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사람과 거의 모든 것 담아...타임머신 같은 그림지도[BOOK]
중앙일보
2023.01.13 14:14
손세관 지음
도서출판 집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꼭 이 그림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다. 폭 25㎝, 길이 5m 남짓의 한 폭 두루마리 그림으로 중국 북송(北宋) 말기인 1120년께 장택단(張擇端)이 수도 카이펑(開封)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중국제일화로 받들어지는 이 그림의 진본은 베이징 고궁박물관에 있지만 복제본이나 모방본들은 서울 서촌의 작은 중국집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청명상하도는 전 세계 중국인들과 함께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에는 550명이 넘는 사람이 등장하며 건물, 가구, 동식물, 일용품 등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등장한다. 100채 이상의 집과 누각, 25척의 선박, 15량의 수레, 8채의 가마 등 북송 당시에 존재하던 만물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송대의 백과사전’이라 불린다. 청명상하도를 통해 우리는 900년 전 중국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건축과 도시를 연구하는 손세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지은 『도시의 만화경』은 카이펑을 비롯해 전 세계 15개 도시를 그린 450여장의 그림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환상적인 도시 탐험’ 가이드북이다. 로마·런던·파리·빈·피렌체·베네치아·시에나·암스테르담·뉴욕과 같은 서양의 도시들과 베이징·쑤저우·교토·한양 등 한·중·일의 도시들 그리고 이란의 이스파한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본다.
'확장된 빈의 파노라마'. 열기구에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사진 도서출판 집]
구스타프 파이트가 1873년 그린 ‘확장된 빈의 파노라마’는 600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의 황금시대를 그렸다. 19세기 말 빈의 모습을 높은 곳(아마도 열기구)에서 조망한 그림이다. 석판화로 인쇄된 이 그림은 그해 열린 빈 만국박람회 기념품으로 팔렸다. 벨베데레궁정 상공에서 본 슈테판대성당, 카를성당, 살레시오수도회교회 그리고 반지 모양의 넓은 길 링슈트라세와 주변 신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은이는 이 그림을 모티브로 빈의 역사와 문화, 건축 등을 소상하게 더듬어 본다.
‘베네치아 조망 그림’(1500년, 야코프 데바르바리)은 압권이다. 520여 년 전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만 개가 넘는 굴뚝, 114개의 교회, 47개의 수도원, 103개의 종탑 그리고 253개의 다리가 그려져 있다. 작은 주택의 창문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화가는 지도의 정확성과 과학성보다는 예술성을 더 강조해 도시의 윤곽을 날렵하고 역동적으로 만들어서 베네치아의 상징인 돌고래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796년 수도를 테헤란으로 옮기기 전까지 200년 가까이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은 이슬람권 도시 가운데 보기 드물게 그림지도가 남아 있는 곳이다. 테헤란 남쪽 400㎞에 위치한 이스파한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였으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도시였다. 1657년 네덜란드 지도제작자 얀 얀소니우스가 그린 ‘이스파한 전경’은 독일인 아담 올레아리우스의 그림지도를 바탕으로 곳곳을 보강하고 채색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이맘광장과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자메모스크, 페르시아 건축예술의 정점에 있는 로얄모스크 등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동궐도'. 저자는 "오블리크 작도법에 진경산수화 기법을 섞은 이 그림은 빛나는 우리의 국보"라고 썼다. [사진 도서출판 집]
200년 전 한양 풍경을 제대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그림지도는 ‘경기감영도’(작자 미상, 19세기 초반)다. 한양 그림은 이 밖에도 많지만 경기감영도와 동궐도가 당시를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대문 일대를 그린 경기감영도는 12폭 병풍에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저잣거리 풍경 등을 사진처럼 재현했다.
지금이야 도시를 찍은 사진들이 너무 흔해 빠졌지만 그림으로 보는 과거의 도시들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도시의 만화경』을 통해 중세, 근현대의 세계 도시들을 돌아다니는 즐거움은 남다르다.
