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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이몽학
정여립(1546~1598)
정여립의부친은 첨정 정희증이고 이이의문하에서 학문을닦고,
1567년(명종22년)에진사가되었다.
1,570년(선조2년)에 문과(식년시)에급제하고 1583년에 예조좌랑을거쳐 수찬에올랐다.
처음에는 서인으로 이이와 성혼(成渾)의후원을받았으나,
이이가죽은뒤에 집권세력인 동인편에서서 서인인 이이,성혼,박순(朴淳)등을비판하였다.
서인비판이후 벼슬길을버리고 진안죽도(竹島)에서 서실을짓고 사회강론을열어
사람들을모아 대동계를조직하였다.
보름에한번씩 무술훈련을하는등 호남을중심으로세력을확장해나간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의요청으로 대동계원을이끌고 손죽도로침입한
왜구를무찔렀다.(조선침공하기위해 탐색을나왔던왜구)
이후 황해도안악의 변숭복,박연령,해주의지함두, 완주군운봉면의 의연스님등과왕래하면서
대동계의조직을 전국적으로확대하여나갔다.
1589년 한강이언틈을이용하여 한양으로들어가 신립대장을죽이고 병권을탈취할것이라는
해주안악군수 이축,재령군수 박충간등의고변으로 관련자들이체포되고
관군에게쫓기게되자,아들 정옥남과함께 죽도로피신하였으나,
포위망이좁혀오자 죽도폭포로뛰어내려자살하였다.
서인주도로 사건이조사되면서 이발,백유양,최영경등 동인의주요인물이체포되면서
제거되었으며 숙청된인사는 1,000~2,000여명에달하였다.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송강정철이주도하여 기축옥사를일으켰다.
정여립의대표적사상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민중군경(民重君輕)이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은 천하는모두 공동의소유인데 어찌 주인이따로있으랴..로
군주제의모순점과 평등,분배사상이담겨져있다.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은 충신은 두임금을섬기지않는다"라는말은
성현들의 통론이아니었다"라고 군주제를비판하였다.
여론의다양성을기반으로하는 민주주의사상이담겨져있다.
신분제철폐사상이들어가있다.
민중군경(民重君輕)은 왕위계승에있어서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더욱중요하다.
요(堯)·순(舜)·우(禹)로이어지는 왕위의선양이모범적이라고주장하였다.
이것은 투표선거제도를통한 왕위선출론을담고있다.
조선시대 획기적인사상,사조로서 혁명적인발상이었다.
실제로 대동계는 신분차별을두지않았고,이상주의적성리학사조를중시하는
세상을만들려하였다.(호남동인의사상=이상주의적유교국가+현실주의채택)
이사상은 훗날 실학사상의근간으로 실학자들에의해서 민권사상으로계승되었다.
선조당시
윤두수,윤근수,정철세력의힘이 강해있었을시기였다.
정철은 광해군을왕자로옹립하라는 동인 이산해,유성룡의사주공작에걸려 선조에게고했다가,
1593년10월 서인정권이몰락하고 동인정권이들어서게된다.
그후 명나라강화사절로보내 강화도를거쳐오다가,정여립과 대동계2천여명을죽인원한으로
강화도에서 동인 이산해,유성룡등의정치공작으로 병사처리되고말았다.
이당시 강화도에는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의1만대군,호남의병총대장 김천일의 1천관의병,
김제 금산사주지 처영병력 1천여명이주둔하며 한양을점령하러 한강을거슬러올라가는왜군을
저지시키고있었다.
기축옥사로 1,000~2,000여명이넘는 호남동인세력을잡아죽였기때문에,
살아남으려한다는것은 문제가있는것이었다.
호남의병활동상을보고 선조도 뒤늦게깨달았다는이야기이다.
호남의병들이 주도적으로 왜군을상대한전쟁이
임진,정유재란이다.
전주향교근처에서 의주로피난하는선조어가호송을반대하며일으킨
조원,형대원의반란객기에서 잘보여준다.
