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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에 호여, 군경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원동(仙源洞), 덕연(德淵) 등지를 거쳐서 말을 타고 입암 아래 입구인 임리동(林里洞)에 달려 닿았다. 여울 위로 수십 길의 절벽을 이고 있으며 아래로는 거의 백 그루의 늙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이루었다. 돌 잔도(棧道)가 벼랑 따라 나 있고 시냇가 모래는 길을 감싸니, 이 또한 그윽한 맛이 뛰어난 곳이었다. 어찌 빨리 달려 이곳을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산에는 호환(虎患)이 많은데 해가 저물려고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경계심을 잃을까 두려워 억지로 채찍을 가해 골로 들어서니 곧 뽕밭과 삼밭 세계였다. 밭가는 소와 쟁기질 하는 농부가 들 사이사이에 있고 연기 피어나는 띳집이 산간 계곡 골골마다 있었다. 바라보자니 그림 병풍이 은은히 비치는 같아서 눈이 즐거웠다. 내가 두 벗에게 말했다.
“좁고 묶여 길이 없을 것이라 의심했는데, 산이 열리니 홀연히 마을이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동감하였다. 곧 원각리(圓覺里)에 다다라서 하루를 묵었다.
이곳은 이 상사(생원) 명윤(命尹)의 집이었다. 비록 빼어나게 기이한 경관은 없지만 홰나무 그늘과 돌과 너럭바위가 있고 산의 풍취가 골에 가득하여 또한 족히 소풍 나온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한 곳이었다.
주인은 닭을 잡아 밥을 하였다. 나가서 두 아들을 보았다. 나와 같은 티끌세상의 ‘반졸(飯卒)’은 비록 성문(聖門)의 ‘하인(下人: 騶率)’도 바랄 수 없지만, 이 상사의 풍치(風致)는 ‘은자(隱者: 植杖翁)’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혹시 과거시험이 있어서 집 앞에 용을 새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과연 이 상사가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명백(李命伯), 이명계(李命啓)는 이 상사에게 무리로 따르는데, 늙은 유생 이명직(李命稷), 이명석(李命奭), 정시희(鄭時喜), 소년 정석규(鄭碩逵) 모두가 원근의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앞뒤로 와서 뵙거늘 지극히 공손하였다. 이른바 ‘서로 뜻이 통하는 것(傾盖)’이 옛과 같았다.
르 뿌띠 주르날, 1909, 12, 12.
당시 프랑스 신문에는 한국의 호환이 해외뉴스거리였다고 한다.
10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로 느껴진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였고, 모든 무기를 몰수했다.
늑대와 범이 지속적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어떤 마을에는 33명의 주민이 호환을 당하기도 하였다.
르 뿌띠 주르날, 1914, 3, 5
총을 든 사람들이 여인을 구하러 달려왔지만
바구니를 들고 산나물을 채취하러 혹은 밭으로 새참을 들고 간 여인은 이미 숨졌다.
한국에서 1923년에 마지막으로 경주 남산 또는 목포에서 범이 사냥되고
멸종된 것 같다. 먹이사슬의 천적이 없는 멧돼지, 고라니, 노루만 늘고 있다.
먹이가 부족하여 마을로 짐승들이 내려오고 사람을 만나면 공격적이 된다.
다산 선생이 장기에 유배올 때 집집마다 담장에 호랑이 월장 방지용 울타리를 쳤다는 기록도 있다.
초봄에 촌사람이 범에게 잡아 먹혔다는 소문을 들었다. 노복들에게 밤에 나다니지 말도록 일렀다. 다들 말하였다.
“자네는 진짜 촌사람이다. 어찌 겁을 내는가.”
나는 말하였다.
“죽은 이의 뼈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다시 까부는가? 앞에서 낭패를 당한 일이 뒤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촌사람들로 하여금 그 낭패를 듣고 그런 일을 경계토록 하였다. 그 죽음을 보고 그런 일을 경계하도록 한 것이다. 내가 오늘 노복들을 경계시키지 않아서 어찌 거울삼지 않고, 경계하지 않은 자와 더불어 앞뒤로 같은 길에 빠지게 하겠는가? 하물며 저 으르렁거리는 맹수가 특히 한 결 같이 간악할 뿐이다. 흉악하기가 왕망(王莽)과 동탁(董卓) 같고, 포학하기가 예(羿)와 한착(寒浞) 같다. 호시탐탐 노리고 틈새를 타기가 ‘이 고양이’ 의부(義府)이고, 민첩하고 신속하기가 가화(賈禍)의 사도(似道)이다. 몰래 엿보고 숨어서 공격하기에 어디에 엎드려 있는지, 어느 때에 나타날지 모르는 즉, 보통은 임금이 근심하지 않는 일이지만 산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근심거리이다. 모두 호여와 군경 자네들이 앞으로 관직에 나아가면 어전(御前)에서 호환(虎患) 대책을 제기하기에 힘쓸 바이다.”