책소개
“빈을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시키고 빈미술사박물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빈은 세계적인 대도시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022년 10월 25일 시작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의 전시 안내문에 소개된 프란츠 요제프 1세 이야기이다. 전시는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5부의 주제가 프란츠 1세 시대를 조명하는 ‘걸작을 집대성하다, 빈미술사박물관’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화와 다양한 소장품을 볼 수 있다. 전시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링슈트라세’를 소개하며 끝을 맺는다.
링슈트라세. 구도심을 둘러싼 반지 모양의 넓은 길. 폭 최대 450미터, 길이 5.2킬로미터에 이른다. 빈은 유럽의 거의 마지막 성곽도시였다. 성 안팎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성을 둘러싼 녹지의 방어 기능이 사라지자 빈을 근대도시로 바꾸고 싶어 하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반대를 물리치고 성을 허물고 링슈타라세 개발을 선언한다. 빈의 명소로 꼽히는 슈테판 대성당, 호프부르크 궁전, 빈 대학교, 빈 시청사, 국회의사당, 자연사박물관, 미술사박물관, 국립오페라극장 등이 링슈트라세를 따라 자리한다.
《도시의 만화경: 도시그림, 현실과 동경을 넘나들다》는 열한번 째 이야기 “빈: 육백 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그 황금시대를 그리다”에서 19세기 빈을 조감으로 상세하게 묘사한 구스타프 파이트의 ⟨확장된 빈의 파노라마⟩(1873)를 들여다본다. 수십 채의 공공·문화시설과 고급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선 세기말 빈의 모습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
황제포럼의 조감도를 보시라. 중심에 호프부르크 궁이 자리하고, 그 전면에 500미터 길이로 뻗어나가는 광장이 조성된다. 장쾌한 구성이다. 궁전의 전면에는 황제관저와 영빈관이 마주 보고, 링슈트라세를 건너면 (오늘날의)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마주본다. 젬퍼가 베르사유 궁전을 압도하겠다면서 만들어낸 구상이다. 건물의 양식은 네오바로크로 정했다.
_407쪽에서
저자 : 손세관
건축과 도시를 연구하는 학자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미국 버클리 대학(U. C. Berkeley)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같은 공부를 했다. 1986년부터 중앙대학교에서 가르쳤고, 이제는 명예교수로 있다. 동·서양의 도시와 주거문화에 관해 나름 꾸준히 연구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했던 그런 연구의 부산물이 도시를 그린 지도와 그림에 대한 지식이며, 그게 이 책을 만들어낸 기반이 되었다. 설계 실무도 해, 은평뉴타운 같은 도시 만들기 작업에 두루 참여했고, 연구기관인 건축도시공간연구소(AURI) 소장도 지냈다. 꾸준히 책도 펴냈다. 《도시주거 형성의 역사》(1993) 같은 역사책, 《베네치아, 동서가 공존하는 바다의 도시》(2007) 같은 도시 이야기, 20세기 주거문화를 탐구한 《집의 시대: 시대를 빛낸 집합주택》(2019). 그중 일부다.
목차
머리말: 도시그림, 현실과 동경을 넘나들다
제1화 시에나 |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천상의 도시’
〈좋은 정부의 도시〉, 암브로조 로렌체티, 1339년
제2화 카이펑(開封) | 중국 최고의 그림에 담긴 번성한 중세도시
〈청명상하도〉, 장택단, 12세기 초반
제3화 피렌체 | 시민정신이 만들어낸 르네상스의 성채
〈사슬지도〉, 프란체스코 로셀리, 1490년
제4화 베네치아 | 융성했던 바다의 도시, 이게 최전성기의 모습이다
〈베네치아 조망 그림〉 야코포 데바르바리, 1500년
제5화 암스테르담 | 오로지 시민의 삶을 위해 만든 다채색의 도시
〈암스테르담 지도〉, 발타사르 플로리스, 1625년
제6화 쑤저우(蘇州) | 천하제일의 수향(水鄕), 그 활기찬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다
〈성세자생도〉 일명 〈고소번화도〉, 서양, 1759년
제7화 이스파한 | 이 도시는 세상의 절반과도 안 바꾸겠소
〈이스파한 전경〉, 얀 안소니우스, 1657년
제8화 파리 | 근대도시로 비상하는 18세기 파리를 생생하게 그려내다
〈튀르고 지도〉, 루이 브레테즈, 1739년
제9화 로마 | 공간의 네트워크로 묘사한 영원의 도시
〈놀리 지도〉, 조반니 바티스타 놀리, 1748년
