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8 후기 작품
1888년 르누아르가 ‘볼모의 시기’에서 벗어나자, 그의 작품은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그의 그림은 선명하게 반짝이는 색채의 진동으로 가득 찼다. 현재 프랑크 푸르트에 있는 《책 읽는 소녀》같은 작품은 르누아르가 10년 전에 그린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색채가 훨씬 더 화려하고 강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 그림에서 르누아르는 빛으로 둘러싸인 사람들을 보여주었으나, 이 무렵 그의 그림에 나타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화려한 꽃의 바다에 휘감겨 있으며, 더 이상 한 개인의 아니라 색채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 무렵 르누아르의 색채는 물질적인 세계를 거의 초월한 것이었다.
후기 작품의 아름다움은 눈부신 색채와 경쾌한 붓놀림에서 생겨났다. 작품을 구성하는 선들은 넓은 곡선을 이루면서 나비의 날개에서 흩어지는 고운 가루처럼 캔버스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것이 세잔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본 백색 입방체의 집들이건, 빈센트 반 고흐가 극적으로 표현한 꿈틀거리는 올리브 나무의 형상이건, 르누아르의 풍경은 언제나 프로방스의 밝은 빛이 넘쳐흐르고 환상적인 색채로 빛났다. 르누아르는 모든 것을 빨강, 노랑, 초록, 파랑이 활기차게 조화를 이룬, 베일로 가린 동화 속의 정원이나 화려한 장식으로 반짝이는 직물처럼 그렸다.
르누아르는 자연 속의 사람을 그릴 때면 언제나 동일한 질감의 색상으로 인물과 배경을 연결했다. 그는 여전히 인상주의자의 감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다양한 뉘앙스와 분출하는 움직임, 특히 어린 소녀의 유연한 움직임이 보여주는 매력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르누아르가 여러 차례 반복하여 그린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살펴보자. 새로운 곡조를 연습하는 르롤 자매의 자세와 얼굴 표정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은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무 아래 풀밭에서 화환을 만들고 있는 소녀들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융합하는 낭만적인 범신론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 소녀들은 더 이상 1870년대와 1880년대 초 르누아르 회화에서 볼 수 있었던 특정 순간의 구체적인 사람이나 햇빛에 물든 자연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과 감정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무렵 르누아르의 그림은 꾸밀 줄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공감은 강가에서 빨래하는 하녀들을 그린 연작에 잘 나타난다. 르누아르는 인물의 움직임과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도미에의 관심사였던 힘든 노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체로 이즈음의 그림에서는 더 이상 심리적인 구성을 볼 수 없으며, 인물의 배열에도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대상의 실재감과 무관한 색채를 사용한 데서 생겨났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 대상과 무관한 색채를 그린 전체에 일정한 패턴으로 펼쳐놓았다. 풀밭이나 인물에 얼굴진 빛은 여전히 실제 색채를 정확하게 관찰한 결과였지만, 그는 더 이상 객관적인 사실적 모습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이 꿈꾸는 색채를 마음대로 펼쳐놓았다.
르누아르가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그린 그림은 앙리 마티스를 중심으로 한 소위 ‘야수파’ 화가들의 표현적인 작품뿐만 아니라(마티스는 르누아르가 죽기 얼마 전 그를 방문했다),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로 대변되는 입체주의, 그리고 바실리칸딘스키의 추상적 또는 ‘절대적’미술의 등장과 같은 시대에 속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르누아르의 후기 인물화는 대부분 심리적인 호소력이 떨어진다. 많은 인물들의 얼굴이 공허하게 비어 있으나, 때에 따라 인물의 개성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인물화는 늦둥이로 얻은 막내아들 코코를 그린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코코가 가브리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떻게 자라났는지, 어떻게 젖을 먹었는지, 어떻게 버릇없는 금발의 꼬마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꽃처럼 피어나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에는 그의 최상의 기량이 드러나 있다.
이 시기에는 가브리엘을 모델로 한 아름다운 초상화와 습작을 많이 그렸다. 그 중 일부는 가브리엘의 소박하고 근면한 모습을 그리고 있어, 르누아르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르누아르는 가브리엘을 꽃과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실제보다 훨씬 더 우아하게 미화했다. 모델과 똑같은 이미지를 그리기보다 가브리엘을 영감의 근원으로 삼은 것이다. 여성이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빗는 내밀한 장면은 과거보다 훨씬 간결하게 표현되었으며, 복잡한 빛의 효과나 우연한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다.
이즈음 르누아르가 그린 몸짓은 좀더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시간을 초월한 듯한 조용한 자세는 1870년대에 즐겨 그린 갑작스러운 순간적 마주침이나 긴장감과는 거리가 있었다. 도한 환상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몸짓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이러한 몸짓과 자세는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자유로운 색채의 서정적 곡조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음악과 춤을 좋아했던 르누아르는 모델의 조화로운 움직임을 적절하게 포착해냈다. 1909년 여름 르누아르는 가브리엘과 또 다른 모델에게 탬버린과 캐스터네츠를 든 무용수의 포즈를 취하게 했다. 동양품 의상을 입은 모델들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알제리의 여인들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은 파리의 미술품 수집가 모리스 가냐의 집 식당 벽을 장식했다.
