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료공장
한때 출산율이 정말 높을 때는 인구의 지나친 증가를 막기 위한 표어가 많았다. 나라는 가난한데 아이들은 많이 태어나니 어쩔 수 없었던 시대의 일이다. 그때 보던 표어 중 가장 많이 기억나는 것이 “아들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심지어 이런 자극적인 것들도 공개적으로 걸려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엉망으로 장난치는 애들을 향해 말했었다. 장난에 제일 적극적이었던 아이 중 하나가 나였으니 내게 한 말이었을까 생각도 든다.
“귀한 쌀이나 축내고 장난만 치는 네놈들 보면 이제 표어를 바꿔야겠다.” “인간이 아닌 거 집집마다 낳지 말고 한 집 걸러 하나만 제대로 된 거 낳자.” 아이들이 모두 “와~”하고 웃는데, 나는 심각해진 적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걸러져야 하는 한 집’ ‘걸러져야 하는 아이’였던 셈이 아닐까 싶었다. 선생님이 유난히 나를 째려보며 그 말을 한 것 같아서 내가 장난을 심하게 한 원죄는 까맣게 잊고 당찮은 신세 한탄으로 돌변한 셈이었다.
‘정말 그랬기도 했겠다’, ‘도대체 난 왜 태어난 것일까?’ 심각하게 눈물로 밤새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걸러지기는커녕 무럭무럭 쓸데없이 자라서, 결혼도 하고 아이를 둘을 낳았다. 그 당시 선생님 일갈로 보면 정말 국가적 비극을 저지른 셈이다. 그나마 바뀐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는 국민적 소임을 했다. 손자 손녀도 넷이니 ‘한 집당 둘’이라는 당시의 표어에도 적당히 맞고, 오늘의 시대에도 ‘그다지 모자람이 없는 모범’이 본의 아니게 됐다.
그런데 선생님의 당시 악담이 이제 사회의 현실이 되었다. 인간을 자를 수가 없으니 출산율 1 이하는 한 집 걸러 하나씩 낳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건 정말 큰 일이다. 경제가 쭈그러들어 가는 기본 조건을 갖춘 셈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출산정책에만 있지는 않다. 우리 사회 모두가 나서서 “내게 유리한 내 주장”만 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 정말 큰 그림에서 모든 요소를 감안해서 각계각층이 양보하고 나라를 위한 합의로 “웬만하면 살기 편한 세상 만들기”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임신과 출산은 하느님이 생명을 주시는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일인데 어찌 한두 가지의 유인책으로 될 일인가? 삶 자체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값어치 있다는 생각이 많아져야 출산도 늘어날 일이다. 모든 생명은 값지고 누구나 평등하며 서로 돕고 공정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야 출산율도 높아질 일이다.
회사 임원 중 하나가 한참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내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저보고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자주 야단치셨어요. 저한테 밥 먹고 싸는 것만 잘하니 걸어 다니는 비료공장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날은 모두가 이 이야기를 듣고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쓸모없는 인간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의 가치를 갖고 태어나고 쓸모를 갖고 태어나기 마련이다. 게을러서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 게으른 사람의 무거운 엉덩이가 관찰과 안정에는 적임인 법이다. 반대로 너무 설쳐서 쓸모가 없다고 하지만, 설치는 사람이 있어야 일이 만들어진다.
모두 다 하느님이 각자 자리에 맞게 쓰임새를 줘서 만들어주신 생명이다. 그걸 사람이 나서서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만들어가려 하는 것도 문제인데 사람의 값어치를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고 차별까지 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사회가 복잡하고 모든 기능도 일도 다양해지니 여러 가지 능력과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모두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값진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회로서의 편안한 모습이 얼마나 갖춰지는 것인가는 개인의 격차와 무관한 일이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우리 모두가 나서서 고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