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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가 다시 ‘체첸 테러’ 공포에 떨고 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1999년 크고 작은 폭탄테러로 300여명이 희생됐던 악몽이 되살아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23일 오후 9시(한국시간 24일 오전 2시·이하 현지시간) 인질극이 벌어진 직후 러시아 당국은 모스크바 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협상을 시도하고 있으나 별다른 진전 없이 24일 오후 첫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상황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4일 오후 현재 협상에 진전은 없는 상태다.
인질범들은 협상 초기에는 러시아 당국보다는 외국단체나 저명인사들과의 대화를 원했다. 이는 이번 사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체첸 문제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명 가수 출신의 이오시프 코브존 하원의원과 일본계 여성 정치인인 이리나 하카마다 하원의원 등이 협상에 나서 일부 인질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등 러시아 당국자와의 담판을 요구하는 등 입장을 바꿔 러시아 정부와 의회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모스크바 주재 친(親)러시아 체첸 정부의 아드란 마고마도프 대표는 이날 인테르팍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인질범 중 일부가 체첸어가 아닌 코카서스어로 말했다는 목격자들이 있다”며 “인질범 대부분이 체첸인이 아니라 용병인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범인들은 자신들 쪽에서 1명이 부상할 때마다 인질 10명씩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으며 자동화기로 무장한 채 극장 건물에 폭발물을 설치해 놓았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휴대전화로 상황을 전한 한 인질은 체첸 분리주의자들이 ‘매우 자신감에 찬 태도로’ 행동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명령조로 말하고는 있지만 우리를 학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인질범들은 외국인 이슬람교도와 카프카스인들을 먼저 석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대표적 뮤지컬인 ‘노르드 오스트(북동풍)’를 보러온 수십명의 외국인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장에는 해당국 외교관들이 대거 몰려들어 초조한 표정으로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이에 앞서 범인들은 23일 오후 9시경 검은색 승용차에 나눠 타고 도착한 뒤 뮤지컬 2부 시작과 동시에 무대와 객석으로 나눠 진입, 기관단총을 쏘며 순식간에 극장 전체를 장악했다.
문화회관은 모스크바 중심가의 멜니코바 거리 7번지에 있으며 크렘린궁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인질범들이 난입한 직후 10여명의 배우들은 무대 뒤 3층 탈의실로 피신, 옷을 묶어 연결해 창문 밖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독일 및 포르투갈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즉시 크렘린궁에서 주요 안보 장관회의를 소집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26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인질극은 해외에서 계획됐으며 범인들도 해외에서 모스크바로 잠입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상하 양원은 24일 긴급회의를 열고 인질 사태를 논의했다. 세르게이 미로노프 상원의장은 모스크바에 비상사태 선포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원은 “인질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러 한국대사관이 인질 중 한국인은 없다고 밝힌 가운데 상당수의 교민과 유학생들이 사건이 일어난 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을 보았거나 볼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연극대(GITIS)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김원석씨(31)는 “이 뮤지컬이 워낙 유명한 작품이어서 이번주 중에 보러갈 예정이었다”며 안도했다.
○…지난해 9·11 테러 당시와 같이 휴대전화가 이번 사건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뮤지컬 공연 도중 무장괴한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오자 관객들은 급히 휴대전화로 친지들에게 전화해 처음으로 사건 발생을 외부에 알렸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도 휴대전화로 인질범들과 연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질범들은 수백명에 이르는 인질들의 전화통화를 일일이 막지 못해 인질들이 범인들의 눈을 피해 몇차례 몰래 전화를 걸어 극장 안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kimkihy@donga.com·외신종합
▼인질극 주도 모프사르 바라예프는▼
이번 모스크바 인질극을 주도했다고 체첸 반군이 웹사이트 ‘카프카스(kavkaz.org)’를 통해 밝힌 모프사르 바라예프(사진)는 알 카에다와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받아온 반군 지도자 아르비 바라예프의 조카인 것으로 알려졌다.
BBC 인터넷판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러시아군에 의해 사살된 아르비 바라예프는 98년 영국인 통신회사 직원 3명과 뉴질랜드 TV 기자 1명을 납치 살해했다. 당시 그는 영국 통신업체와 몸값 협상을 해 10만달러를 받기로 해놓고서도 인질들을 무참하게 참수했다는 것.
러시아 소식통들은 아르비 바라예프가 ‘아랍의 친구들’이라고 자칭하는 알 카에다로부터 “서방 인질들을 죽여주면 20만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이들을 참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러시아군은 아르비 바라예프를 사살한 뒤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모프산 술레이마노프라는 이름의 조카도 지난해 8월 사살했다고 밝혔으나 이번 인질극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모프사르 바라예프가 모프산 술레이마노프와 동일 인물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모스크바AFPAP연합·최영묵기자 lightee@donga.com">lightee@donga.com
▼왜 극장 택했나▼
왜 하필이면 극장에서?
전문가들은 범인들이 뮤지컬을 공연 중인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인 것은 ‘잊혀진 항쟁’이 되고 있는 체첸사태에 세계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질의 수가 많으면 대규모 불상사를 우려한 러시아 당국이 진압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 그만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
체첸군은 1995년과 1996년에도 체첸 인근 마을의 병원을 점거해 주민과 환자 등 수천명을 인질로 잡고 러시아군과 대치하는 대규모 인질극을 벌였다.
실제로 당시 러시아 정부는 체첸측에 끌려 다니다 뒤늦게 인질구출 작전을 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이로 인해 인명피해만 더 늘었다.
인질범들이 범행 장소로 택한 문화회관에서는 최근 러시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클래식 뮤지컬 ‘노르드오스트’가 공연되고 있다. ‘최초의 순수 러시아 뮤지컬’로 불리는 이 뮤지컬은 지난해 10월 시작된 이래 35만여명의 관객을 모았다. 뮤지컬 제작비로만 400만달러(약 52억원)가 투입됐다.
이 때문에 범인들은 관객이 계속 몰리고 있는 이 극장을 오래 전부터 범행 대상으로 지목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건 당시에도 수십명의 외국인을 포함해 최대 1000여명의 관객이 객석을 메우고 있었다. 인질범은 자동화기와 폭탄으로 무장한 데다 극장 전체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고 밝히고 있어 러시아 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체첸군은 과거에도 인질을 서슴없이 살해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대량 살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