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구입해 읽은 마른늑대는 15편씩 4개의 장(章)에 실려 있는 60편의 시(詩)들을 삼키면서 혀끝이 아리도록 쓰고 매운 지독한 맛들을 음미한 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답니다.
그래도 시를 읽었으니 뭔가 대꾸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유영금 시인에 대한 동문들의 관심이 많이 모아졌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이 작용했다고 봐야겠지요.
그래서 시집을 읽고 나서 동점이라는 지명으로 인해 동문들께 관심을 끌 것같이 보여 지는 시 한 편을 골라 순전히 제 입맛에 맞게 양념도 뿌리며 전자레인지에 넣어 조금 덥히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뿌린 양념으로 인해 선배님의 시가 갖고 있는 맛의 본질을 왜곡 시키는 터무니없는 모양새가 될까 싶어 두렵기도 하지만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제 영혼의 울림이 저급해서 그러한 것일 터이니 쉽게 넘어가 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서 그저 시답잖은 짓이라 여기며 제게 비웃음을 보낼지언정 행여나 원본 시의 본질까지 가벼이 치부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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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불지르다] - 31쪽
계집아이
- 유영금 -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동점리 흙바닥 판잣집 엄지 손톱만한 눈송이들이 숭숭 뚫린 옹이 사이로 톱밥처럼 날아들었다지 천정 모서리에 꼬리를 빠뜨린 채 얼어 죽던 어미 쥐 폐석을 싣고 석포로 떠나는 광 차 울음소리 부뚜막 없는 부엌의 흙기둥은 빈 호롱을 매달고 살았다지 집 나간 사내 돌아오는 날 재떨이에 얻어맞은 호롱이 깨지고 흰 무명 저고리 구둣발에 휘감겨 어둠 속 봉당으로 굴러 떨어질 때 계집아이 늘 고프던 배가 거짓말처럼 멈췄다지
방텃골에 폭설이 여러 해 내리고
피고인 응달 아비 무덤 가
늙은 계집아이
수의(囚衣)를 벗어
즐거운 수의(壽衣)를 짜고 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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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늑대의 "계집아이" 시 읽기-
나팔고개, 그 아래 지쳐 웅크린 어미의 품에 간신히 안긴 것처럼 판잣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요.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동점리 라고 부르는 동네였어요.
신작로에서 학교가 있는 곳까지 버스 한 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이 나있고 길 양옆으로 집들이 길게 늘어선 작은 마을이었답니다.
동네 가운데는 우물이 있었고 기와지붕이 얹힌 집도 있었지만 우물가에 있던 우리 집은 지붕 위에 까만 루핑조차 입히지 못한 판잣집이었어요.
부엌 벽은 대패질도 하지 않은 거친 판자였었는데 나무가 말라 뒤틀리면서 생긴 틈새로 밖이 훤하게 내다보였지요.
옹이가 박혔던 곳에는 황소 눈을 닮은 커다란 구멍이 여기저기 나있기도 했구요.
따스한 봄날, 햇살이 옹이구멍으로 나무막대처럼 스며들 땐 어둠을 밝히는 빛줄기가 참 곱기도 했었지만 겨울엔 그렇지 않았어요.
그 마을엔 눈이 참 많이 왔었는데요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땐 눈송이가 내 엄지손톱만큼이나 했지요.
바람이 매섭게 불어대면 옹이구멍으로 들어오는 눈들이 마치 톱밥처럼 우수수 흩어지며 쏟아져 들어왔어요.
부엌바닥은 다져진 맨흙이었고 부뚜막 같은 건 없었답니다.
먼지와 거미줄이 뒤엉킨 천정 구석진 곳에 커다란 쥐가 꼬리를 늘어뜨린 채 죽어있는 것을 보았어요.
살갗이 전률을 일으키고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 했지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정적 속에서 배고픔을 견디고 있던 내 귀에 기차 소리가 들렸어요.
동네입구 신작로 옆에 뚫린 굴에서부터 마을 저 밑 양조장으로 빙 둘러진 기찻길이 있거든요.
그 맘 때쯤이면 철암에서 석탄이나 폐석을 실은 광차가 나팔고개 옆의 굴을 빠져나오면서 기적을 울렸지요.
굴을 빠져나온 기차는 석포 방향으로 달려가면서 커다란 소리로 손바닥만한 동네 하늘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지고는 했어요.
