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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기둥”
2016년 4월 6일 수요일 오전 10시 46분
“어머니, 오늘 태복이 엄마 집 다녀오시다 넘어져,
고관절 골절, 무안 제일 병원에 입원하셨다 합니다.
아주 나쁜 상황이라 앞일이 걱정입니다. 관심 가져 주세요.”
“큰 형이 입원시켜 드리고 출근, 접합이 안 돼 수술예정입니다.
그 후가 문제지요. 다시는 걷지 못 할 수도 있으니”
이것은 셋째형이 가족 카톡방에 올린 글이다.
상당히 충격적인 얘기다. 혼자의 몸으로 건강하여도 힘든데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받아야 한다니 어머니가 가엾고 불쌍하다. 큰 형이 119에 신고해서 무안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했다. 어릴 때는 건강하여 칠남매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재미로 사셨을 텐데, 이제 늙고 병들어, 게다가 넘어져 고관절 부러져 수술까지 받아야 하게 생겼으니 마음이 아프다. 셋째형은 수술 후 다시 걷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그런데 카톡 방에 여동생의 문자가 왔다. “엄마 비상. 오늘 수술인데 안 한다고 하고 깁스로 감아놓은 붕대도 다 풀어 버려서 병원에서 비상이라며 연락 왔다고 보호자에게 연락 부탁드린다고 했다.
*난 카톡 방에 글을 올렸다. 2016년 4월 8일 금요일.
“좀 전에 무안제일 병원장님과 통화한 내용입니다.”
# 오전에 모친이 119로 무안제일병원에 와서 603호실에 입원했고, 대퇴부 쪽 고관절이 손상되어 수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뼈 속이 비어있어 노인들은 그 뼈가 잘 부러진다.
고정 안하면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수술이 필요합니다. 수술할 준비 조치 다 되어 있고 금요일에 수술할 예정이다. 수술하면 2~3주 후부터 걷기운동 시킨다. 평소에 잘 걸었던 사람은 수술 후에도 잘 걸을 수 있다. 수술 부위는 새끼손가락정도 째고 수술한다. 깁스는 안하고 입원 기간은 한 달 정도 소요된다. 보호자 없어도 가능하다. 간병인은 하루 1만원이다. 수술비와 병원비 총액은 150만 원 정도 든다. 의료보험 다 적용된다. # (카톡 내용)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병원에 전화해서 이런 정보를 알아냈다. 전화는 061-450-**00 이다. 어머니는 603호실에 계시지만 못 움직이니 바꿔줄 수 없다고 했다. 지난 수요일에 사고 나고 금요일에 수술 예정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저녁때에 간호사와 통화했는데 어머니 수술은 잘 된 것 같다고 했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고 밤 9시쯤 깨어난다고 했다. 낮에 나이 드신 분이 다녀가셨다고 하는데 어머니 다니시는 학다리 중앙교회 성도들인가 생각되었다. 내일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 근무하니 병원 원장님과 통화하면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016년 4월 9일 토요일 오후 5시 18분 카톡 방 # “다들 잘 지내세요? 아침에 어머니와 통화 했는데 마취에서 덜 깨서 그런지 발음이 분명치 않더군요. 이 시간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오늘 셋째형 내려간다는 말씀을 어머니께 드렸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하는 것 같았어요. 함께 소식 나누는 것 어때요?” # 나중문자는 내가 전하는 말에 통 반응이 없는 우리 가족의 무신경에 대해 반응을 기대하고 하는 말이다.
들은 얘기로는 어머니께서 마구 움직이니 손발을 묶어 놓고 수술하고 수술 후에도 손발을 묶어 놓았다고 했다. 좀 전에 통화는 잠시 손을 풀어 주었을 때 통화한 것이다. 셋째형은 주일날에 병원에 찾아 간 모양이다. 내가 주일 오후에 병원과 통화하니 가족들이 다녀갔다고 했다. 주일 오후에 학다리 중앙교회 김 목사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 치매 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치매 증세가 나타나서 간호사도 힘들고 어머니도 힘들다고 전해준다. 먼저 어머니 병문안하고 기도해 주신 것을 감사했다. 알았다 하고 셋째형과 통화하니 형 부부는 오늘 새벽에 출발해서 오전에 병원에서 어머니 뵙고 현재는 이천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약간 기분 좋은 목소리로 형수가 운전하는 형을 대신해서 얘기해 준다.