조원,형대원은 곡성,남원에서부터 용인전투참전을하라는명령에 불만을품고있던차에,
선조어가호송을해야한다는명령이떨어지자, 전주성으로들어오는 왜군을상대해야한다며
어가호송을반대하며 반란을일으켰다.
반란은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에게 진압되었다.
호남의병10만,충청의병3만은 용인김량장리전투에서 조총소리에놀라 와해되고말았다.
왜군이 경기광주로 포위하며들어오자,의병들은 다시 남하하여
전주성과 남원성으로들어가 수성전에대비하였다.
정명가도를위해 조선을정탐나왔던왜구를물리쳤던 정여립의대동계원들은
전주부윤 남언경의요청으로 출동하여 왜구를토벌하였다.
이때 정여립의대동계는 합천,산청을중심으로하는 조식학파 영남동인들의절대적인지지로 급성장하였고,
선조와서인정권,양광도 동인정권은 여기에 위기의식을느낄수밖에없었다.
1587년 풍신수길은 진안군 동향면 손죽도에서 정여립에게막히자,
진해 제포진의웅천읍성에서 정탐활동을하던첩자들에게 명령을내려
서인정권에줄을대고 해주 안악군수 이축,재령군수 박충간에게 정치공작을벌여
1589년 눈엣가시같은 정여립을제거하고말았다.
동인정권은 양광도(경기동부,충북,경북서북부)를중심으로하는 주리학파가 줄곧 권력을장악해오다가
정여립때이르러 영남을중심으로하는 합천의조식학파연합으로 대동계가확산되자,
동인권력이 호남동부,영남지방으로 옮겨지던시기에 역모고변이올라왔다.
정여립이 왜군지리정찰대를토벌하자 동인권력이 호남동부,영남지방으로 이전되는시기에
발생하였으므로 양광도동인이 동인권력을차지하기위하여 서인을내세워 기축옥사를일으켰고,
왜군첩자들은 정치적상황을 십분활용하였다.
그리고 1592년4월 조선을 본격적으로침공하여 수월하게 한양까지 입성할수가있었다.
정여립의대동계는 보름에한번씩 무술훈련을하는등 민족주의정신을고취시키고있었다.
정여립의대동계는 의병을이끌 리더들이었다.
2천여명의리더들이사라지자 풍신수길은 명나라에 일본사신을보내
예맥각궁숫자를줄이기위해 조선이 물소뿔을 대량수입해간다며 이간질을시켜
조선으로수출하는 물소뿔의양을 한해50개이내로 군수제재를당하고말았다.
일본은 조선이 갈수록강성해지는 여진족과결탁하여 명을침공할거라며
이간질을시켜 성공을거두고 조선을침공한다.
정여립의기축옥사여파로 호남동인,영남동인 2천여명이제거당하고,
호남동인이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대다수가 전멸하고말았다.
또 정묘호란,병자호란때 명나라의요청으로 강홍립을따라출병하여 후금,청나라군과싸우다가 대패하여
호남동인은 세력을잃고만다.
영남의병들은 소극적의병활동으로 전환하였다가 정유재란이후 광해군때 권력을장악한다.
그후 낙동강서안 합천,상주,김천,거창,함양,산청,고령의대북파와
낙동강동안의 밀양,창녕,청도,청송,마산의소북파로분열한다.
대북은 골북,중북,육북으로분열되고,소북은 청소북,탁소북으로분열하다,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게된다.
동인정권시기,
이몽학의난으로 강화시기에 왜군을토벌했다며 김덕령을엮어죽이고나서 선조는 의병들을의심하기시작한다.
대개 의병들은 이천,전주 무군사로분조해와있던 광해군의임명으로 만들어진조직이기때문에,
광해군의힘은 선조를능가하였다.
선조는 왕위를 양위받을것을두려워하여 광해군의전공을 인정해주지않았고,
실제로 인정하지않고 평가절하시켰다.
이는 관군으로까지 확대되는계기가되었고,이순신을견제하기위하여
원균을대항마로 내세웠다.
그바람에 원균은 칠전량에서 대패하여 수많은 조선수군을몰살시키는결과를
초래하고말았다.
