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6. 8 .22) 말씀/ 요한 8:31-38
말씀과 함께 살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1 ).
아주 오래 전에 ‘빠삐옹’ 영화를 재미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섬에 갇힌 두 사람이 탈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두 사람의 생각의 확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그냥 체념하면서 섬에 머물러 돼지를 키우면서 목숨을 연명할 것을 선택하고 빠삐옹은 죽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 탈출을 결심합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죽음의 바다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하여 자유를 쟁취합니다. 또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은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걸리면 죽도록 매를 맞고 형량이 늘어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마다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벽에 구멍을 뚫고 결국 자유의 세계로 빠져나옵니다. 옥중에서 스피커 음악을 틀어 감상을 즐기는 장면이나 마지막 하수구에서 나와 옷을 벗고 비를 맞는 장면은 클라이맥스로 인간에게 자유가 어떤 것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127시간이란 영화도 있습니다. 그랜드캐년등반을 하다가 크랙에 떨여져 바위덩어리에 팔 하나가 끼었는데 팔이 빠지지를 않자 주인공은 스스로가 무딘 칼로 자기 팔 하나를 잘라냅니다. 끔찍하게 고통스런 일이지만 죽음에서 자유를 위해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팔을 잃고 치료를 마친 후 다시 등산을 합니다. 아니 팔을 잃고 또 등산을?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만 그것이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이며,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자유롭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2,3장 말씀을 읽다보면 역시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짓고 죽게 되었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처음부터 따 먹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좋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게 되면 죄도 짓지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위험을 무릎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권리인 자유 의지가 박탈당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이는 로봇 같은 존재가 된다면 여러분은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줄을 아시고도 이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자유는 취득 했지만 자유에 대한 책임은 지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유는 원지만 책임은 못 진다면? 결국, 인간은 죄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고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이 떠안으시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어디서입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끌어안고 죄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죄를 짓고 죽을 운명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삼일 후에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인간 스스로 누릴 수 없었던 불완전한 자유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로 완성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참 자유라는 것이 저절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엄청난 죽음의 댓가를 치루고 획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에는 힘이 따릅니다. 힘이 없으면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는 것은 그 힘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힘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돈 처지에 대해서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로마서 7장 25절을 보면 다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를 8장 2절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죄는 인간을 무력하게 묶어놓는 거대한 힘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런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더 큰 힘이 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아멘! 정사와 권세!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 죄의 종노릇할 자들인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33) 지금 우리가 자유로운데 무슨 자유를 논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4) 이들은 당시 실제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노예 된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셨을 때 그 안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자유한 것처럼 살았지만 내면에서 여전히 죄에 억압된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탐욕, 두려움, 불신, 음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겉은 자유한 것 같은데 내면세계는 불안에 쫓기고, 초조하고, 외롭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외적으로는 자유하면서 허무 불안을 느끼며 사는 것은 내면에서 어둠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한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 8:36) 그런데 이 이전에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이 말씀 속에 어떻게 아들이 구체적으로 자유케 할 수 있는가 조건과 방법이 있습니다. ‘내 말에 거하면’입니다. 공동번역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새 번역은 ‘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현대인의 성경은 ‘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단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한순간의 깨달음도 아닙니다. 말씀과 일체가 되어 지속적으로 사는 것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 15:7).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현실문제에서 벗어나려면 말씀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7:33). 세상일로 사람으로 인해서 두려워할 때는 이 말씀을 붙들면 됩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믿고 받으면 두려움에서 해방입니다. 죽음 앞에 처하여 절망하며 슬퍼할 때 주님은 다음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믿으면 생명이고 부활입니다. 세상 욕심에 붙들린 사람들에게는 또 이 말씀을 주십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한 말씀 한 말씀들이 다 은혜스러운데 이런 말씀들이 이루어져서 나를 모든 문제가 각정 근심에서 자유케 하려면 이 말씀들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자유하고 싶다면 몇 번이 묵상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지배를 받고 일상의 삶에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이런 말씀을 체험한적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었지만 청년 시절 철학적 방황과 성적인 정욕, 이단(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끊임없이 갈구했으나, 육신의 정욕과 도덕적 무기력함이라는 사슬에 매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변화시킨 것이 한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날 정원에서 번민하며 울고 있던 어거스틴은 아이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 그는 곁에 있던 성경을 펼쳐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게 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쒸어있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한 구절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빛으로 찔러들어왔을 때, 오랜 세월 그를 죄의 종으로 묶고 있던 정욕의 사슬이 한순간에 끊어졌습니다. 어거스틴은 마음속에 깊은 평안이 임하며 방탕함으로부터 즉각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후 방탕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교회를 수호하며 수많은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성자로 거듭났습니다. 그의 <고백록>은 말씀이 한 인간을 어떻게 완전히 자유케 하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간증서가 되었습니다. 말슴이 그와 함게 살면서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탑 안의 서재에서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의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묵상하던 중, 의가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탑 속의 체험(Turmerlebnis)'이라 부르며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 (John Wesley)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모임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 설명을 듣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strangely warmed)" 체험을 하고, 영국 대부흥 운동을 이끈 감리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조지 뮬러 (George Müller)시편 68편 5절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고아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깊이 묵상하고 심비에 새긴 후, 평생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오직 기도와 말씀 묵상만으로 1만 명이 넘는 고아를 양육하는 기도 응답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또 한 사람 표도르도스트에프스키입니다. 그는 시베리아 유배시절 그가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복음서였는데 수년 동안 반복하여 읽었습니다. 텍스트가 심연의 고통 속에서 살아 숨쉬는 희망이자 인간 구원의 실제로 다가왔고, 이 깊은 말씀 체험은 그의 위대한 문학적 사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체험한 말씀의 경험을 레마(Rhema)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기록된 문자(로고스)가 묵상을 통해 나에게 직접 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레마)으로 전환되는 것을 뜻합니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붙들고 체험했으면 함께 살면 이렇게 전환딜까요? 한 구절 말씀에 오랫동안 몰입하면 그 말씀이 내면의 온갖 잡념과 불안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거룩한 평안과 능력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문고전에서 훼밍에이는 누군가 창작 활동의 비결을 물었을 때 ”여하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널리스트 진파울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쓰는 것은 참 쉽다. 백지를 응시하고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 두 사람의 말을 합쳐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이런 뜻입니다. ”글 쓰기는 참 쉽다. 여하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아 이마에 핏방울이 맺힐 때까지 백지를 노려보기만 하면 된다.“. 여러분, 책상에 앉아있기만 해도, 백지를 노려보기만 해도 창작 글이 나온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계속 노려보며 묵상하면 동거동락 함께 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런 말씀을 떠나지 않고 말씀이 아에 내 안에 살도록 한다면 말씀도 내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며 역사하여 여러분들의 삶에 놀라운 창조역사 변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한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져도 말씀이 내 안에 머물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고 다시 세상 문제에 묶이고 무력해질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어도 지속적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려면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문자가 아닌 살아 꿈틀거리는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아에 말씀과 함께 살아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은 불이 되고, 어떤 말씀은 방망이가 되고, 생명이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 체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말씀 안에서 언제나 나는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김지홍 집사님 대화중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어떤 말씀도 그냥 받지 말고 감동으로 받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였습니다. 매일 주시는 말씀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씀이냐? 그냥 받지 말고 감동으로 받으라! 한번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 받은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말씀을 놓지 않고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도 자유자가 되고, 행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 매일 매일 주시는 큐티 말씀, 주일 말씀 가슴에 레마로 새겨지기까지 붙들고 함께 살며 자유케 하는 능력을 모두 체험하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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