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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일용할 양식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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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일용할 양식만
어제 자선과 단식과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으로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오늘은
그중에서 기도에 대해 따로 가르침을 더 주시는데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부분에 오늘은 저의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 청하고 더 청하지는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면서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꼭 하루치만 청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셨겠지만
오늘 제게는 그렇게 들렸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루치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 그 뜻과 같을 겁니다.
언젠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로또와 주식에 대해 얘기가 나왔는데
요즘 젊은이들답게 주식을 하는 것을 문제로 생각지 않았고
제 생각에 그런 것에 부정적일 거라고 생각한 친구마저
주식은 하지 않아도 로또는 매주 산다는 거였고 그래서
로또 심리에 문제 의식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습니다.
하기사 꽤 오래 전에 제가 만났던 분은 당첨될 욕심이나 기대 때문이 아니라
로또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왠지 든든해서 매주 산다고 하셨는데
그런 거라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떡여줘도 되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요행이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거라면 문제겠지요.
일용할 양식과 하루치의 만나는 이 일확천금의 꿈은 아예 꾸지 말라는 것이고,
욕의 씨앗은 싹수부터 제거하는 뜻일 겁니다.
욕欲이라는 씨앗을 아예 제거해야 욕이 욕구欲求가 되고,
욕구가 욕망과 욕심이 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가 미국에 있을 때만해도 한국의 좋은 소식은 신문에 나지 않고,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는 챵피한 얘기만 나던 때였는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구속되는 얘기가 또 크게 났습니다.
그때 저는 이분들이 왜 이렇게 많이 축재를 했나,
백 억 정도만 가져도 죽을 때까지 넉넉하게 쓰고도 남을 텐데
수천 억씩이나 축재를 한 그분들에 대해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더니
나중에는 참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요로만 치면 일용할 양식이면 되고,
일용할 양식을 청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지만
일확천금을 욕심내는 사람은 하느님께 청하지도 않겠지만
청해도 하느님께서는 절대 그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진정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라면
욕의 씨앗은 아예 뿌리지도 말고 재물은 쌓지 말라는
일용할 양식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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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 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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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열매를 맺는 기도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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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 동북부 78차 엠이 주말에는 여러 지역에서 부부들이 참석했습니다. 뉴욕과 뉴저지에서 오시는 분들은 2시간 거리면 올 수 있었습니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오시는 분들은 6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서울에서 하는 교육에 멀리 진도나 부산에서 오는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6시간 넘게 돌아가야 하는 부부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함께 한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행복한 것 같았지만 사실 문제는 수면아래에 있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심한 것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내의 권유에 마지못해 참석한 남편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그 사랑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무심은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툼은 부부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2박3일의 일정을 마치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지향을 받게 됩니다. 미사지향은 크게 2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연미사지향이 있습니다. 연미사지향에는 기일을 기억하는 것이 있고, 불쌍한 영혼을 위한 지향이 있고, 연옥영혼을 위한 지향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면서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분들을 위한 생미사 지향이 있습니다. 생미사 지향에는 감사미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청원미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한국 순례단은 공동체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서 미사지향을 봉헌하는 것을 봅니다. 외국 순례단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한국순례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특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순례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매일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부,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건강, 승진, 합격을 청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참새는 둥지 하나를 마련하면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다람쥐도 웅덩이에서 목울 축이면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낌없이 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합니다. 유혹은 욕망과 욕심이라는 기름을 좋아합니다. 욕망과 욕심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유혹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유혹의 불을 꺼트리는 강력한 소화전입니다. 겸손은 유혹이 가장 두려워하는 보호막입니다. 악에서 구하시기를 청합니다. 악이란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란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하느님의 그늘에 머무는 사람은 악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나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요즘 내가 가족들과 함께한다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한다면,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면 바로 그 시간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요즘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자주 읽는 책,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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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 다해 바치는 진실한 기도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 가르쳐주시며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경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도 마음을 다해 내 삶으로 ‘주님의 기도’를 써내려갔으면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6,9-10)라고 시작합니다. 기도의 출발과 목표는 오직 하느님이시며, 기도의 목적도 삶의 목적도 오직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6,11) 하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에게서 인간에게로 눈길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배고픔과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양식은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6,12-13)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늘 갈등과 분열을 겪으며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읽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로 기우는 연약한 육의 경향을 지니고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늘 맞닥뜨려야 하는 유혹이야말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강력한 실재임을 간파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용서를 청하고,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는 결코 낭만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겪는 배고픔과 갈등, 죄와 유혹과 같은 실존적인 상황을 담고 있는 삶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겪고 있는 삶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살고 있는 우리가 풀어가야 할 삶의 실마리를 하느님에게서 찾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연약한 우리는 때로는 기쁘고 삶의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겪을 때도 있으며, 유혹에 걸려넘어져 영혼의 어둠 한복판에서 서성이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달려가기를 망설입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답을 주는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처절하고 절망적이라 해도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한복판에서도 하느님의 손을 놓지 않고 그분을 바라볼 때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고통과 육신의 병고 때문에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은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저버릴 때이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주님의 기도는 ‘기다림의 기도’요 ‘희망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다하여 진실하게 ‘아빠’를 부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굳건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희망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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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간절懇切하고 항구恒久한 기도-
어제 착한 자매로부터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비행’이란 경기에이블아트센터에서 제작한, 장애인 작품인 ‘등대가 있는 해안가 마을’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만드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작품이라 집무실 책상위에 놓았고 자매에게 감사인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음악 없어도 그림 자체로 밝고 따뜻해 위로와 평화를 주네요. 참 좋은 선물 감사합니다.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집무실에도 참 잘 어울립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힘입어 다시 새롭게, 희망차게 시작하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수도생활에서 기도를 빼면 남는 것은 아무도 것도 없습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하느님으로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끝나는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그러니 삶은 기도입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답도 기도뿐입니다.
