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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호수
“세월이 정말 빠르군요.”
게이조와 나쓰에는 호수가 바라보이는 높은 언덕의 정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호수는 푸른 하늘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뭐가?”
게이조는 아까부터 맞은편 기슭의 단퉁으로 화사하게 물든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산꼭대기는 맥고모자를 쓴 것처럼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 구름이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요코 말이에요, 우리 집에 온 지도 벌써 7년이나 되었어요.”
“음,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게이조 가족은 다함께 스코쓰 호수에 놀러와 있었다.
“엄마!”
멀리서 요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쓰에는 앉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흰 스에터에 검은 반바지를 입은 훤칠하게 키 큰 도오루와 크림색 스웨터에 갈색 스커트 차림의 요코가 나란히 뛰어왔다.
“아빠, 엄마, 이거 모두 우리가 주운 도토리예요.”
요코는 흰 손수건에 싼 것을 게이조와 나쓰에한테 펼쳐 보였다.
“어머, 어쩌면 이렇게 많이 주웠니, 요코?”
“응, 아니에요. 요코 혼자서 주운 게 아니에요. 그렇지, 오빠?”
“응.”
도오루는 어렸을 때부터의 버릇대로 눈꺼풀을 약간 꿈벅이며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요코가 펼쳐 놓은 도토리를 흘끔 보기만 하고는 다시 호수로 눈길을 돌렸다.
“엄마도 같이 주우러 안 갈래요?”
요코는 게이조의 태도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쓰에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눈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날마다 보는 눈이지만 나쓰에는 하루에 한 번은 으레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뭔가 끊임없이 타오르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듯 서글서글한 눈매였다.
“이제 도토리는 그만하면 됐어, 수고했다.”
“요코, 이번에는 단풍잎을 주울까?”
도오루의 키는 게이조의 어깨를 넘었지만, 목소리는 아직 앳된 소년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좋아, 단풍잎을 주어서 서표로 쓸 거야.”
고무공같이 깡충 뛰어오르고 나서 요코는 벌써 저만큼 달려갔다.
“언제나 저래요. 요코는 동작이 여간 민첩하지 않아요.”
나쓰에는 7년 전에 비해 얼굴이나 몸매가 별로 다랄지지 않았다. 다만 말과 태도가 한결 더 침착해졌다.
“그래.”
게이조는 흰 거품을 일으키며 달리는 모터보트를 눈으로 쫓으면서 대답했다. 그는 이마가 7년 전보다 약간 더 벗어지고 살도 좀 올라 있었다.
“당신은 아직도 요코의 아빠가 돼 줄 수 없는 모양이군요.”
게이조는 나쓰에로부터 요코의 아버지답지 않다는 핀잔을 받을 때면,
“그래? 이만하면 충분히 아버지 노릇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하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지금도 요코가 주워온 도토리를 흘끔 보기만 했을 뿐이잖아요?”
“………..”
“학교 문제도.”
나쓰에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래 선착장에서 유람선이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학교 문제도……..”
하고 나쓰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얼라 전에 요코를 가까운 가구라 초등학교에 보내느냐, 아니면 아시히가와에 있는 가쿠게이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보내느냐 하는 문제로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나쓰에는 부속 초등학교에 넣어야 한다고 우겼다.
“굳이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낼 건 없잖소? 가구라 초등학교도 괜찮아.”
“아녜요. 부속 초등학교는 학부형들도 교육에 열성적이고 아이들의 성적도 좋대요.”
“성적이 나쁜 아이가 있으면 안 되나?”
“하지만 교육은 환경이 중요해요. 학부형들이 모두 열심이고 친구들의 성적도 비슷하면 좋은 환경이 될 수 있잖아요?”
나쓰에는 요코의 일이라면 언제나 거침업이 의견을 말했다.
“그래?”
게이조는 미적지근하게 대꾸했다.
“그럼요. 너무 가난한 집 아이들도 다니지 않고…..”
“그래? 그렇다면 역시 가구라 초등학교에 넣는 게 좋겠소.”
게이조는 못 박듯이 말했다.
“어머, 어쩌면 제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세요.”
