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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8일 토요일 말씀 묵상♣
성경:스바냐1:14-18(구1307)
제목:여호와의 큰 날
14.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목}***“여호와의 큰 날”
여러분!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1.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입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희생제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특징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열납된다는 특징입니다.
2.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3.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세 가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둘째, 공의를 찾으라.
셋째, 겸손을 찾으라.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찾고 겸손을 찾으면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거나 연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면 죄가 아무리 많아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덮어 심판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제사로 100% 만족되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작은 스바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다 덮어주시고 우리를 피난처에 숨겨주시며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같이 놀라운 복을 받았으므로 우리 가족들 중에 영원한 형벌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까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전도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께 숨김 받은 사람이 된 것을 평생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스바냐1:14-18)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의 운명이 점차 기울어가고 있을 때, 스바냐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4절).
“그 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12절).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일상생활 중에는 온갖 악하고 부정한 일을 행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를 드리고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성전 바깥에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성전에 십일조는 바쳤지만 나머지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사치를 부렸습니다.
거룩한 몸짓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어두운 뒷방에서는 음욕을 불태웠습니다.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죄를 지으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요?
그러한 그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중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모든 죄악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현실에서 목격하게 되는 두 가지 증거 즉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정의는 살아있다는 증거와 하나님은 계시지 않거나 계신다 해도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 이 두 증거를 보고 유다 백성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만 이 세상일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시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누구든지 처음에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시다가 잘 못하면 회초리를 내려치시고 잘 하면 상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꽤 큰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을 줄로 생각했는데 아무런 벌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으로는 꽤 큰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기 쉽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실제적 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반면 “실제적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일에 관심도 없고 개입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바냐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는 그냥 무신론자보다 더 위험하고 또한 더 위선적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는 온갖 탐욕을 불태우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을 합니다. 그 위선은 보는 사람을 역겹게 만듭니다.
무신론자는 회심하면 진실한 신자로 변화될 희망이 있습니다. 반면 실제적 무신론자는 회심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신론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들을 가리켜 12절은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 빗댄 비유입니다. 포도를 으깨어 통에 넣고 이스트를 첨가하여 발효를 시킵니다. 그런 다음 약 20여일이 지나서 액체를 쏟으면 그것이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를 쏟아내고 남겨진 것을 “지게미”라고 합니다(우리나라도 지난 날 가난할 때 이것을 먹고 학교에 가면 얼굴이 빨개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립니다. 쏟아낸 포도주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 주일마다 한 번씩 침전물을 걸러 주어야 합니다. 만일 포도 지게미에 포도주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곰팡이가 생겨서 다 망쳐 버립니다.
절묘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치 포도 지게미에 오랫동안 방치해둔 포도주처럼 죄악에 눌러앉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있으며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손을 뻗어 징벌도 하시고 보상도 하신다고 믿는다면 죄악에 꽈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스바냐 시절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되 그분을 사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죄악에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삼위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을 초월하여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분은 나를 아시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머리카락의 수까지 헤아리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나의 모든 삶이 하늘의 CC TV를 통해 기록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마침내 그분 앞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낱낱이 결산할 날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스바냐 시절의 유다 백성처럼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처럼 우리도 혹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요즈음의 교인들을 가리켜 “종교 소비자”라고 부릅니다.
쇼핑하듯이 교회 다닌다는 것입니다. “쇼핑하듯 교회 다니는 것”과 “교회 쇼핑”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만큼 어떤 교회를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를 다녀 보고 자신에게 가장 맞는 교회를 찾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를 정한 다음에도 여전히 쇼핑하듯 교회에 다니면 “종교 소비자”가 됩니다.
코스트코나 이마트에서 값싸고 좋은 물건 고르듯 교회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취하려는 사람들이 종교 소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좋은 상품을 찾기 위해서 늘 옮겨 다닙니다. 커스트코에서 지마트로, 지마트에서 이마트로, 이마트에서 하이마트로!
군인들도 종교 소비자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세례를 받고 교회를 나오는데도 다른 종교에서 맛있는 간식을 준다고 하면 옮겨다닙니다. 그리고 어떤 종교는 부대 밖에 있기 때문에 바람쇠러 가고 카드 돈을 인출하러 하고 옮겨 다니는 병사들이 있습니다.