그결과로 정유재란으로까지 이어지는 최악의상황으로 전개되고말았다.
이몽학의반란.(이몽학~1596년)
왕족서얼출신으로 홍산현구룡사람이다.
아버지에게쫓겨나 충청,전라도지방을돌아다녔다.
임진왜란때 한현의부하로들어가 그와함께반란을계획하였다.
동갑회를조직하여 의병을모아 홍산(부여),청양,대흥(예산)등을차례로점령하고,
홍성(홍주)까지 장악하였다.
한현은 이몽학과함께 전라충청순안어사 이시발(李時發)휘하에서
호서지방의병의조련을담당하는명령을받았으나,
공주공산성축조와 공산성청야작전전투에불만을품었다.
청야작전으로 공주관민들의 집과논밭의작물을모두태워버리고,
공산성으로들어가서 청야작전을벌이라는 전라충청순안어사 이시발의명령에불복하여
김경창,이구,장후재,김팽종(사노비),승려능운등과함께 홍산(부여)쌍방축에모여
난을일으켰다.
더군다나 관리,토호들의 지나친과세 은결(隱結)의횡포가극심하였다.
은결은 화전과같은것이다.
실제로경작하고있으나 토지대장에서빠진토지를말한다.
부정부패한관리들은 이런 은결토지에도과세하여 횡포가심한데다가,
관민들은 공주공산성축조에끌려가부역을해야만하였다.
게다가 공주인근 공산성주변마을의집과농작물을모두태워없애버리자
관민들의분노는 극에달하였다.
이당시 의병조직개편으로 모든의병들은 김덕령휘하로재편되는시기였다.
1594년4월 충용장에오른 김덕령은 모든의병을 자신의휘하에둔다는
조선정부의개편이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의병조직은 각자 따로놀았다.
전라충청순안어사 이시발은 공주민들을 공산성에모두쓸어넣고 왜군과의전투를치루기로결정하고
강제로들어가게만들자,
한현,이몽학등은 홍산(부여)으로가서 의병700여명을모아 반란을일으켰다.
1594년7월6일 홍산현감 윤영현을붙잡아 관인도장을빼앗은후 임천군으로쳐들어가
군수박진국을포박하였다.
7월7일에는 정산현(청양군 정산)을점령하고,8일에는 청양,9일에는 대흥(예산)을함락시켰다.
이과정에서 강제징세에시달리던 군민들이가세하여 수천명으로늘어났다.
7월10일 홍주성(홍성)으로진격하였다.
홍주목사 홍가신은 시간을벌기위하여 가신이었던,
주관속,이희수,신수를이몽학군에게보내어 거짓으로항복하게하고,
그사이에 인근수령들에게 구원을요청하였다.
충청도순찰사 신경행,최호,박동선,황응성등과함께 홍주성으로가 이몽학군과
대치하였다.
대치하는동안 도원수권율,충청도병마절도사 이시언,중군장 이간등이 홍주로향하였다.
이때 판관 윤계가 10여명을이끌고 야밤에 이몽학군진영으로들어가 총포를쏜다음
이몽학의머리를베어오면 큰상을주겠다고하였다.
김경창,임억명,태척등이 이몽학을살해하고목을베자 이몽학군이
일시에흩어져버리자 관군은추격전을벌여 봉기민들을학살하였다.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명을모병하여 이몽학군과합세하려하였으나,
관군의공격을받고패주하다가잡혀 서울로압송당하여
선조의친국을받고 처형당하였다.
이때 처형된봉기민은 33명에달했으며 지방에서는 100명이처형당했다.
환현의친국과정에서 김덕령,홍계남,최담령,곽재우,고언백등이공모했다는이야기가나와
김덕령은 고문끝에 정강이뼈가부러져 장독으로죽고말았다.
김덕령은 훗날 무고를당했음이밝혀져 신원되었으나,
민란수습과정에서 호서지방에서 반도를색출하면서 민란후에도
조정에대한반감과불만이많아지게되었다.