자리의 객들이 함께
“예, 그렇습니다.”
하고 말하며 자리를 파했다. 이날은 40 리를 갔다.
20일 맑음. 이(李) 진사 명원(命元)은 명계의 형이다. 20년을 기이한 질환으로 정신이 소진되고 살이 빠졌다. 고을에 유부(兪跗), 편작(扁鵲) 같은 명의가 없어서 치료하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그 병에 대한 처방약을 들을까 싶어서 출발할 때에 나를 찾아와 인사하였다. 빛나는 외모가 아낄만하였다. 내가 이치로서 그를 격려하여 말했다.
“자네의 성급한 성품이 굳세고 방정함을 넘고, 그릇된 생각과 지나친 염려가 이런 병을 빚었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마음을 화평하게 하고 심려를 평이하게 하여 근원을 평탄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약 처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이렇게 하여보라.”
이명윤, 이명계, 정석규가 또 더불어 동행하였다. 구미(龜尾), 일견(逸牽) 등의 촌을 거치는데 산을 끼고 들을 띠며 갔다. 길을 따라 물과 돌이 정자가 될 만하고, 대(臺)가 될 만하고, 닿는 곳마다 녹음을 이루었으니, 앉기에 좋고, 한둔(露宿)하기 알맞았다. 혹은 말을 세우고 말뚝으로 하고, 혹은 경치를 가리키며 헤아리고 완상하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서 돌아보았다.
야송 선생이 그린 청송 관동송 수령 380여 년
독송정(獨松亭)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누운 반송(盤松)이 길가에 우뚝하게 서 있는데 굴곡진 것이 교룡(蛟龍) 같고, 헝클어진 솔잎이 노승(老僧) 같았다. 그 그늘에 자리 잡으면 사오십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참으로 김충암(金冲菴)이 이른바
“백성을 목말라 죽게 하는 불볕을 가리려고 하여,
장신을 구부려 바위 골짜기를 멀리 한다.”
는 것이었다.
다만 그 가까운 북쪽 한 가지가 바람과 눈에 눌려 부러져서 도끼로 베어냈다. 굳세고 곧고 높은 절조가 있었다. 옛말에 ‘송백(松柏)은 세한 연후에 잎이 마른다.’고 일컬었지만, 오히려 바깥 사물에 구부러지고, 절조를 빼앗겼으니 진실로 바람과 눈에 의한 고난이었다.
냇가에 돌병풍이 있고 병풍 아래에 반석이 있었다. 층층이 산의 뼈대이고, 물가에 앉을 수 있었다. 힘센 노복이 업고 물을 건너는데 돌 모서리를 딛는 발이 미끄러워 엎어질까 염려되었다.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발이 넘어져도 바로 위험한데 하물며 벼슬길에서야?”
등나무 넝쿨을 잡고 벼랑을 따라 오르는데 걸음이 극히 어려웠다. 위태로운 곳을 거치고 험난한 곳을 건너서 모두가 소나무 아래의 돌 위에 모였는데, 깨끗하고 반질하여 자리를 깔지 않고도 앉았다.
이명계가 말을 잘하여 고을에 이름났다. 매번 호여와 익살을 부리는데, 나는 그 단서를 숨기고 그 기세를 도와서 우스개로 삼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 - 1572)의 <두류록(頭流錄)>에 말했다. ‘항간의 이야기 또한 한 산중의 좋은 일이다.’라고 한 것이 먼저 얻었다고 이를 만 하였다. 정엄은 또한 약속한 사람인데 우항리에서 부터 뒤쫓아 왔다.
충익위(忠翊衛) 이시발(李時發), 임고서원 노비 동천(同千)은 평소에 물고기를 잘 잡기로 이름났다. 모두가 ‘물총새(魚狗)’라고 불렀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서 광주리 가득 은비늘이 파닥거리는 것이 볼만하였다.
진사 이명윤, 이명계 형제가 먼저 가까운 촌에서 밥을 지었다. 회도 치고 국도 끓였으니 그 반찬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상하가 두루 앉아서 마시고 먹고 또 이화주(梨花酒)로 술을 마시니, <<장자(莊子)>>에서 ‘가까운 교외에 가는 자는 세 끼 밥만 가지고 갔다가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부르다’라고 한 그대로였다. 율시 한 머리를 읊었다.
“양산 같은 소나무 밑의 자리 곁에 작은 시내가 있고,
어여쁜 신록이 피는데 여린 고사리와 꽃향기라.
회 아래 뛰는 비늘은 가는 은실이고,
술잔이 전하는 뜬 거품은 잣 술 향기라.
바람 앞에 떨어지는 버드나무 꽃가루 잔설인가 의심되고,
바위 속에 피어난 꽃에 저녁놀 비친다.”