종교 소비자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찾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 삶에 관여하신다고 믿는다면 교회에 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몸을 위해서 내가 드릴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내가 희생할 일은 무엇인지를 찾을 것입니다. “종교 소비자”에서 “종교 생산자”로 혹은 “종교 유통자”로 변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교회밖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도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침체된 이유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이 부정한 이득을 보려고 손님을 속인다면 그는 속으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고 하면서 연약한 아내 혹은 자녀에게 폭행을 가한다면 그 사람도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시 돋친 말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질식시킨다면 그 사람도 역시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서 유다 백성의 실제적 무신론이 만들어낸 타락하고 부패하고 오염된 삶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종이호랑이처럼 생각하고 죄악에 뭉개고 앉아 살던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병풍에 그려져 있는 호랑이가 어느 날 진짜 호랑이가 되어 “어흥!”하고 튀어 나오는 것처럼 그들이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께서 어느 날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포도 지게미에 너무 오래 내버려 둔 포도주를 쓸 수 없어서 통째 내다 버리는 것처럼 죄악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던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빈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서기에 너무도 누리는 것이 많았고 너무도 지은 죄가 많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기에는 죄악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달콤한 죄악의 맛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두려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만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고 스바냐가 예언을 했던 시대로부터 약 50년 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 안타까운 역사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실제적 무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저와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지 유다 백성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좋은 신자의 허울을 쓰고 실제로는 죄악을 일삼는 자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마주할 운명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포도 지게미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발효된 포도주를 쏟아내듯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언자 요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욜2:13)
이 대목에서 이렇게 묻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들이 돌아서기까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악행과 파괴와 살해는 어떻게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 선한 사람들이 받는 피해는 또 어찌합니까? 영영 돌아서지 않는 악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적어도 두 가지의 대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들입니다. 교회로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깊어져만 가는 죄악의 현실을 보고 “왜?”라고 묻기를 멈추고 “어떻게?”를 물어야 합니다.
이 땅에 선을 북돋우고 악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를 묻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을 그분의 신비로운 손길로 바로잡으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바울 사도가 한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니다. 인간의 악행으로 인해 깨어진 유리조각을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만들어 내십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옷감을 사용하여 멋진 퀼트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사필귀정”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인과응보”도 진리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결국 갚아 주십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스스로 깨닫고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만들어진 폐허도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십니다.
여러분! 성전를 찾기에 더욱 열심을 내십시다. 전심으로 예배에 참여하여 영혼의 눈이 말갛게 씻기고 영혼의 귀가 예민해지도록 만드십시다.
매일 주님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일을 충실히 하십시다. 믿음의 식구들끼리 함께 모여 영적인 사귐을 나누는 일에 마음을 다하십시다.
그렇게 꾸준히 성전을 찾으면 현실이 우리를 속이려 할지라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 할 때 성전에서 보고 들은 것이 우리를 잡아 줄 것입니다. 포도 지게미에 오래 눌러앉아 쏟아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영혼의 눈을 뜨고 영혼의 귀가 열릴 때 비로소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감사가 우리 안에서 우러나옵니다.
현실에 현혹되어 무신론자가 되거나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면 잘 될 때는 교만해지고 잘 되지 않을 때는 불평불만으로 살게 됩니다.
잘 될 때는 교만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잘 못 될 때는 불평불만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불평불만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감기 바이러스보다 더 큰 해를 끼칩니다.
***{결론}***
여러분!진실로 감사할 수 있을 때는 성전에 들어가 영혼의 눈이 뜨일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남들 다 누리는 호사를 하나도 누리지 못한대 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그분 안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복을 내리기도 하시며 벌을 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로 갚으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비록 현실에 감사의 조건이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 아삽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시73:28)
지진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준비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2년전의 일본 쓰나미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쓰나미가 올 때도 동물들은 미리 알고 도망을 합니다.
갈매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진이 나기 전에 동물들은 피신합니다. 땅 속의 두더지도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고 당합니다. 이 세상의 종말도 일반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압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삽니다.
그래서 종말이 온다고 해도 그렇데 두려워할 일은 아닙니다.
전도서 12:1에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라고 합니다.
금방 가까워질 나의 종말입니다. 우리 눈앞에 다가온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머지않아 가야할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까워진 우리의 종말, 예수님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기쁨으로 기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심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손만대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스바냐1:14-18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나 자신의 현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시고 새로운 결단을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합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