기도도 공부해야, 배워야 합니다. 사랑과 똑같습니다. 사랑에는 평생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평생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요즘 내린 단비로 죽어가던 수도원 정원의 잔디가 푸릇푸릇 살아나고 있습니다. 바로 영혼에 단비와 같은 생명의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영혼이 삽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소통의 대화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공기를 숨쉬듯 하느님을 숨쉬며 사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는 함께 갑니다. 저절로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사람, 바로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나도 누구인지 모릅니다. 도저히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은 기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자들을 봐도 연노해갈수록 기도도 간절해집니다. 치매 예방에도 기도가 제일입니다. 사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인가 그렇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얼굴은 참 정직합니다. 인위적인 성형 수술보다는 항구한 기도와 회개를 통한 마음의 성형 수술이 자연스럽고 본연의 참 얼굴이 되게 합니다. 한결같은 기도의 삶에서 인품의 향기와 더불어 매력을 발산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에 드려다 보는 얼굴입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고유의 얼굴입니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 꽃과 같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드려다 보듯 하느님 거울에 내 영혼의 얼굴을 드려다 보는 시간이 기도시간이요, 이런 기도와 더불어 정화되고 성화되어 점차 주님을 닮아가면서 본래의 참 얼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1.기도하라.
2.공부하라.
3.일하라.
4.운동하라.
기도중의 기도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도 보고 배웁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배웠듯이 오늘 제1독서의 엘리사도 엘리야 예언자 스승에게 보고 배웠을 기도입니다. 다음 열정적인 고백이 얼마나 엘리야가 주님과 일치된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엘리야는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으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 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 엘리야 스승을 그대로 보고 배운 엘리사였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얼마나 엘리야를 잘 보고 배웠을 기도의 사람 엘리사인지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능력만이 참으로 우리를 천하무적天下無敵의 겸손한 사람, 참사람으로 만듭니다. 추측컨대 우리 예수님도 시공을 초월하여 엘리야를 롤모델로 삼아 기도 공부에 참으로 항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 앞서 기본적 전제 사항을 말씀하십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할 때 기도든 말이든 글이든 짧고 순수합니다. 군더더기 말은 저절로 생략됩니다. 때로는 침묵도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쉽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주님의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노하우와 같은 기도의 진수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수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요약된 참으로 본질적 깊이의 참 단순하고 진실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평생 삶이 잘 드러납니다. 이런 주님의 기도가 바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본질적 깊이의 단순하고 절실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1.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2.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3.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모두의 중심이신 초월자 아버지를 모신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형제가 됩니다. 인류가 한 아버지를 모신 인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세가지 청원이요, 우리 역시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세가지 청원과 더불어 온갖 협조의 노력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과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게 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에 이어 하루하루 날마다 분투奮鬪의 노력努力이 필수입니다. 이어 우리 일상에서 네가지 기본적 청원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1.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였듯이, 2.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3.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4.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바로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오늘’에 바치는 기도요 오늘 필요한 일용할 양식에 해당되는 모든 것을 주십사 청하는 기도로 우리의 최선을 다한 응답도 필수입니다. 용서받기에 앞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하고 유혹과 악으로부터 보호의 청과 더불어 내 자신이 유혹이나 악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본연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혼자 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의 자리는 날마다의 공동미사전례시간입니다.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일용할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평화를 나눔으로 주님 중심의 일치의 한가족 공동체가 이뤄집니다. 주님의 기도의 실현에 함께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참으로 깨어 온힘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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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6.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일본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신입사원 면접 때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합격 당락이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더욱더 신중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듣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이 질문에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운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로 뽑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실력보다 운을 믿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 대해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 겸손한 사람만이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자기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온전하게 잘 살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운이 엄청나게 나쁜 사람이지만, 자신이 이렇게 노력해서 이만큼이라도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을 자신의 경쟁 상대로만 바라보려 합니다. 회사로서는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감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불행의 이유만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평불만으로 세상에 혼자만 남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할 때 당시의 사람들은 빈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뜻 없는 말을 계속 되뇌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기도를 길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와 많은 말을 하는 기도 등은 다른 민족 사람들이 하는 기도이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바쳐야 하는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해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면서,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닌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내길 기도하면서, 그 영광 안에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만 희망을 두고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커다란 행운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한다면,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모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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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리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에서 생겨난다(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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