“나는 말이오, 가난한 집 아이들도, 성적이 좋지 못한 아이들도 함께 다니는 학교 쪽이 훨씬 좋을 것 같소. 여러 부류의 아이들이 있지만 어떤 아이들과도 어울리는 게 중요해.”
“………..”
“능력이 없는 아이는 북돋아 주면 돼요.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는 대개 부잣집 아이보다 자립심이 강해. 그걸 보고 배워야 해요. 몸이 약한 아이에겐 부드럽게 대해주고, 그럼 되잖소?”
“………..”
“어떤 인간도 마다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여기는 게 교육의 근본이오. 인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게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누군가 말한 것이 기억나는군. 여러 부류들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좋잖소? 대학도 소위 명문일수록 엘리트 의식이 강해 남을 얕보는 경향이 있어.”
“알겠어요. 어떤 인간도 마다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지요? 당신은 요코를 무척 소중히 여기시나 보군요.”
게이조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나쓰에가 그때 싸늘하게 웃었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은 요코를 무척 소중히 여기시나 보군요.”
하고 말했을 때, 게이조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말이 막혔다.
요코를 맡아 기르게 된 이후 게이조는 어떻게든 요코를 사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 주지 못했다. 생리적으로 요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사이시의 자식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것이 평생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요코를 안아 줄 수가 없었다.
요코가 아직 세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나쓰에의 무릎위에 앉아 요코는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여러 번 읽어 준 그림책이라 나쓰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요코가,
“손에? 손에가 뭐야?”
하고 물었다.
“뭐? 요코, 글자를 읽을 줄 아니?”
나쓰에는 깜짝 놀라 그림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글자는?”
“노.”
“이건?”
“우.”
“그럼 이건?”
나쓰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후.”
요코는 어느 새 글자를 깨우치고 있었다. 나쓰에는 무의식중에 요코를 힘껏 껴안고 뺨을 비벼대면서 게이조에게 말했다.
“여보, 요코가 글자를 읽을 줄 알아요.”
게이조는 신문으로 시선을 돌린 채 얼굴을 찡그렸다.
“도오루도 루리코도 그 나이에는 아직 글자를 읽지 못했소. 글자는 학교에 입학할 무렵이나 들어간 후에 익혀도 되지 않소?”
“어머.”
“그 편이 정상이라고 봐.”
나쓰에는 그때 어이가 없다는 듯이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당신이란 사람은 참 냉정하군요. 전 당신과 헤어질 수는 있어도 요코와는 이제 절대로 헤어질 수 없어요.”
그 말은 결코 농담 같지 않았다.
게이조는 그때도,
“기특하구나, 요코.”
하고 말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못했다.
요코는 말문도 남달리 일찍 터졌다. 게다가 어린아이 같은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아버지, 다녀오세요.”
“아버지, 어서오세요.”
하고 날마다 나쓰에의 품에 안겨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야무지고 시원시원한 말이 오히려 게이조의 신경에 거슬렸다.
‘오늘은 안아 줘야지.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하고 생각하면서 집에 들어와도 막상 요코를 보면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러나 요코는 그런 게이조의 태도 같은 건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요즘도 여전히 뛰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요코에게는 남의 악의도 선의로 받아들이는 이상한 면이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여관으로 돌아갈까요?”
유람선을 보고 있던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는 현실로 돌아왔다.
“구름이 좀 낀 것 같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파랗던 호수 빛깔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검푸른 빛을 띠었다.
두 사람이 일어서는 것을 본 도오루와 요코가 뛰어왔다.
“아, 무서웠어(힘들었어).”
작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할딱이면서 요코는 나쓰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무서울 정도로 뛰어오면 안 돼.”
나쓰에는 처음에는 요코를 루리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키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차츰 루리코도 이렇게까지 귀여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님 싫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 놀아주지 않아.”
하고 투정을 부리던 루리코의 마지막 말이 때때로 위협이라도 하는 듯이 나쓰에의 가슴을 스쳐갔다. 나쓰에에게는 그보다 더 뼈아픈 말은 없었다. 루리코에 대한 기억은 귀엽다기보다는 가엾다는 표현이 걸맞았다. 그리고 슬프고 저리고 괴로웠다.