전세가불리해지자 그의부하 김경창,임억명,태척(太斥)등이 이몽학의목을베어
조정에바치자,
김경창,임억명은 이공으로 1등공신 종2품에해당하는가선대부의작위를받았다.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신경행,임득의는3등공신에책봉되었다.
호서지방의병모집관리(모속관) 한현은서얼출신으로 공주공산성축조와 청야작전을거부하였다.
이당시 조선정부는 도원수권율에의해 공주공산성에서 청야작전을감행할계획을세우고있었다.
의병을모은 이몽학은 공주성민들의집과논밭을모두불태우고
공주성으로들어가라고하자 반발을사게되었다.
모든 백성들의 농작물을태워버리고 공주 공산성에쓸어넣고는 왜군과싸우려하였다.
대포와 조총으로무장한 왜군과의싸움에서 고대시대나있을법한 성곽위주의전투를
벌이려하니 백성들이들어가지않으려하였고 불만이터져나왔다.
이미 행주대첩,진주대첩,진주2차전투등에서 오랜동안써먹은수법이라
왜군에게 통하지않을시기였다.
백성들을 희생양으로삼으려하자 이몽학등이반란을일으켜 공산성주변 읍군을점령하고
대항한사건이었다.
이사건으로 부여(홍산),홍성(홍주),청양,예산(대흥),공주민들은 전멸당하지않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는것이다.
도원수권율은 한현,이몽학의반란으로 공주성청야작전을포기하기에이르른다.
이시기에 충청도에서모집된의병을인수하러갔던 김덕령은 전국의병총대장으로서
자기휘하에넣으러갔다가 되돌아갔다.
나중에 부족해진의병을모으기위해 김덕령은 전국의병총대장으로서 이들을회유하여
자기휘하에넣으려고했던것이아니었나한다.
정여립의기축옥사에대한 앙금을가지고있었던 남명학파 의병장 곽재우도 진주성사수를거부하고
김덕령의죽음과 유격전략을택한이유로 평생 초야에묻혀살아야했던것이다.
곽재우가 사실상 영남의병총대장역활을하고있었고 김덕령과함께 연합작전을펼치던 막역한사이였다.
곽재우는 영창대군을지지하는상소를올리고 초야로들어갔으나,낙동강서안의 대북파에의해
사헌부의감시속에 평생을살아야했다.
(영창대군옹립파는 대북파 정인홍,이이첨,허균,김개시등에의해 대다수제거됨)
전라충청순안어사 이시발,
도원수권율,충청병마절도사 이시언,이간장군등의실책이아니었나판단된다.
이사건으로 선조는 의병들을의심하기시작하였고,
관군으로까지확대되는계기가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을견제하기위하여 원균을전면에내세우게되었던것이다.
김덕령은 자신의휘하에배속되었던 윤근수의종이탈영하자,
그의아비를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빼달라고하자 청탁을거절하였고 그의아비를취조하다
죽게만들었다.
이일로 김덕령은 윤근수의원한을사게된다.
윤근수는 서인의거두 윤두수의친동생이다.
요즘 윤두수의작품이 많이발견되고있다.
그래서 모종의세력에의해 윤두수의업적을 거꾸로 칭송하고나오는세력이있다.
그의작품을 뻥튀기하려는움직임인것이다.
같은성리학자라고하여도
이상주의적성리학자가있고 현실주의적성리학자가있다.
탁상머리에앉아서 입으로만외치는 이상주의적성리학자들때문에
죄없이죽어간 의병들이있었다.
김덕령은 대표적인의병장으로 선조로부터 전국의병총대장이라는 익호장군직함을
공식적으로부여받은인물이었다.
정여립은 이상주의적성리학자였지만 조선을침공하기위하여,
정탐을보냈던왜구들을 진안동향면손죽도에서 대동계원을동원하여 토벌함으로서
외국의군대가쳐들어왔을때는 가차없이 이상주의를버리고 현실주의를택하였다.
조선정부의권력을장악했던 서인,동인/남인계열은 이런점을간과하였다.
왜군이침공했을때는 과감하게 이상주의적성리학은버려야산다.
