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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秦]나라는 동이, 백두민족 [民族]의 나라
1.진(秦)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우선 진나라의 유래부터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진나라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에서 이어지는
중원(=대륙) 최초의 통일 국가 이다.
(이전의 주나라는 최초 통일이 아닌 당시 으뜸가는 제후국을 둔 봉건주의 국가)
당시 주(周)나라가 약화되자 진나라는
주변의 초나라,월나라,제나라 등의
6국 을 모두 정복 중원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통일은 불세출 [不世出]의 군주에게 이루어졌다.
시황제 [始皇帝, 진시황, BC 259 ~ BC 210]라는
인물로서 매우 야심이 많고 인간으로서 민족을 초월해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앉으려 했던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생각을 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의 지배하에 진나라는 당시 그다지 강한 나라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급성장,급기야 중원통일을 이룬다.
->위와 같은 역사인식은 중국(이하 차이나 로 표기) 측에서 제시하는 관점입니다. 우리 참역사를 하는 사람들은 단군조선은 한반도 만주 그리고 중원대륙에 걸쳐 존재했다고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차이나족 식으로 인식하게 되면 단군조선이 설자리가 대단히 제한됩니다. 위와 같이 차이나족의 역사인식으로 보면 단군조선은 대륙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최소한 산동성에는 단군조선이 존재하였음을 차이나족의 사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됩니다.(단군세기, 북부여기에는 단군조선의 대륙지배사실을 알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 나타남)
더구나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이미 우리한테는 낯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강역과 연결시켜 보면 은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거나 직접 통치를 받던 나라로 보아야 단군조선의 대륙강역이 설명이 됩니다.
이렇게 대륙을 다스리던 단군조선에서 진왕정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반란을 일으켜 강성해 졌고 이에 비례하여 단군조선이 밀려나기 시작했다고 인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북부여기에서는 진왕정의 진나라에게 밀려 단군조선의 한(칸) 중의 하나인 진조선이 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재 선생의 기록을 근거로 진과 조선이 연합하여 연을 물리쳤다는 님의 언급과는 어울리지 않음)
따라서 진나라가 중원 대륙을 최초로 통일했다는 표현은 차이나족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중원대륙은 진나라가 아니라 단군조선 때 이미 통일되어 있었고 진왕정이 반란을 일으켜 단군조선이 결정적으로 쇠락하기 전까지는 여러 군소국가가 단군조선의 직할령 내지 자치제후국으로 다스려졌다고 봐야 합니다.(차이나식의 표현인 소위‘춘추전국시대 약 7백년’ 동안도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역에서 군소제후국의 난립으로 봄)
** 관련 사료기록
단군세기
[회대(淮岱)의 춘추제국은 단군조선의 땅이며 춘추제국은 단군조선의 오가(五加)라 하였는데 진시황은 한(韓)이 망하자 초(楚)·위(魏)·조(趙)·연(燕)을 멸하고 산동반도의 제(齊)를 멸망시키고 6국을 통합한다. 이 6국의 주체세력들은 모두 단군겨레의 후손이다]
'태백일사'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47대, BC.295∼238)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시황에게 복종하고 끝내 회복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북부여세가'
癸未二十年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擊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
[계미 22년에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韓)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시황을 박량사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거를 박살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님이 진왕정이 동이족이라는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글을 올리면서 ‘중원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국가가 진나라, 진시황이다’ 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출발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왕 政을 “불세출의 군주, 매우 야심이 많고 인간으로서 민족을 초월해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앉으려 했던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생각을 한 인물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역사서술가로서는 적절치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논거제시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주장을 읽은이가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진나라는 당시 한족들에게는 오랑캐, 그렇다면 진나라는 서융(西戎)? 동이(東夷)?
진나라사람과 은나라 사람은 신앙의 점에서 모두 "현오(玄烏)"를 조상이라고 모신다. 즉, 모두 "연(燕)" 토템을 가진 씨족이다. 그들은 산동반도의 제로일대에 거주했고, 경제적으로는 수렵과 유목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묘장형식으로도 진나라 사람들은 은나라를 승계한다. 이 설은 주로 진나라와 은나라의 조상을 비교하여, 은나라시기에 진나라사람들은 은나라의 한 부락이었는데, 은나라가 망한 후, 그들은 집단으로 주나라의 노예가 되었다고 본다. 이 설이 중요한 이유는 부여 [夫餘]와 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로서 우리 백두민족의 나라이며 그들의 사상은 매우 중요하다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과 하늘이 군장에게 권한을 부여한다'는 말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이다. 생각해 보라. 마치 칸과 같지 않은가? 칸은 하늘의 대리인이 아닌 하늘의 자손으로서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은 천손 [天孫]들의 대표자(군장)이다. 화하족들의 천자 [天子],즉 하늘의 대리자(왕)와는 격이 다르다. 여기서 은나라는 다시 부여와 연결된다. 은나라는 부여와는 매우 많은 공통점이 있다. 전쟁전에 하늘에 기원을 하여 제사를 지내는 점,위의 글과 같이 묘장형식 등이 같다. 부여가 동이족이라는 것에대해서는 아무도 뭐라 할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기에 은=부여=진 은 같은 혈통의 민족으로서 비슷한 형식의 문화를 갖춘 나라라 할수 있겠다. 위의 것들만 보자면 동이쪽 성격에 가깝다 하겠다.
