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새와 우는 새
우리는 새 소리를 우는 소리로 듣고, 서양 사람들은 노래하는 소리로 듣는다. 우리는 ‘새가 운다.’고 하고, 서양인은 ‘새가 노래한다.(Birds sing)’고 표현한다. 똑같은 새인데 한국의 새는 모두 울고, 미국의 새는 노래할 리가 없다. 새 소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달리 들을 뿐이다.
봄이면 산비둘기가 ‘구구 구구’하는 연속음을 내면서 울어댄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나를 업고 그 산비둘기 울음소리에 같이 장단을 맞추며 읊으시기를, ‘구국 구국, 계집 죽고 자식 죽고, 나 혼자 어이 살고.’라 하시었다. 비둘기가 그렇게 운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생각했는데, 커서 생각해 보니 그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잦은 외침과 변란과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아온 이 땅의 백성들이기에, 묵직한 소리로 구슬피 울어대는 산비둘기 소리가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아내를 잃고, 병자호란 때 자식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었겠는가?
꾀꼬리 울음소리를 우리는 그냥 ‘꾀꼴 꾀꼴’로 의성화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호오 호께꼬’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꾀꼬리는 첫머리에 ‘호오’하고 약간 길게 빼는 소리를 내므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자세하게 들은 것 같은데,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대체로 사물에 대하여 대범한데 비하여, 일본인은 만사에 조밀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소쩍새는 올빼밋과에 속하는 성질이 사나운 야행성 새인데, 그 울음소리를 ‘소쩍 소쩍’ 혹은 ‘솥적다 솥적다’로 듣는다. 민간에서는 이렇게 우는 이유를 풍년이 들어 곡식이 넘쳐나 밥을 할 때 오히려 ‘솥이 적다.’고 하여 그리 운다고 한다. 풍년이 들라는 민중의 애절한 바람이 그 속에 녹아 있다.
시인 장만영은 ‘아가’를 잃은 슬픔을 ‘뻐꾹새 감상(感傷)’이란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봄을 따라 아가가 갔다. 조그만 아가의 관이 나가던 날은 비가 무섭게 퍼부었다.
나는 몹시 슬펐다.
나는 여행을 떠났다. 산골 온천에서 달포를 있었다.
밤마다 뻐꾹새가 울었다. 나는 그때 술을 배웠다.
뻐꾹새 울음을 들으며 눈물짓노라.
뻐꾹새는 서러운 새 서러운 목소리로 울음 우네.
뻐꾹새는 밤새 뉘를 찾아 저리 우누?
아빠를 모르고/ 엄마를 모르고
서얼고 쩌러게 살다가 가버린 아가,
아가는 죽어서 뻐꾹새가 되었느뇨.
뻐꾹새가 되어 뻐꾹 뻐꾹
아빠를 찾아 엄마를 찾아 저리 우느뇨.
(이하 생략)
보통 사람의 귀에는 그냥 ‘뻐꾹 뻐꾹’ 우는 뻐꾸기 소리도, 귀여운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귀에는 ‘아빠를 찾아 엄마를 찾아’ 애달프게 우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해방의 감격을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라고 노래했다. ‘멍멍’이나 ‘꼬끼요’ 소리가 해방을 맞은 기쁜 사람의 귀에는 ‘만세’로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새 울음소리 중에서 가장 애절하게 들려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아마도 접동새 소리일 것이다. 두우, 망제혼, 두견이, 귀촉도, 불여귀, 자규 등의 이칭도 많은 이 새는, 밤새도록 그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울어대는데, 그렇게 피나도록 우는 데는 무슨 애틋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옛 사람들은, 이를 촉나라 ‘망제’의 억울한 사연에 결부시켰다.
