전략에 이용하고자 하는 북한과, 다음은 이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썩어빠진 진보좌파 혹은 보수우파정치인들이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다. 김정일은 자기 대(代)에 남한적화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차기 대선에서 야당의 승리를 돕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죽었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뒤를 이어갈 것이다. 따라서 호남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에 대한 공격의 빈도와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지역감정 유발자들과 친북세력의 준동이 발호되고 있는 형편이라 할 것이다.
결국, 모든 비극은 북한의 연출이라고 보면 된다. 필자(筆者)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90%는 북한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서경원의 밀입북과 공작금 수령, 그리고 민노당 권영길을 비롯해 빨치산을 가족으로 둔 정치인들과 이적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의 붉은 가족력. 그리고 소위 민주화 인사라는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상성을 비롯하여 모두 북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민주화운동은 소수에 불과하고, 오직 북한이 지원하거나 기획한, 민주화를 가장한 적화통일운동만이 있었다는 것이 필자(筆者)의 판단이다.
그래서‘대한민국에는 민주화만 있고 민주는 없다’는 말은, 한마디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은 짝퉁 민주화운동임을 인정하는 진보좌파들의 자전적인 고백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민주화 인사도 90%는 색깔을 의심해야 할 만큼 순수성이 없는, 북한의 공작에 이용당했거나 당하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호남이 민주당 혹은 민노당 내 종북좌파 세력들에게 완전히 점령된 것은 아니다. 2011년 5월 15일 한청연이 주최한 전교조 좌편향 교육 실태 고발대회에 광주 출신 학생 2명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전교조 교사들의 횡포를 고발하였고, 따라서 이것은 호남이 좌익화되었다는 말의 반증(反證)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한의 축적으로 인한, 혹은 정권 상실 후 느끼는 박탈감에서 오는 반항적 행동이지, 빨갱이를 동조한다거나 사상이념적인 붉은 좌파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희망이 있다.
그 광주 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전교조 교사들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 김모군(17, 광주)은 “전교조였던 국어 선생님이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과 독재를 하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 배를 채웠다. 경제발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군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편향교육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도때도 없이 이뤄졌다”며 “심지어 ‘시위에 참여해야 민주시민으로서 올바른 가치관과 자질이 길러진다’고 수행평가를 구실로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수행평가에 불응한 학생은 0점을 받은 것은 몰론, 이후에도 ‘수행평가 불참’을 이유로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전라도 내 한나라당과 대한민국에 강력한 반발세력으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과거 지역차별의 피해자들이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까지 하였겠는가. 그들은 뼈에 사무치는 피해의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눈물 많고 정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기획논단]전라도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7부)
광주 5.18 편
전쟁이 끝나고 이 폐허의 강토에는 오직 눈물과 가난과 슬픔만이 떠돌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음악과 노래와 시는 모두 슬픔과 이별을 소재로 담고 있었다. 밝은 노래, 흥겨운 시가 있을 수 없는 초토화된 나라였다.
제주 4.3 폭동이 마무리된 것은 6.25 휴전 이후 1954년 9얼 21일까지 ,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씨가 체포된 것이 1963년 11월 12일의 일이었으니,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그만큼 공산주의에 확신을 한 듯하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과연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을 수 있는가?
지금도 북한이 옳다는 생각을 지닌 자는 오직 주사파와 대를 이어 충성하는 붉은 유전자를 지닌 빨치산의 후예들뿐일 것이다. 이미 북한에 대한 판단은 결론이 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300만명이 굶어죽는 지옥, 인간의 목숨이 가장 하찮게 처리되는 지옥이 북한이다.
그러나 지금의 판단이 설 때까지 대한민국은 비극을 이어간다. 산업화가 성공하여 5000년을 이어오던 가난을 벗고, 배부른 시대가 왔어도, 북한과 남한의 동조세력들은 적화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남민전을 위시하여, 통혁당 사건이 이어지고, 각종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이 정치계로 들어가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북한대로 무장공비를 남파하고,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테러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호남의 전형적인 비극, 5.18이 존재한다.
필자(筆者)가 5.18을 북한의 작용 속에 넣은 것은, 5.18이 표면적으로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정권 야욕에서 비롯된 사건이지만, 그 내면을 지휘한 것은 북한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그 많은 무기고가 한꺼번에 털릴 수 있는가. 어찌해서 사상범과 살인 등 흉악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일반 차량도 아닌 장갑차를 시민이 운전할 수 있는가. 세계 최고의 대한민국 의학기술로도 연고를 찾을 수 없는 시신(屍身)이 있을 수 있는가.
▼= "민주당 지도부 5.18묘역 찾아"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지난 6.13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역에서 분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 신군부의 통제 하에 있던 언론과 방송은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 같은 우인(愚人)도 북한의 작용을 의심하고 있을 때, 신군부는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5.18 유가족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후 군부독재가 진행되면서 부정적인 인식은 차별로 나타난다. 독재정부를 비롯하여 기업들에 이르기까지 전라도 핍박에 가세한 결과, 전라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버리고 말까지 바꾸어야 했고, 취직은 물론 승진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은 후손들을 위해 본적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소위 전라도 탈출이었고, 이는 김대중 정권이 세워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호남철도 복선화는 전라도 박해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기업이 없는 곳에 철도를 복선화하는 것은 낭비라는 정부 측에 기업은 이렇게 답하고 있었다. ‘철도 복선도 되지 않는 열악한 곳에 기업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호남철도는 대전에서 머물러 김대중 시대가 올 때까지 단선으로 운행되었다. 그건 민주화 대부라는 김영삼 시절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당선 후 6개월만에 호남선은 목포까지 복선이 되었다. 실로 기막힌 이야기일 것이다.
그동안 호남에 대한 차별과 모멸, 분노와 희망이 오늘의 호남좌익화라는 비극을 연장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筆者)의 판단이다. 그리고 왜 필자가 대한민국의 비극을 이렇게 소상하게 밝히느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호남인이 왜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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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안의 또 다른 대한민국 주적들
첫댓글 나는 누가 뭐래도 전라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