‘볼모의 시기’ 이후 르누아르가 좋아한 주제는 누드의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1890년대 초 르누아르 작품의 도자기처럼 생생한 색과 이후 작품의 딸기빛 분홍에 익숙해졌다. 르누아르의 누드화들은 후대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가장 대표적인 경향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상주의의 절정기인 1870년대에는 중산계급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장면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누드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누아르와 당시 많은 프랑스 화가들은 이러한 풍속화적인 사실주의를 포기했다. 대신 고유한 예술의 영역을 창조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의 일상에서 분리된 순수한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르누아르의 누드 여인들은 거의 언제나 야외의 개방된 공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으며, 그들의 몸과 얼굴을 보면 모두가 르누아르가 좋아한 일정한 외형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고전적인 비례의 법칙을 되살리거나 전통적인 아카데미풍의 이상화된 인물은 그리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엉덩이가 넓은 풍만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당시의 많은 화가들과 달리 르누아르는 언제나 자연과 밀접하게 교감하고 있었으며, 사실적 표현이라는 기반 위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눈으로 본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국한된 사실감이었으며, 정확하게는 그들의 신체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직 소녀들의 몸만 그렸다.
그는 여성을 주로 본능에 지배되는 동물적인 존재를 보았다. 당시에는 여성이 지적이지 못하며 본능적인 존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인상주의 이후 실증주의 철학자들과 자연주의 소설가들은 인간 존재를 전적으로 과학과 생물학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견해를 따랐다.
르누아르는 후기 작품에 이러한 인간 존재의 동물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르누아르가 그린 소녀들은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이상의 ‘정신’은 갖지 못했다. 그들은 정신이나 지성을 소유하지 못했고, 자신이 사회의 일부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사치스럽게 단장한 소녀들은 르누아르에게 아름다운 동물이나 꽃, 과일과 같았다. 그는 언제나 하녀로 고용한 소녀들을 그림의 모델로 삼았으며, 그가 모델에게 요구한 것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피부”가 전부였다. 르누아르는 망설이지 않고 여인의 신체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엉덩이라고 말했으며, 만일 신이 여성의 가슴을 창조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화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기 작품에서 그의 주요한 예술적 목표는 여성의 신체를 찬미하고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는 육욕을 전혀 내보이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순수한 미감으로 여성의 신체를 찬미했으며, 그 미감은 그 자체로 동물적이고 자연스럽고 순결한 것이었다. 르누아르는 여성 누드에 대해 고전적이라 할 만한 미학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고전주의가 햇빛에 물든 초시간적인 이상향에 사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연모하고 열망한 만큼 현실 현실엣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그는 고대 비너스의 잘 알려진 포즈를 인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선히 자의식을 잃어버린 꿈꾸는 듯한 분위기를 육중한 몸, 작고 단단한 가슴, 둥근 어깨, 작고 둥근 머리, 반작이는 눈, 두꺼운 입술로 구체화했다. 1890년대 초 그는 모델의 얼굴에 ‘자개색’으로 알려진 은회색을 칠하기도 했으나, 이후에는 다시 발그레하게 홍조 띤 색상을 사용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르누아르의 누드는 진정으로 고전적이라 할 만한 기품과 당당함을 얻었다. 1914년의 《앉아 있는 목욕하는 여인》에서 이러한 특징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화려한 자줏빛 음영이 드리워진 선명한 붉은색 누드 주변으로 녹색, 노란색, 파란색의 향연이 펼쳐져 있다. 여성의 누드는 매우 풍만하고 유연하다. 마치 수척하게 여윈 노(老)화가의 열에 들뜬 꿈을 보는 것 같다. 이 누드들은 고대 그리스 조각의 자세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움직임 없는 자세에는 자연스러운 힘과 초연한 초시간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한 특징으로 인해 이 누드의 여인들은 마치 지상의 여신들처럼 보인다. 기노가 르누아르를 위해 만든 당당한 느낌의 청동 조각이 있는데, 이 조각은 미소를 띤 여인이 자신의 힘을 맘껏 과시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승리를 쟁취한 사랑의 여신이라는 뜻에서 《승리의 비너스》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 제목의 좀더 깊은 의미에서 르누아르의 작품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선량하고 소박한 사람이었으며, 그림을 통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따라서 감각적인 아름다움보다 견고하고 이성적인 토데에서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과 어울일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르누아르의 소박한 세계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혁명적이기를 원치 않았다. 언제나 새롭고 항구적인 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그는 진실의 한 부분을 보고 그대로 그렸을 뿐이다. 그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시각에 치우쳐 실제의 비례를 왜곡하지도 않았다. 그의 예술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빛, 영원한 자연을 사랑했다. 실존적 두려움과 중산계급의 불안과 절망이 커져갈 때, 르누아르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그림으로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Girls at the Piano 1892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피아노를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Yvonne and Christine Lerolle Playing the Piano 1897년)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신축 건물 전경(View of the New Building of the Sacre-Coeur 1896년)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카뉴의 테라스(Terrace in Cagnes 1905년) 도쿄, 브리지스톤 미술관
어릿광대(클로드 르누아르) The Clown(Claude Renoir) 1909년,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개를 안고 있는 르누아르 부인(Madame Renoir with Bob 1910년경)
하트퍼드(코네티컷), 워즈워스 애서니엄
탬버린을 든 무희(Dancer with Tambourine 190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캐스터네츠를 든 무희(Dancer with Castanets 190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보석 상자를 갖고 있는 가브리엘(Gabrie with Jewel Bow 1910년) 제네바, 스키라 컬렉션
앉아 있는 목욕하는 여인(Seated Bather 1914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목욕하는 거대한 여인들(님프들) The Great Bathers(The Nymphs)
1918/1919년경, 파리 오스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