어둠이 싫었어요. 하지만 우리 집 호롱엔 불을 밝힐 수가 없었지요. 기름통이 텅 비었으니까요.
빈 호롱만 흙벽 기둥에 겨우 매달려 있었어요.
가족을 팽개치고 무책임한 방종을 누리며 천하를 떠돌던 아버지가 어쩌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나는 부엌구석에 쪼그린 채 숨죽여 앉아 있었지요.
아버지가 던진 재떨이가 좁은 방을 빠져나와 애꿎은 호롱만 깨뜨리고 말았어요.
체면과 허례, 위선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아버지는 가족의 배고픔보다는 자신의 겉치장이 언제나 우선이었지요.
날마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눈물짓던 어머니는 그날따라 아끼시던 흰 무명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었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신은 독선의 구둣발에 휘감기다 그만 봉당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흙바닥 봉당에 나뒹구는 그 순간,
아침부터 저녁을 넘길 때까지 밥 한 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해 허기져 있던 내 배고픔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어요.
배고픔을 다 채우고도 남을 놀람과 두려움이 어둠속에서 홍수가 난 것처럼 넘치고 있었으니까요.
참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방텃골 이 골짜기에도 폭설이 여러 해 내렸을 테지요.
내게 한으로 남아있던 아버지의 변변치 못한 무덤가에 왔어요.
그 어린 계집아이도 힘겹게 세월을 살아내다 이렇게 늙어버렸네요.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내 가슴 속에서 원망으로 남아있던 아버지, 이제 다 놓아드립니다.
내 남은 생애,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꽃처럼 살아가다 때가되면 소리없이 스러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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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나 오랜만에 15회 선배님들 카페에 들렀네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동영상 보는듯 허네 그려 동점......
늘 한결같으신 선배님의 모습이 참 반갑습니다. *^_^* 고맙습니다~
너무 생생하고 아린 추억입니다. 괜히 눈물도 맺히고...... ^^
여유로운 감성을 지니신 two star 선배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근데 우리 시인 풍금이는 요즈음 왜 조용한거지?!!!!!!!!!!!!!!!!!
터줏대감 선배님, 안녕하세요~ 풍금선배님께선 한국문단에서 앞줄에 계신 분인걸요. 후배도 풍금선배님의 시들을 만나고 싶답니다.
너무도 선명한 눈에 익은 그림을 보는듯한 착각을 했읍니다. . . . 가슴까지 뭉클~~~~~~^^*
역시나 규본 선배님이시군요.*^_^* 사진으로도 많이 뵈었지요.^^ 반갑습니다.
이른 봄날, 그녀가 지른 불에 화상을 입은, 그런 경험입니다..불지르지 않고 어찌 시어를 토하겠는지요..잉걸이든, 잿불이든 말이지요,,후배님의 붙임글이 그녀의 상처를 다독입니다. 시집을 묶는 일, 그 고통을 감내한 유시인의 첫시집 출간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풍금 선배님이 보내시는 격려의 박수는 강원도 산골 우리들의 그 정겨운 마을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시인의 심중을 누구보다 더 깊고 섬세하게 헤아리는 분이시니까요.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동점리 그 주소지는 어찌 그리 우리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건지... 우리 부모님들 이제 다 가시고 내가 아들 결혼 날 받아놓은 이때에도 늘 마음 한구석에 아픔이기도 하고 힘의 원천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러니 시인들이 계속 나오는것이겠지요.
정겨움 가득하신 피오나 선배님, 아드님의 결혼 날짜를 받아 놓으셨군요. 축하인사 올립니다.
고압 전류에 감전된 기분이랄까? 매우 혼란 스럽다...피눈물 그상처 지금은 아물었는지..............
배고프던 시절의 아픈 추억들이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서도 지인 선배님의 여린 가슴에는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어! 기억에도 생생한 코흘리게 시절 우리동네 이야기를 세월흐른 지금 눈으로 가슴으로 쏘옥~빨려 들어오게 하는 훌륭한 시입니다. 주말에 아들놈하고 영광도서가서 꼭 구입해서 달달 외워볼랍니다.
세상이 각박하게 바뀌어 가도 김대식 선배님의 가슴 속에는 가난했던 유년의 추억이 여전하게 남아있군요. 아픔을 버무린 어둠의 시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시집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