전쟁중에도 그런사조를들이댄다는것은
그당시 기득권의안일함에젖어서 헤어나지못하고있었다는반증이다.
자기친동생 윤근수의종놈하나가 탈영한것을감추기위해
김덕령과수많은 의병장들을죽여야했는지 되묻고싶어진다.
정치적살인으로이어진 서인세력의집권야욕은
비판받아야마땅할것이다.
송강정철자신도 1591년 이산해의배후책동으로 왕의뜻을거스르고
주색에빠져 국사를그르쳤다는상소가빗발쳐 명주,진주,강계등으로 유배생활을하였다.
그는 강화관찰사로명나라에다녀오다가 강화도에서 1593년에 생을마감하였다.
강화도에는 김천일,처영스님,황진,권율등
고경명휘하부대였던전라의병병력을 김천일이 전라의병총대장 창의사가되어
주둔하면서 한강하구로거슬러올라가는 왜군을막기위해
주둔하고있었다.
1593년10월이전까지는
윤두수,윤근수,정철세력의힘이 강해있었을시기였다.
동인을대변하였던 정여립을죽게만든 송강정철에게 원수를갚기위하여
송강정철을명나라강화사절로보냈다가 강화도를거쳐올때,
동인영수 이산해,유성룡등에의해 병사처리된다.(1593년10월 동인정권들어섬)
기축옥사로 1,000~2,000여명이넘는 호남동인세력을잡아죽였기때문에
송강정철이 살아남는것은문제가있었다.
호남동인의병들의활동상을보고 선조도 뒤늦게 깨달았다는이야기이다.
선조는 신성군의죽음이 임해군에게있다고봐서 광해군을싫어했기때문에
송강정철은 동인영수 이산해,유성룡의사주공작에말려 광해군을옹립하라고 선조에게고했다가
서인정권이몰락하고 1593년10월 동인정권이들어서게된다.
그리고 정철을 명나라강화사신으로다녀오게만들어 강화도에서 병사처리해버리고만다.
호남의병들이 주도적으로 왜군을상대한전쟁이
임진,정유재란이다.
충청순찰사로오른 신경행을주목할필요가있다.
신경행은 한때 김덕령이이끄는전라의병휘하에서 왜군과싸웠다.
병력이없었던 신경행은 금산에서부터 고경명부대를따라다니다가,
고경명이죽고수습된병력이 최경회,황진등에게배속되었다가
진주제2차전투에서 모두죽자 김덕령이이어받아 모든의병이귀속되게된다.
이때 김덕령에게귀속된의병병력과 광주,담양에서모집한병력수가많아
김덕령을따라다니며 지휘를받은것이다.
더군다나 다른지휘권자들은 관료출신들이었으나 김덕령은관료출신이아니어서
의병병력을 자신이지휘하려는 욕심이있었을것으로판단된다.
김덕령은 광해군으로부터 충용장직위와 선조로부터 익호장군직을제수받아
전국의병총대장에올랐다.
전국의병총병력을지휘하는 지휘권자는 김덕령이었고,
모두 호남인들로구성되어있었다.
여기에 빌붙어서 전투에참가한 신경행은실권이없었다.
신경행은 탈영한윤근수의종의아비를취조하다죽이자 너무과격하다며 충청도로돌아간다.
훗날 한현의친국과정에서 신경행은 김덕령을엮어죽게만들었다.
신경행은 이몽학의반란수괴총사로 김덕령을지목하고말았다.
한현,이몽학은 도원수권율,충청병사 이시언등도함께한다고 세력을모았으나,
사실이아닌것이밝혀져 빨리무너지게되는원인이되었다.
조선정부에서는 김덕령에게 모든의병을 김덕령휘하에둔다는
익호장군이라는명령을하달하였으나, 전라도의병이외에는 실질적으로 잘통제가되지않았다.
한현이모집한 의병병력을인수하러 충청도로갔다가 신경행의공작에
말려든것이다.(한현은 의병모집관리 모속관)
한현,이몽학의반란이일어나자 신경행은
김덕령을엮을생각을해냈던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뒤에는 윤근수가있었다.
[출처] 정여립,이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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