어머니가 난리쳐서 손발을 묶어 놓았다고 했다. 형수가 의사에게 얘기해서 어머니께 신경안정제를 놓아 달라고 해서 주사했다고 전화 목소리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전한다. 뭐가 그리 좋아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얘기하는지 듣는 나는 얼마나 마음이 아려 왔는지 모른다.
나는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 침상에 홀로 있는 어머니 자신을 볼 때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까.’ 그리고 ‘노인네가 자식들 병원비 들까봐 그냥 퇴원하겠다고 했을 때 강제로 손발을 침대에 묶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모습을 두고 난리쳤다고 얘기하는 형수의 목소리는 나에게 우리가족이 아니어서 그런가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어머니의 손발 묶여 몸부림치는 모습이 떠올라 어서 전화 끊도록 했다. 몹시 씁쓸했다. 지난해 12월에도 여주노인 요양전문 병원에 어머니 의사와 상관없이 입원시킨 일이 있다. 그때 병원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해보니 정신이 멀쩡하고 맑았다. 그래서 내가 책임질 테니 병원에서 퇴원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는 치매 증세가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편집증증세도 있다. 난 그것을 이해한다. 한 가지 얘기하면 했던 얘기 하고 또 하고 하셨다. 또 병원에서나 형 집에서 계시면 일주일 넘기기 어렵다. 얼마나 고향집에 내려가시겠다고 하는지 옆에 있는 사람이 견딜 수 없게 하신다.
그때도 셋째 형이 그것을 견디지 못해, 지난 성탄절에 시골로 모시고 간다고 해서 내가 안 된다 우리 집에 모시고 오라고 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홀로 계시면 여러 모양으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은 어머니를 둘째 형이 자신의 집으로 모셔 오라고 해서 거기로 가셨다. 난 성탄절 오후에 큰아들과 함께 서울 형 집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를 뵙고 건강한 모습, 정겨운 모습을 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거기서 며칠 계시다가 수요일쯤인가 내가 서울 가서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총 사십이일 쯤 계시다가 설 1주일을 앞두고 또 내려가신다고 졸라서 내가 함평 고향집에 모셔다 드렸다. 그러고서 설에 다시 내려가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났었다.
어머니는 늘 그립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한 순간만 눈앞에서 안보여도 그리운 얼굴이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 이제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을 나무 같다. 그가 맺은 열매들을 우리자녀들이 다 따먹지 않았는가? 그 정성과 사랑의 열매를 오늘 우리 형제들이 건강하게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의 그 정성, 그 사랑, 거친 손마디와 허약한 몸을 볼 때마다 더욱 더 짠하게 가슴속 깊이 울려온다. 마음은 당장 내려가고 싶다. 병실을 지키며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다. 고민이다. 어떻게 하지? 사실 4월 13일 수요일은 국회의원 선거일 이어서 쉬는 날이다. 우리는 지난 토요일에 구청에 가서 미리 투표를 마쳤다. 선거일에 어머니 병문안 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머니 손발을 묶어 놓았다고 하지, 정신도 맑지 않고 다른 얘기도 한다고 하지 고민되었다.
300Km의 거리다. 여기 안산에서 무안제일 병원까지 가난한 목회자인 나는 교통비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자주 갈 수 없는 것도 문제다. 4월 12일 화요일에 병원간호사와 전화통화후 안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몸이 회복되고 정신이 맑아진 후에 가서 뵙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시간이 선거일에 나니까 갔다고 오자고 해서 수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수요일이니 저녁 예배 전에 올 것을 계획하고 수요일 새벽을 맞았다. 하필 비가 내린다. 많이 내리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뿌옜고 시야가 매우 짧다.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도 있고 차바퀴에서 튀어 올라오는 물방울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다행인 것은 매송(梅松)에서 고속도로에 들어가니 차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날씨가 좋았더라면 아침부터 고속도로가 차량으로 꽉 찼을 것이다.
내가 오늘 병원에 내려가기를 꺼린 것도 이 비가 한 몫 했다. ‘더욱 조심스럽게 운전하지 뭐. 또 아내와 함께 가서 다른 날 못가는 마음을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서 길을 나선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버스나 대형 트럭 뒤에 가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와이퍼를 빠르게 작동 시켜야 했다. 군산 휴게소를 들렀다. 맑은 공기를 쐬고 손발을 오그리고 펴고 하여 몸 상태를 좋게 하고 다시 130Km 정도 남은 거리를 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병원 찾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또 무안이 읍 소재지니까 기계가 없으면 물어서 라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번국도(國道) 바로 가에 있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방향 감각이 없어서 이곳이 어디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전에 몇 번이고 이곳에 올 때, 지나면서 보았던 곳이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이다. 승강기를 타고 6층 병실을 찾았다. 603호실을 602호실을 통해 들어간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서 그렇게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넓은 병실에 여러 노인 환자분들을 둘러보았다. 어머니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기쁨으로 어머니께 다가갔다.
