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시편 / 시편 37편 34-40절
찬송 / 478장 · 십자가 그늘 밑에
성서 / 잠언 30장 1-9절, 요한계시록 22장 12-15절
말씀 / 주님께 드리는 두 가지 간청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장 8절)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2장 15절)
해남에 가면 두륜산 대흥사가 있습니다. 대흥사로 올라가는 두륜산 골짜기는 동백꽃이 유명하지요. 겨울 끝자락 이른 봄에 피었던 동백꽃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지면, 길바닥이 온통 붉은 꽃 세상으로 변합니다. 그 꽃길 끝 즈음에 대흥사가 나타나지요. 병풍처럼 둘러선 산자락에 기대어 터 잡은 아늑한 절입니다. 이 대흥사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지요. ‘무량수각’ 현판 글씨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데 추사는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추사가 아니라 이광사가 쓴 현판이 걸려 있지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추사는 제주도에 유배를 간 적이 있습니다. 8년 동안 제주도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 가는 중에 대흥사에 머물렀지요. 그런데 그때 대흥사에는 대웅보전에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광사라는 사람이 쓴 글씨였지요. 강진 백련사에 걸린 현판도 그의 글씨입니다. 그런데 이광사가 쓴 글씨는 어딘지 좀 어눌해 보입니다. 뭔지 좀 힘없이 흔들리는 듯하지요. 추사도 이광사의 글씨가 영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주지에게 그 현판을 내리고 대신에 자기가 써 주는 걸 달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광사의 글씨를 내리고 추사의 글씨가 대웅보전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8년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추사가 다시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추사는 주지에게 자기가 쓴 현판을 내리고 다시 이광사가 쓴 것을 올리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광사의 글씨가 대웅보전에 걸린 것입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추사 김정희를 변하게 했겠습니까? 이전에는 형편없다고 치워버렸던 그 글씨를 다시 보게 만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이지요. 가난의 경험입니다. 8년 동안의 제주도 유배 생활이 글씨를 보는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했습니다. 사실 추사는 지금으로 치면 엄친아 중의 엄친아였고,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습니다. 추사의 증조부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남편이었지요. 왕실의 일가로 태어난 데다가 재주도 뛰어났으니, 도무지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왕가에서 경주 김씨가 밀려나고 안동 김씨가 득세하면서 세상이 바뀌었고, 권력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주도 유배에서 겪은 가난과 고통, 외로움과 슬픔은 추사를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글씨도 변하게 했지요. 추사의 글씨는 느끼한 기름기가 빠져서 고졸하고 담백해졌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해졌지요. 이른바 추사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실 추사체는, 얼핏 보면, 뭐 이걸 글씨라고 썼느냐고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규격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서 마치 아이들의 글씨처럼 그림 같기도 하지요. 그렇게 고통과 가난의 경험은 추사의 글씨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추사의 글씨만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글씨를 보는 그의 눈도 바뀌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글씨도 새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광사의 글씨에 배여 있는 결핍의 힘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또 제주도 유배의 고난이 추사의 글씨만 바꾸어 준 게 아닙니다. 가난과 고통은 추사의 입맛과 밥상도 변하게 했습니다. 본래 추사가 어릴 때부터 왕가와 가까워서 입맛도 까탈스러웠습니다. 추사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한양의 부인에게 먹을 걸 보내라고 편지를 했습니다. 뭘 보내라 했을까요? 진장, 민어, 어란, 잣, 호두, 곶감 같은 걸 보내라 재촉했지요. 이거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들이지요. 그런데 말년에 추사는 최고의 밥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요리는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채소다, 그런 얘기지요. 고통과 가난은 추사의 글씨만 담백하게 한 게 아니라 밥상까지 소박하게 했습니다.