출발에 임하여 ‘물총새’를 다시 불러 상류 어디가 어장인가를 물었다. 이때 버드나무 가지가 처음으로 날리고, 바위 위의 꽃이 만발하였다. 맛있는 산나물을 캐는 여가에 또한 앞길에서 다시 그물을 칠 생각이 있었다. 그러하니 시어(詩語) 그대로였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비둘기가 병아리가 되려 하는데 깃과 나래가 완전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노비 아이에게 놀라서, 떨어지는 물을 날아 건너가는데 겨우 건너편 기슭에 올랐다. 내가 그놈을 가련히 여겨서 옛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앉아서 탄식하여 말하였다.
“태산같이 높은 나무 위에서 태어났지만 오히려 목동의 근심이 있는 것인가? 그 있을 곳을 잃고 스스로 둥지를 뒤엎는 환란을 취했으니, 가히 우리들의 먼 생각을 불러일으킴이 있다. 다만 나는 새가 사람을 의지하여 그 변고에 편안함을 얻었으니, 이른바 두려운 것이 두려워할 수 없고, 두렵지 않은 것이 두려운 것인가?”
정석규가 인사하고 돌아갔다. 좌중의 여러 벗들이 차례로 가는데, 산세가 점차로 좁아지고 바위 모양이 점차로 기이하였다. 이 골짜기를 겨우 지나자 저 골이 또 나오고, 한 굽이가 지나자 또 한 굽이가 나오며, 만상(萬象)이 다시 만상을 낳았다. 눈에 어지러운 것이 침류(枕流)의 괴이한 바위가 아님이 없었고, 또한 귀에 어지러운 것이 모두가 수석(漱石)의 우는 여울이었다. 마디마디 전진하였고, 걸음걸음이 아까웠다.
또 절구 한 머리를 읊었다.
“계곡 따라 저녁이 다할 때까지 객이 참됨을 찾으니,
면면이 기암이고 굽이굽이가 새로워라.
사람이 지령(地靈)이고 이곳에 살면 주인인데,
모름지기 다른 날 다시 객이 되지 말아야 하리.”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안견, 1447)
시냇가 길을 따라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어부가 그 산의 봄이 온 비밀을 걱정하지 않으니 골속의 모든 사람이 혹 나를 어부로 여기는 듯하였다.
-병와 이형상, <입암유산록>
(1700년 음력 4월 19-23일, 4박 5일 동 영천 호연정에서 입암까지 80리 왕복 여행)
뒷태-멋진 사파이어빛 바바리코트
앞태-갈색 가디건
수면 위 1-1.5미터에서 부부가 호시탐탐 사냥에 돌입
순식간에 공대지 미사일 발사
입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다이빙 선수가 울고 간다
싱크로가 아니다. 물총새라고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적의 잠수함을 낚아챈다.
물고기를 물고 수면 위로 치솟는 다이내믹한 모습,
연비어약
일격일어, 특등 사수
일격이어-명 사수
일격삼어(물총새), 일석삼조(임꺽정에 등장하는 돌팔매질 잘 하는 그 누구더라?), 일타삼피(국가대표 사랑방 할머니 고스톱 선수), 일시삼두(임진왜란 영천복성기의 권응수 장군) 모두 동급이다. 달인을 넘어서 거의 신인이다.
아이들 기다리는 벼랑의 흙집으로
아가야 어서 먹고 건강하게 자라야지
이화주 레시피
이화주는 쌀가루로 누룩을 빚기에 정월에 누룩을 빚는다.
배꽃이 필무렵부터 빚는다고 이화주,
빛이 눈처럼 희고 향기로운 술이라서 설향주,
가루로 담는다고 영주지방에서는 가루술
쌀가루로 구멍떡, 서양말로 도너츠를 만든다.
끓는물에 넣어 구멍떡을 익힌다.
쌀누룩 가루와 구멍떡 익힌 것을 잘 섞는다.
바람이 통하게 듬성듬성 단지에 담는다.
요구르트처럼 소화력이 약한 어린이, 노약자, 여행자들이 떠 먹고, 물에 풀어 탁주로 마신다.
고려 이규보부터 청천 신유한의 일본 통신사 기록까지 등장하는 우리나라의 명 탁주.
법고창신, 국순당에서 상품화, 비싸다.
이화주 레시피 어렵지 않으므로 집에서 빚었다가
보리수필 문학기행 때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첫댓글 아따, 기나긴 어링불 님 글 읽다가 된장 데우는 냄비 다 태우겠다. ㅋㅋ
ㅋ 맞다 맞어. 관송님, 된장 냄비 개안았능교?
된장 누룽지라고 아직도 못 드셔보셨능기요?
와우, 물총새 정말 멋지다! 사파이어빛 바바리코트,,, 멋진 표현이예욤. ^^ 즐감 했심다.
언제쯤 이화주 한잔 캬~! 할까요? 어링불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