“네가 어쩐 일이냐?” 하신다. 나를 알아보고 가볍게 반겨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직 정신이 맑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시려고 해서 어머니 등을 받쳐 일으켜 드렸다. 우리가 낮 12시 전에 도착했는데 어머니는 좀 전에 점심을 드셨다고 했다.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어머니 손을 보니 양손 목에 묶은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양손 등을 보니 피멍이 가득 들어 있다. ‘얼마나 세게 묶었으면 저럴까?’ ‘얼마나 묶는 게 싫었으면 저토록 몸부림치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마음속 깊이 아픔이 저려왔다. 가슴이 멍하고 보기조차 싫다. 어머니는 왜 손이 그렇게 피 멍이든지를 잘 모르고 계셨다.
어머니는 알고 계신다. 시골 어머니 친구 분이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셨다. 그런데 단순히 아픈 곳 치료하러 간 것이 아니라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고 말씀 한 것을 내가 들었다. ‘혹시 어머니께서 그런 기억이 있어서 더욱 병원이 싫다고 집에 가신다고 몸부림하지 않으셨을까?’ 자식들에게 병원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수술하시고는 ‘몸 괜찮다’며 집에 가겠다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런 어머니를 저렇게 세게 손발을 묶어서 저 모양을 만들어 놓다니 저런 모습을 보고 뭐가 좋아서 그렇게 생기발랄한 목소리였을까? 나는 그때, 어머니가 난리치니까 묶고 신경안정제 주사를 했다는 소식이, 마치 짐승을 강제로 묶는 모습이 연상되어 슬프고 괴로웠다. 나는 이런 어머니 모습을 보고도 못 본체 했다. 그냥 눈으로 보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멍 들었는지 모르고 계셨다. 넘어질 때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지 나을까? 몸은 전체적으로 더 왜소해졌다.
하지만 정신은 맑아서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어떤 때는 같은 것을 여러 번 말씀 드려야 하고 깜박깜박하기 때문에 다시 상기 시켜야 했다. 내일 모레 구십인 연세에 이만큼도 안하는 어른 계시면 나와 보라고 하라. 난, 그저 어머니 병원에 계신 것이 마음 아프지만 여러 좋은? 친구 환자분들이 옆에 계셔서 서로 얘기 할 수 있는 것이 좋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는 것도 참 좋았다. “어머니! 조금만 더 참고 병원에 계세요. 2~3주 후면 걷기 운동 시키구요. 한 달 지나면 걸어서 집으로 갈 수 있데요. 걱정 말고 편히 계세요.”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소망의 기도를 드렸다. ‘살아계신 것을, 수술이 잘된 것을, 정신이 맑아 우리를 알아보고 함께 얘기 나눌 수 있는 것을, 어머니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한 것을, 감사드리고 수술부위가 잘 아물고 회복되어 걷기도하며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하는 생활되도록. 이곳에 함께 아파서 입원한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서, 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의사와 간호사와 간병인과 환자 가족들을 위해 주께서 함께 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기도드렸다.
어머니는 나보고 파스를 좀 사오라고 하셨다. 수술부위에 통증을 느껴서 그랬다. 하지만 거기에 맞는 치료약과 조치를 병원에서 다 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 말로 어머니의 마음을 안심시켜 드렸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나가서 귤 좀 사오라고 하셨다. 옆에 있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대접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런데, 귤 사러 같이 가기 전에 수술 마치면 원장님이 어머니 수술과정과 그 이후의 상태에 대해 얘기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내는 병실에 있게 하고 나 혼자 가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 마트를 찍고 가려고 하는데 벨이 울렸다. 원장님 수술 마치고 나와서 우리를 찾는다고 간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아내가 전화했다. 곧 바로 1층 원장실에 들어가니 그는 어머니의 수술 전 손상된 고관절과 수술 후 고관절 부분에 기구를 삽입하여 고정시킨 부분의 사진을 보여 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수술 잘 되었고 다른 합병증이 없으니 염려 말라.’고 했다. 친절하고 호탕한 성격의 원장님 설명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두 종류의 어머니 수술 부분의 사진을 원장님께 물어보고, 찍어서 나중에 가족들 카톡 방에 사진을 올렸다.