그러나 요코에 대해서는 짊어져야 할 책임이 없었다. 남의 손에서 자라야만 하는 요코의 운명이 가엾게 생각될 뿐이었다. 그리고 요코는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선생님 싫어! 엄마도 싫어!”
하고 투정하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도 없었다. 밖에서 놀 때도 요코처럼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는 보지 못했다. 게이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물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개나 고양이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곧잘 이웃집 커다란 개의 등에 올라타고는,
“빨랑빨랑 걸어가, 우리 망아지야.”
하고 노래하는 요코를 봄ㄴ 누구나 미소를 짓게 되곤 했다.
“무서웠으면(힘들었으면) 여관에서 목욕이라도 할까?”
“나, 모터보트 더 타고 싶어요.”
도우루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벌써 두 번이나 타지 않았니?”
“그래도 한 번 더 타고 싶어요.”
도오루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빠, 목욕탕에서 수영하지 않을 거야?”
“응, 그래.”
도오루도 이상하게 요코의 말에는 고분고분 잘 따랐다. 그것이 게이조로서는 어쩐지 못마땅했다. 두 아이는 손을 맞잡고 뛰어갔다. 게이조와 나쓰에도 걷기 시작했다.
“사이가 좋아 다행이에요.”
게이조는 이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무라이는 죽을 고비를 넘긴 모양이야.”
하고 불쑥 말했다.
“네?”
나쓰에는 땅 위로 튀어나온 느릅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자연기흉을 일으킨 모양이야. 어제 다카기가 말하더군. 무척 괴로울 거야. 늑막강에 공기가 마구 들어가 폐를 압박하거든.”
“무서운 일이군요.”
“여기서 택시를 잡아타고 도야까지 문병하러 갈까?”
무라이의 문병을 가자는 말을 듣자 나쓰에는 얼굴이 굳어 버렸다.
“요양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실 작정이세요?”
나쓰에에게 지금은 무라이보다 도오루와 요코가 더 소중했다.
“병실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되잖소? 당신은 한 번쯤 문병하러 가는 게 좋을 텐데.”
게이조는 7년이 지난 지금도 무라이와 나쓰에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옛날 일도 그 당시처럼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때로는 그 당시보다도 더욱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추억을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간직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ㄷ.
무라이 하면 자연스럽게 마쓰사키 유카코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왜 여태 독신으로 있을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독신은 유카코만이 아니었다. 다카기도 다쓰코도 여전히 독신이었다 다쓰코에게는 부모가 물려준 부동한만 해도 상당했다. 그녀에게는 일과 돈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쓰코의 독신 생활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카기도 벌써 서른 여덟이 되는군.’
게이조는 독신인 다카기가 때로 부럽기도 했다.
“무라이 씨의 요양소에는 당신 혼자 다녀오시지 않겠어요? 도오루는 차멀미를 해서 아무래도 무리예요.”
“그래?”
게이조는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했다. ㄷ 자형의 널찍한 여관이었다. 도오루와 요코는 현관 앞 광장에서 돌차기를 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니 석탄불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욕 안 할 거야?”
특별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쓰에가 말했다.
“왜 그러니?”
도오루와 요코가 양쪽에서 나쓰에의 팔에 매달렸다.
“엄만 좀 피곤해.”
나쓰에는 게이조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히 왔군.”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버스에 시달려서 며칠 사이에 몸이 지쳤나 봐요.”
도오루와 요코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게이조에게 이끌려 방에서 나갔다. 나쓰에는 테라스의 창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면서 문득 4,5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아마 도오루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 날, 10월 21일은 요코의 세 번째 생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나쓰에는 요코와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때 도오루는,
“나도 들어갈 테야.”
하며 욕실 유리문을 열었다.
그 후에 일어났던 일이 나쓰에에게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도오루는 호리호리한 몸으로 유리문을 열고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도오루, 넌 방금 아빠와 목욕하지 않았니?”
나쓰에가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또 추워졌는걸 뭐.”