또다른 설로는 아래가 있다.
하한문(何漢文)은 <<영씨 진나라 사람들이 동방에서 기원하고 서방으로 이주한 상황에 대한 초탐>>이라는 글에서, 진나라 사람들은 원래 상고시대의 제로, 회해일대의 씨족부락이었으며, 그들의 발상지는 현재의 산동경내의 내무태산부근이다. 이 영씨부락은 여성을 중심으로 말을 기르고, 사용하는데 뛰어난 부락씨족이었다. 백예(백익)는 이 부락에서 봉지를 받은 첫번째 조상이고, 그는 "소오(동이)의 후예"이고, "판정(版頂, 화하족)의 후예"가 아니었다. 하상시기에, 영씨 진나라 사람들은 산동, 강소북부, 안휘북부, 하남동부 내지 호북동쪽, 하북, 산서, 섬서의 광대한 지구에 퍼져 살았고, 적지 않은 부락국가를 형성했다. 나중에 주나라에 대한 반란이 실패하면서, 서방으로 이주했고, 서방으로 이주해서 현지 토착민들과 오랫동안 잡거하며 살았고, 서융과 별다른 구분이 없는 민족으로 변모했다.
위의 말도 '영씨부락은 여성을 중심으로 말을 기르고...' 라는 글에 집중해야 한다. 화하족은 기본적으로는 부계중심이다. 모계중심적인 것은 남성은 밖으로 사냥을 하고 가축을 기르며 여성은 집안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가장 중요한 일인 육아를 맡는 유목적인 성격을 가진 집단에서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이다. 최소한 진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의 기본적인 토대(부족)를 유지하던 사람들은 화하족이 아님을 알수 있다.
->위에 나열된 내용과 이하에서 제시한 진나라 구성원은 화하족(지나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나라가 있기 이전에 주나라가 있었고, 주나라가 있기 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 동이한겨레의 은나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략 같은 지역에 위 와 같은 나라들이 세워지면서 그 구성원이 새롭게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옛날에 있던 구성원을 다른 곳으로 밀어내고 자기들이 차지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권 즉, 나라이름만 바뀌었지 기본적으로 그 구성원은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병마용갱이 진나라 창업자로 알려진 진왕정의 것이라는 전제하에 거기서 출토된 사람의 상투모양을 보고 진왕정은 동이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병마용갱의 주인이 진왕정이라는 설은 중공당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병마용갱에 대하여 이 분야 관련 전문가라고 하는 차이나족의 건축학자가 밝혀낸 사실입니다. 이 사람은 중공당국의 이러한 발표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진왕정의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그 주장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주장:
2005년 12월 12일 (월) 10:50 쿠키뉴스
[쿠키지구촌=중국] ○…병마용은 진시황의 것인가 하는 내용의 기사가 중국 인민일보에 실리자 학술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이 논란을 일으킨 주인공은 사학자도 아니고 고고학자도 아닌 건축학자 천징왠이다.
올해 69세인 천징왠은 1957년 서안건축공정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후 심양의 어느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그는 거의 강소성과 섬서성에서 공사를 맡았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진시황릉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를 했었고 퇴직 전까지는 강소성 국토국에서 근무했었다.
병마용에 관한 그의 의혹은 병마용과 진시황릉이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전차의 바퀴 간 거리를 똑같이 표준을 정해 통일했는데 갱내 어떤 전차들의 바퀴간 거리가 차이가 나는 점. 진시황시대의 사람들의 옷이 주로 검은 색이었는데 갱내 무사들의 전포가 칼라인 점. 또한 그 시대의 군대는 주로 보병과 기마병이었지만 갱내 군사 진영을 보면 전차부대 위주로 편성된 점 등을 의혹으로 제기했다.