나는 아내와 차를 타고 읍에 있는 마트를 찾았다. 두유 한 박스와 오렌지 한 봉지를 샀다. 어머니께서 오렌지와 두유를 각 병상마다 나눠 주라고 아내에게 얘기하신다. 저쪽에 계신 할머니께서 여기도 달라고 소리하신다. 즐겁게 나눠드렸다. 아마 어머니도 얻어 드신 것이 있으리라. 또한 어머니께서 수술 전과 후에 손발이 묶여서 몸부림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나가서 점심 먹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병실을 나와서 차로 갔다. "어디 가서 짜장이라도 먹어야지" 하니 집에서 가져온 우유와 사놓은 모시 떡이 있다고 해서 차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좀 전에 사온 오렌지도 까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바나나도 하나 벗겨 먹었다. 이것은 병실에서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다. 누가 줬는데 안 드시고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두신 것이었다.
며칠 되었는지 약간 물렁거렸다.
“어머니 드셔요.” 하니
“나는 안 먹어야. 놔두면 버려야!”
“그래요? 그러면 제가 버릴게요. 제 입에다 버릴게요.” 했다.
그러니까 옆 침대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와 그를 돌보는 따님까지 깔깔대고 웃었다. 나도 싱글벙글 웃어 넘겼다.
간단히 점심 먹고 나서 어머니 만난 얘기와 그 상태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카톡 방에 올렸다. 어머니는 오른쪽 고관절이 부러져 그곳을 수술해서 안전하게 고정하는 과정을 마쳤다.
2016년 4월 13일 수. 오후 12:50 카톡 방
“어머니 계시는 병원에 왔어요. 어머니 만나 보니 정신도 맑고, 상태도 좋고, 마음도 편안한 것 같습니다. 방금 전 점심 드셨어요. 휴대폰도 옆 침상에 계시는 분의 충전기에 연결해서 충전하고 있습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켜 놓았고, 충전도 하고 있으니 어머니와 통화도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전화 하세요. 옆에 분들의 말씀이 어머니께서 외로워하신데요. 오늘 아침에도 다른 환자분들은 가족이 옆에 함께 있는데 어머니는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합니다. 원장님 만나 어머니 수술에 대한 자세한 얘기 들었는데 크게 염려할 것 없다고 합니다. 수술한 부분 잘 아물고 또 근육이 생기도록 2~3주 후부터 걷기 운동 시킨 데요. 함께 기도하고 응원해 주세요.”
서울 둘째 형이 직장에서 카톡 방에 글을 올렸다.
“바쁠 텐데 귀한 시간 어머니께 드렸구나. 집에 들러 보고 와라. 수술도 잘 되고 정신이 맑다하니 다행이구나. 조심해서 올라와라.” 오후 1:21
우리는 오후 두시 되기 전에 어머니께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퇴원하고 싶다고 하신다. 나는 다시 ‘안심하고 병원에 계시면 수술부위 아물고 걸어서 퇴원할 수 있다’고 안정시켜 드렸다. 그래도 옆에서 함께 있으면서 간호하고 돌보지 못해서 죄송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사가지고 간 두유도 주시며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 손발을 매 만졌다. 아직도 손목과 손등에는 자국이 뻘겋게 멍들어 있다. 침상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 조금만 참고 계세요. 수술 잘 되었으니 편안히 의사 얘기 잘 듣고 계세요. 다 잘 치료되고 금방 나을 거예요. 또 올게요.” 맨질맨질한 어머니 맨발을 만지며, “어머니 발하고도 악수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어머니 맨발을 만지니 옆에 그 광경을 보고 환자와 그 가족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님이 재미있네요." 했다. 몇 번이고 어머니께 인사하고, 뒤를 돌아보며 또 인사했다. ‘참 죄송하다.’ ‘옆에서 지켜드리지 못해서.’ 그나마 병원에 계시니 아픈 것에 대해서 염려 놓을 수 있고, 식사도 때마다 나오니 다행이다.