소쩍새 울음소리에도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부잣집이었는데도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밥 주기가 싫어서, 아주 작은 솥에다가 밥을 조금만 짓게 했다. 밥을 먹지 못한 며느리는 결국 굶어죽어 새가 되었는데, 밤마다 ‘솥이 적다’ 하면서 울었다. 그것이 마치 ‘솥쩍’ 하고 우는 것처럼 들린다하여 소쩍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반대로 풍년이 들어 양식이 넘쳐나 작은 솥으로는 밥을 다할 수 없어, 솥이 적다고 ‘솥 적다’고 운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해에 ‘솥적다’고 울면 풍년이 들고, ‘소쩍’으로 울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두 이야기가 겉으로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 같으나 실상 그 내용은 한가지다. 앞의 이야기나 뒤의 이야기 모두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애절한 기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소쩍새가 흉풍을 가릴 능력을 갖고 있겠는가? 사람이 풍년 들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듣고 싶을 뿐이다.
촉나라 임금 망제(望帝)는 어느 날 물에 빠져 떠내려 오는 별령이라는 사람을 구해 주었다. 천성이 착한 어린 망제는 그를 궁으로 데려와, 이는 하늘이 나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준 것이라 생각하고,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별령은 예쁜 자기의 딸을 망제에게 바쳐, 임금으로 하여금 정사는 버려둔 채 여색에 빠지게끔 한 뒤에, 여러 대신들과 모의하여 망제를 내어 쫓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난 망제는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으며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이렇게 애절한 사연이 담긴 울음소리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시의 소재로 삼았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남긴 것도 자규시(子規詩)다.
한 맺힌 새 한 마리 궁중에서 쫓겨나와,
짝 잃은 외그림자 푸른 산 속 헤매누나.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쌓인 한은 끝이 없네.
두견새 울음 끊긴 새벽 멧부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한 봄 골짝엔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
어쩌다 수심 많은 이내 귀만 홀로 밝은고!
김소월은 또 다른 접동새 전설을 바탕으로 ‘접동새’라는 시를 썼다.
옛날 어느 곳에 10남매가 부모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의붓어미가 들어왔는데, 의붓어미는 아이들을 심하게 구박하였다. 큰누이가 나이가 들자 이웃 부자 집 도령과 혼약하여 많은 예물을 받게 되었다. 이를 시기한 의붓어미가 그녀를 친모가 쓰던 장롱에 가두었다가 끝내는 불에 태워 죽였다.
동생들이 슬퍼하며 타고 남은 재를 헤치자, 거기서 접동새 한 마리가 날아올라 갔다. 죽은 누이가 접동새로 화한 것이다. 관가에서 이를 알고 의붓어미를 잡아다 불에 태워 죽였는데, 재 속에서 까마귀가 나왔다. 접동새는 동생들이 보고 싶었지만, 까마귀가 무서워 밤에만 와서 울었다.
이 애틋한 사연을 담아 소월은 이렇게 읊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아닌 밤중에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소월은 접동새 울음소리를, 억울하게 죽은 누나가 동생들이 못내 보고파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하며 피나게 우는 소리로 듣고 있다.
새가 우는 것은 자기의 위치를 알리거나 암컷을 부르기 위해 울 뿐이다.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다. 어찌 접동새가, ‘다시 돌아가고 싶다[不如歸]’고 울겠으며, ‘아우래비 접동’으로 소리 내어 울겠는가? 사람의 귀가 그렇게 들었을 뿐이다. 새가 그렇게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울고 싶은 것이다.
슬프면 슬프게 들리고 기쁘면 기쁘게 들리는 것이다.
이제 사람 사는 세상에 조금이나마 욕심이 줄어들어 접동새가 그렇게 울어야 할 사연이 줄어들고, 우리에게도 통일과 평화가 하루 빨리 찾아와, 비둘기가 ‘계집 죽고 자식 죽는’ 소리로 울지 않고, ‘구국(救國) 구국(救國),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즐거이 함께 사세’로 들리는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 또 소쩍새가 ‘소쩍’으로 울지 않고 ‘솥적다’로만 울고, 나아가 우리에게도 새는 울지 않고 노래하는 그런 기쁜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첫댓글 산행을 하다가 접동새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이상야릇한 소리로 울더군요. 제 귀에는 아우래비로 들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참 희안하게 운다는 느낌이 컸습니다. 신기하기도 했구요. 조상들은 새소리에 자신들의 소원과 푸념을 담아 재해석을 한 듯합니다. 보는 대로 보이고 듣는 대로 들린다는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