1974년 서안 린퉁현 시양촌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발견한 병마용이 중국사회과학원과 섬서성 문물부서 전문가들의 정확한 판단이 없는 상황에서 짧은 시간 내에 진시황의 순장품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전한다. 천징왠 학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는 문화혁명 시기로 온 중국이 공자를 비판하느라 법석이었다. 문화혁명의 주도자 4인방의 일원 강청이 법가의 전형인 진시황을 이용하여 유교사상을 비판하려 했던 것이다. 병마용이 진시황의 순장품이라고 서둘러 내린 결론은 당시 강청의 정치적인 압력 때문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징왠이 그와 상반대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역사를 뒤집는 모험을 시도하려는 학술계 잡지는 없었다. 1984년 그는 사회과학원을 뛰어 넘어 ‘대자연 탐색’이라는 잡지사에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증거들을 내놓으면서 병마용의 진정한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고 기원전 306년에 죽은 진선태후 라는 글을 발표했다. 진시황보다 거의 100년 먼저 죽은 그는 진소왕의 왕모였다. 진선태후가 죽을 때 신하들을 순장하라고 아들에게 분부했지만 아들은 그렇게 못하고 그대신 병마용을 만들어 드리는 걸로 자신의 효도를 표시했다고 한다. 병마용의 머리모양과 의상이 그 당시 소수민족을 닮았다고 하면 병마용이 초나라 사람인 진선태우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의 글은 나오자마자 바로 여론의 파도에 잠기고 말았다.
칠순에 가까운 나이로 이젠 퇴직했지만 평생 병마용을 떠나지 못한 천징왠 학자는 지금도 병마용에 관한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국민일보 쿠키뉴스제휴사/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 (www.ikoface.com) 윤향란 중국 통신원 (참역사동아리 삼태극, '한겨레참역사'방- 진시왕 관련게시물에서 발췌)
진왕정의 진나라가 차이나족 최초로 ‘황제’국이 된 나라고 그래서 그 초대 임금을 ‘시(始)황제’라고 했다죠. 그 만큼 차이나족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고고학적 증거로 ‘병마용갱’과 발굴 하지도 않고 단지 추정만 하는 소위 ‘진시황릉’을 고고학적 유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망용갱의 경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시황이 그 주인공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초나라의 유물 유적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발굴하지도 않고 추정만 하는 소위‘진시황릉’은 더더욱 진왕정의 것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나라의 구성원은 동이족일지 모르겠으나 진왕정(소위 진시황)이 동이족이라는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한편, 진나라의 구성원과 그 지배세력이 동이족이라는 사료적 근거를 님이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진왕정이 동이한겨레가 아니라는 논거를 저는 소위‘만리장성=진장성)에서 추론해보겠습니다. 당시에는 분명히 단군조선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강역도 중원대륙 중심은 물론 소위 서역이라고 알려진 현재의 감숙성,신장성 일대, 그리고 북경 위의 내몽골, 그 위 현재의 몽골지방과 바이칼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는 증거가 단군세기에 보입니다.
즉, 약수라는 지역이 나오는데 이곳은 현재 대륙의 감숙성 지역을 말함(이것은 실사적으로 증명됨)이고, 욕살색정을 흉노의 조상으로 삼았다는 것, 어느 인물을 지정하여 몽고리한으로 삼았다는 기록, 선비족의 칸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진왕정이 동이족 즉 단군조선의 일원이었다면 굳이 장성을 쌓아서 장성이북의 북방한겨레(대표적으로 흉노)의 침입을 막고자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그렇게 공을 들일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성을 쌓는 행위는 정착농경민족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죠. 물론 농경유목을 함께하던 고구려 등 한민족 국가도 성을 쌓기는 했습니다만, 이것은 진왕정이 쌓았다는 진장성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군사적요충지로써의 기능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이 진장성을 통해서도 진왕정이 동이족이라는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이번에는 진왕정이 동이족이 아니라는 논거를 저는 한민족 고유의 정신문화적 측면에서 찾고자 합니다. 진왕정이 치세기간동안에 한 짓을 보면 우리 한민족 정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님이 즐겨 인용하시는 차이나족 사료에 동이족의 풍습이나 민족성의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동이족은 한마디로 ‘홍익인간’적 문화와 풍습 인간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왕정의 행태는 잔인하기 이를 대 없었다고 하죠. 마치 한나라의 한무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도 설사 그의 먼 조상이 동이족이어서 동이족의 피가 섞여있다고 하더라도 정신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결코 동이족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는 님과의 토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진왕정의 혈통? 아직도 연구가 필요 합니다. 히틀러 자신도 분명 유태인의 피를 갖고 있었지만 수많은 유태인을 죽였습니다. 같은 한민족인 김일성 과 이승만도 그랬었죠. 동서고금을 통해 일단 권력을 잡으면 그 권위를 만들어주고 지켜주는 세력 또한 무시할수 없을테고, 당시의 종교적, 문화적인 이유 또, 그 권력의 속성이 지배자 개인의 눈을 멀게 하는 경우는 우리들이 살면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머나먼 지금 고대를 돌아 볼때 우리가 간과 하기 쉬운것은 바로 당시의 현실 입니다.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금은 때론 지나의 자료를 인용하되, 진정 그들이 피하려 했던것이 무엇인가? 를 찾아 이해 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