무안 제일병원을 나와서 곧바로 학다리 명암부락, 우리 집으로 가면 8Km의 거리다. 십여 분이면 도착한다. 혹시 집에 큰 형이 계실까봐 아내가 음료라도 사 가지고 가자고 하여 두유 한 박스를 샀다. 옛말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했는가. 어릴 적 우리 동네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로 왁자지껄 했는데 이제는 나이든 사람만 드문드문 눈에 띤다. 골목길에 들어서니 화순이 어머니 오 권사님이 계신다. 나는 그 집 마당으로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 아프고, 치매 증세로 어려운 일 당한 것을 잘 알고 계셨다. 학다리 중앙교회 목사님도 염려하며 기도하고 계시다고 했다. 권사님은 할머니가 다 되셨지만 밝고 건강한 모습이다. 내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고 하며 함께 늙어 간다고 얘기 하신다. 그러면서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보신다. 우리는 점심 먹었다고 말씀드렸다. 누가 우리에게 점심 먹었느냐고 물어 주겠는가. 그 흔한 개구쟁이 친구 없는 어릴 적 동네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친구 어머니는 우리의 어릴 적 꿈 많은 동네를 지키며, 점심까지 챙겨 물어 주셨다.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 집에 조팝꽃도 화사하게 피었다.
“권사님 함께 사진 찍어요.” 내가 청하니 ‘노인네가 무슨 사진?’했다. 나는 즐겁게 어깨동무한 사진을 휴대폰에 담았다. 기분 좋은 시간이다.
나는 골목길 끝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갔다. 대문은 닫혀있다. 인기척은 없고 고요하기만 하다. 대문의 작은 문을 쇠고랑으로 묶인 듯 닫혀있다. 자세히 보니 쇠고랑을 돌려 끼워 저절로 열리지 않게 해두었다. 나는 작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온갖 봄꽃들이 합창하듯 나를 반겨주며 푸른 잔디 마당으로 안내했다. 아직 어머니 좋아하는 목련은 힘겹게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대롱대롱 목련꽃을 달고 있다. 동백꽃은 그 붉은 빛이 바래서 약간 시들였고, 개나리꽃도 아직 피어있다. 또 분홍빛깔 꽃이 가느다란 나무에 더덕더덕 붙어있고, 감나무에는 푸른 잎이 힘차게 뚫고 나와 가을하늘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의 손길을 잃은 상추와 마늘밭은 상추와 풀과 마늘이 섞여서 오지 않는 주인의 손길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집에 들러 간다고 할 때 어머니는 “가서 상추 많이 뜯어가라”고 하셨다. 상추는 돌보는 이, 뜯어 먹는 이가 없어서 대가 웃자라 조금만 더 그냥 놔두면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내에게 작은 화분 삽을 갖다 주어, 대충 상추를 뜯어 비닐봉지에 넣도록 했다. 수요일이기도하고, 고향에 내려온 김에, 충남 보령에 계시는 배 목사님 댁도 들러 가기로 해서 마음이 분주하다. 상추를 대충 뜯어 담고 있는데, 아랫집 오 권사님이 오셨다. 권사님은 내게 “김 목사님 점심이라도 한번 대접해야 하는데 못해 아쉽다.”며 잡은 손에다 무언가를 올려 주신다.
“이것으로 가다가 음료라도 사 먹으라.”며 귀한 마음을 보내주셨다. 마음이 뭉클했다.
“아니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했다. 권사님은 마당가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기도하신다. 나는 기도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기도하자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권사님부부 건강과 그 가정의 자녀 손의 복된 믿음의 삶을 위해 주의 복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이제 고요한 고향집. 적막한 정든 집을 뒤로하고 다시 타향인 안산, 집으로 가야한다. 쓸쓸하고 아쉽다. 어머니께서 여기 집에 계셔야 하는데, 저 멀리 병원에 계시니 우리에게 ‘잘 가라’ 아쉬움으로 전송하시던 어머니의 얼굴도 볼 수 없으니 어쩌랴. 인생은 이렇게 나그네 길을 가나보다. 고향집 마당에 봄꽃이 만발한데 이를 기뻐할 고향집 주인공들은 봄꽃 놀이를 멀리 두고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보고도 그립구나. 정다운 목소리! 벌써 그립구나. 사랑으로 가득한 어머니 얼굴!
2016년 4월 15일 금.고향에 어머니 병문안 다녀와서, 불효자 넷째 아들 김 영 배 -
* 2016년 병원 계시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목포한국병원에 계시다
5월 4일 수요일에 한국병원에서 무안제일병원으로 옮겨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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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머님께서 빠른 쾌유 기원드립니다.
함께 마음 나눠 주시니 감사합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삶과 가정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