그 무렵의 도오루는 초등학교 2학년이라고는 하지만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 비하면 몸도 마음도 어렸다.
“요코, 오빠가 안아 줄까?”
도오루는 언제나 욕조 안에서 요코를 안고 싶어했다.
“응.”
요코는 서슴없이 귀엽고 가느다란 팔을 도오루의 목에 감았다.
나쓰에는 몸을 씻으면서 두 아이를 미소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애를 낳은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허리가 나쓰에의 하반신을 더욱 풍만하게 보이게 했다. 통통한 허벅지 사이로 비누 거품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코, 넌 오늘부터 세 살이야.”
“이렇게?”
요코는 작은 손가락 세 개를 도오루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오빠는 몇 살이야?”
“여덟 살.”
“요코 혼자서 들어갈 거야.”
욕조 안에는 요코가 혼자 설 수 있도록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좀더 안아 줄게.”
도오루는 좀처럼 요코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요코는 크면 내 색시가 되는 거야.”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씻던 손을 멈췄다.
“응, 오빠 색시가 될게.”
요코는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나쓰에는 이런 추운 달 밤에 자신이 정말 요코를 낳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루리코가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오루의 말에서 나쓰에는 청년이 된 도오루가 또다시 같은 말을 어머니인 자신에게 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쓰에는 한평생 요코가 자신의 친딸로 살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한편 도오루의 아내가 된 요코를 상상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내 색시는 요코야.”
목욕탕에서 나온 도오루는 약간 으스대면서 말했다.
“그래?”
게이조는 듣고 있던 라디오의 스위치를 껐다. 그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
“도오루, 너도 이제 2학년이니까 잘 들어 둬. 요코는 네 여동생이야. 여동생은 절대 색시가 될 수 없어.”
“왜요?”
“그건 크면 알게 돼.”
“싫어요. 요코는 내 색시예요.”
도오루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에잇, 바보 같은 녀석!”
게이조는 도오루를 손으로 힘껏 후려쳤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었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도오루는 깜짝 놀라 멍하니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얻어맞았는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보! 어린애가 한 말이잖아요. 그렇게까지 화를 내실 건 없잖아요?”
나쓰에의 말에 비로소 도오루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오, 이런 일은 아이 때에 분명히 알려 줘야 해요. 도오루, 알겠니? 요코는 여동생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도오루의 색시가 될 수 없어.”
나쓰에는 새파랗게 질린 게이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도오루, 지금 얻어맞은 걸 커서도 잊지 마. 꼭 기억해 둬!”
게이조가 어째서 이렇게 심하게 야단을 치는지 나쓰에는 알 수 없었다. 남매로 자라 만일의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서라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쳤다.
이때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만일 도오루와 요코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리고 요코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게 되지 않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요코를 친딸로 가장해야 해.’
하고 생각했다. 나쓰에는 물론 그의 이런 생각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그 후 4년이 지났구나.’
나쓰에는 여관 목욕탕 안에 들어가 있는 도오루와 요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무라이가 죽을 뻔했다는 말을 게이조에게서 들었을 때도 나쓰에는 단지 놀랐을 뿐이었다. 조금도 절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라이와의 일은 이제 나쓰에에게는 한때 마음의 동요에 지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라진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마음 따위 나쓰에에게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저쪽에서 사랑해 주니까 이쪽에서도 사랑한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특히 무라이에 대한 추억은 루리코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쓰에에게는 혼자 가슴속에 숨겨 두고 언제까지나 못 잊어하는 그리움 같은 것은 없었다.
나쓰에는 뭐니뭐니해도 남편인 게이조가 제일 믿음직스러웠다. 그것은 게이조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다.
넓은 여관은 조용했다. 맞은편 동(棟)에 단체 손님들이 든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나쓰에 일행이 묵고 있는 방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과연 산속의 호수에 온 기분이구나.’
나쓰에는 만족스러웠다. 병원 경영도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요코였다.
“엄마, 이젠 나았어요?”
나쓰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는 얼굴로 뛰어온 요코를 안아 주었다. 목욕을 하고 난 직후여서인지 요코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상쾌했다. 나쓰에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길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이 행복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