추사 얘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굴’이라는 사람의 잠언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아굴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아굴의 어떤 이력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잠언은 단지 그가 야게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사실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이지요. 아굴도 우리네와 다를 게 없는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잠언, 그가 깨친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요? 무슨 특별한 신의 계시라도 받는 걸까요? 아니면 그가 불세출의 천재라서 단박에 깨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의 잠언은 야게의 아들 아굴이 이디엘에게 말하고, 또 이디엘과 우갈에게 말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굴의 잠언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계속 이어지고 계속 전승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굴이 깨달은 지혜, 아굴의 잠언은 그렇게 사람을 통해 전승된 인생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아굴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무슨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일까요? 인생의 운명과 미래를 내다본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굴이 깨달은 것은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둔한 짐승이며, 나에게는 사람의 총명이 없다.” 아굴이 말한 잠언의 첫마디입니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존재다, 이것이 그의 절절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다, 나에게는 지혜가 없다는 게 무슨 지혜의 깨달음일까요?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이미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지혜로부터 멀다는 말입니다. 역설이지요. 내가 어리석다는 걸 아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아굴은 지혜를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지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알고 싶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알게 된 것은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인간은 한 줌 흙이며 하늘 아래 사는 찰나의 존재일 뿐이고, 인간이 잡은 것은 손에 쥔 바람처럼 헛될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아굴은 하늘에 오른 사람이 누구냐고, 바람을 움켜쥔 사람이 있느냐고 탄식합니다. 아굴은 자신이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그때, 그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내가 창조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자시다, 이것이 아굴의 깨달음입니다. 그는 내게 생명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모든 인생과 역사와 만물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굴은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굴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본문에서, 아굴은 하나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립니다. 두 가지 간절한 기도입니다. 온 마음으로 바라고 구하는 기도지요. 아굴은 하나님께 자신의 간청을 이루어 달라고, 죽기 전에 이루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죽기까지 드리는 기도, 필생의 기도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모든 날 모든 곳에서 드리는 기도지요.
무슨 기도일까요? 필생의 기도라면 참으로 소중한 것일 텐데, 아굴은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아굴의 첫 간청은 허위와 거짓말을 자신에게서 멀리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虛僞’는 무엇입니까? 거짓이지요.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꾸미고 조작하는 것이지요. 날조하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왜 필생의 기도의 첫 간청이 ‘허위와 거짓말’로부터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일까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허위와 거짓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허위와 거짓은 다른 사람을 해칩니다. 그뿐 아니지요. 허위와 거짓말은 한 나라를 흔들어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존재 자체가 허위와 거짓말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어둡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말씀을 받아 읽었지요.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절정에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새 예루살렘의 비전도 열어 보여줍니다.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곳이지요. 그런데 요한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5절입니다.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서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가 눈에 띄지요. 그 앞에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도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라고 말합니다.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겠습니까? 거짓을 능력으로 아는 자들이지요. 거짓을 오히려 자랑하고 능사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권력을 위해서, 자기들의 탐욕을 위해서 허위와 거짓을 명예로 삼은 자들입니다.
어쩌면 아굴이 살아가는 세상은 허위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굴은 그 거짓과 허위가 저 힘 있는 권력자들에게만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 허위와 거짓은 시나브로 사람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서 어느 틈에 내 곁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허위와 거짓이 일상화된 사람들, 허위와 거짓이 능사가 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허위와 거짓을 멀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허위와 거짓을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아굴은 필생의 기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허위와 거짓을 나에게서 멀리하여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아굴의 두 번째 기도는 무엇일까요?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바로 이 기도입니다. 아굴은 자신이 이렇게 기도드리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지요. 사람은, 아니, 나는 배가 부르면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굴은 자신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탐욕을 이겨낼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굴은 자신의 탐욕을 끊임없이 내려놓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굴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깨달은 지혜였지요. 그래서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저 멀리 저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어느새 가까이 와 내 살갗에 스멀거리는 ‘허위와 거짓’으로부터 멀리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신을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양식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굴은 이 깨달음과 이 기도를 이디엘에게 말하고 이디엘과 우갈에게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혜의 기도는 마침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아굴의 기도는 어쩌면, 아마도, 예수님에게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기록으로 계속 전해 내려왔으니, 당연히 예수님도 이 기도를 아셨겠지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는 아굴의 기도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특히 주기도문의 우리 기원은, 크게 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와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켜 달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의 기도’는 아굴의 기도가 싹트고 자라서 꽃을 피운 향기로운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아굴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 아굴의 깨달음이 우리의 깨달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바울의 지혜였던 것처럼, 아굴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지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굴은 또한 자신이 사는 날 동안 허위와 거짓으로부터 멀리하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고,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사는 모든 날 동안 허위와 거짓으로부터 멀리하기를 구하고, 날마다 필요한 양식만을 기도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허위와 거짓을 멀리하고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