제10화 런던 | 근대의 바빌론, 대영제국 수도의 두 얼굴
〈열기구에서 본 런던〉, 존 헨리 뱅크스, 1851년
제11화 빈 | 육백 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그 황금시대를 그리다
〈확장된 빈의 파노라마〉, 구스타프 파이트, 1873년
제12화 베이징(北京) | 이건 도시가 아니다. 땅 위에 새겨진 거대한 도상이다
〈건륭경성전도〉, 청나라 궁중 화원, 1750년
제13화 교토(京都) | 한쌍의 6폭 병풍에 담은 에도 시대의 교토
〈낙중낙외도〉, 이와시 마티베에, 1615년
제14화 서울 | 12폭 병풍에 담은 19세기 도성 밖 한양의 풍경
〈경기감영도〉, 작자미상, 19세기 초반
제15화 뉴욕 | 격자 틀 속에 펼쳐진 초고밀의 맨해트니즘
〈뉴욕 조감지도〉, 헤르만 볼만, 1962년
맺음말: 유전자가 살아있는 도시가 아름다운 도시다
출판사서평
이 책은 빈을 비롯해 시에나, 카이펑, 피렌체, 베네치아 등 동서양 열다섯 도시의 도시그림을 들여다본다. 언제 누가 왜 그렸는지, 어떤 공력이 들어갔는지, 특징은 무엇인지, 역사적 중요성은 어떤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장소, 길, 건축물, 주택 등과 함께 그림을 그린 시점을 중심으로 도시의 기원과 성장 및 변화를 이야기한다. 저자 손세관 교수는 “이렇게 열다섯 도시를 다 읽고 나면 동서양의 도시문명을 비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면서 이 책은 인류가 이룬 “도시문명의 만화경”이라고 한다.
동서양의 도시와 주거문화에 관심 두고 오랫동안 공부한 저자는 대학원 시절부터 도시그림에 관심 있었다고 한다. 세밀하게 그려진 한 장의 도시그림 속에는 수백 페이지 글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에 도시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이야기해주려면 도시, 건축, 미술, 역사를 두루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많은 이가 가고 싶어 하는 도시들로서, 제각각 장소의 혼이 돌올하다. 그러니 화가들이 앞다투어 이들 도시를 그렸다. 나는 도시마다 그 전체를 그린 그림 한 장을 주인공으로 내걸고 그 밖의 다양한 그림을 조연으로 등장시켜 장소의 혼을 불러들였다. 사진은 되도록 피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도 동원했다.
_009쪽에서
도시그림(都市圖), 도시 전체를 그린 그림
그림이 지도로 인정받으려면 정확한 지리정보를 담아야 한다. 첨단기술이 있는 요즘, 그런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옛 화가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림지도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성행했는데, 당시에 그려진 그림지도는 지도와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지도라고 하기에는 좀 부정확하고,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지리정보가 비교적 충실하고 그랬다.
_006쪽에서
서양에서는 도시를 주로 지도와 그림을 결합한 형식으로 그렸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도시의 물리적 요소를 제 위치에다 그려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게. 이런 그림을 ‘카르토그라프’라고 불렀다. 그림지도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성행했는데 주로 도시를 홍보하려는 목적에서 그렸다. 이런 그림에는 지리정보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꿈과 동경’이라는 귀중한 요소가 담겨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여행이 활발해지고 산업이 발전하는 18세기에 접어들면 관광을 위한 지도가 성행하고, 18세기 중반부터는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러 예술품의 반열까지 오르고 제작 수단도 목판화에서 동판화로 바뀌었다. 발전을 거듭해온 그림지도 기술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인기가 시들해진다. 이 책에서는 15세기에서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그림지도와 함께 ‘관광의 시대’ 그러니까 19세기 이후 만들어진 지도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지도를 “기술과 예술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인류의 빛나는 성취”라고 말한다.
〈튀르고 지도〉. 1739년 세상에 나온 이 지도는 ‘예술품’이라 해도 좋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