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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모든 것] (32) 성체성사
주님의 마지막 만찬 기념하고 십자가 희생 재현하다
나처음: 예수님께서는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나요?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알려 주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셨단다. 성체성사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도록”(요한 15,13) 이끈 큰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거란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 전에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지.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 몸과 당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계셔요.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고 강조하셨단다. 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성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본성 자체인 사랑의 진리를 보여 주신다”(「사랑의 성사」 2항)고 말씀하셨어요.
나처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과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죠?
조언해: 신부님께서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상징이고,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현재화)하는 것이라고 지난번에 말씀하셨잖아.
나처음: 그래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성체성사가 십자가 희생의 재현이라는지 이해가 안 돼서….
라파엘 신부: 처음이가 아직 예비 신자이니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지. 참하느님이신 분이 참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뭐니?
나처음: 인간을 구원하시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자 하심이라고 배웠어요.
라파엘 신부: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구원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된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셨다(1요한 4,10)는 것을 처음이도 잘 알 거야. 하느님께서는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단다.(2코린 5,19)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 사명을 잘 알고 계셨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 그대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1베드 2,24) 당신 죽음을 속량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셨어요. 주님의 속량 곧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치르신 우리의 죗값이란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지.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인간 구원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라고 하며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라고 고백하고 있단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 때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면서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바로 그 ‘몸’이며,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마태 26,28)이심을 미리 보여주셨단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거란다.
죄 없으신 참하느님께 인간이 되시어 우리 죗값으로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신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을 끝없이 사랑하신 자비 때문이란다. 최후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도, 파스카의 속량 제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것도 모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지. 그래서 교회는 매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성체를 향해 반복하고 있단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당신 희생 제사에 참여하기를 명하셨단다. 이는 우리가 미사에 어떤 자세로 참여해야 하는지 잘 일깨워주시는 말씀이기도 해.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의 찬미, 기도, 노동, 기쁨, 슬픔 등 우리 삶 모두를 주님과 결합되길 원하신다는 걸 명심해야 해.
나처음: 이제서야 성체성사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연결되는지 알겠네요. 성체성사를 이해하는 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큼 어렵네요.
라파엘 신부: 그래서 성체성사를 “신앙의 신비”라고 고백하잖니. 빵과 포도주가 주님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뀌는 이 실체 변화는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지. ‘신앙의 신비’라는 경이로운 고백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교회는 “믿음은 예식 안에서 표현되고, 예식은 믿음을 강화하고 굳건하게 한다”(「사랑의 성사」 6항)고 밝히고 있단다.
조언해: 성체성사가 신비라고 고백해도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실재하시는 것이잖아요.
라파엘 신부: 맞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체를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을 보면 삼위일체를 본 것이다”고 가르치셨단다. 성체의 신비 역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의 빵’이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조언해: 그런데 신부님. 외람된 질문인데 거양성체를 할 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사제가 말을 하는 데 “내어 줄 내 몸” “흘릴 피”는 미래형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현재형으로 “내어 주는 내 몸” “흘리는 피”라고 해야 미사가 거행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성체성사가 현재화되고 실재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닌가요.
라파엘 신부: 아주 좋은 질문이구나. 사실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복음서 본문을 보면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 quod pro vobis dater.),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Hic est calix novum testamentum in sanguine meo, qui pro vobis fundetur)라고 현재형으로 기록돼 있단다.(루카 22,19-20) 미래형이 아니지.
우리말 미사 경본에 어떻게 미래형으로 옮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만찬 때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고 재현하려면 주교님들과 전례 학자들이 모여 이를 바로 잡으려는 조치가 필요하겠구나. 언해가 참 좋은 지적을 해 주었구나. 고마워.
전례 탐구 생활 (39) 감사 기도의 시작 대화
예물 기도를 바친 사제는 성찬 전례의 핵심인 ‘감사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하시던 날 밤, 당신의 파스카 희생의 성사를 제정하시던 그날 밤에,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감사제가 이제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의 손으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축성됩니다.
성찬 전례의 감사 기도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만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이라는 말이 그리스 말의 ‘감사’에서 유래했을 만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드리는 것은 감사 기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점은 감사 기도를 시작하는 대화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신자 :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사제 : 마음을 드높이.
신자 : 주님께 올립니다.
사제 :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신자 :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미사의 가장 거룩한 부분인 감사 기도에 들어갈 때 사제와 교우들은 다시 한번 서로에게 주님의 현존을 알리고 빌어주는 인사를 나눕니다. 중요하고 어려운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은 이에게 건네는 이 인사로 거룩한 신비에 더 가까이 나아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제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마음을 드높이.” 하고 말하면, 교우들이 “주님께 올립니다.” 하고 응답합니다. 인간의 정신과 의지, 감정의 자리인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으로 채우자는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제의 “손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들어”(애가 3,41) 올리고,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자는 말입니다(콜로 3,1-2 참조).
그리고 마지막 대화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이의 첫 번째 본분을 되새깁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축복을 베푸시고 인간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피조물이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창조주께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원래 주인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피조물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 피조물이 창조주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고의 것은 감사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인 생활의 주요 특징은 감사하는 것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해야 하고(콜로 2,7),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감사를 드리고(콜로 3,17), “모든 일에”(1테살 5,18; 필리 4,6 참조), 특히 예배드릴 때(1코린 14,16-19; 에페 5,19-20; 콜로 3,16) 감사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이러한 감사는 삶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생활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고난 속에서 순교하는 순간에도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자기의 사형 집행인에게 금 스물다섯 냥을 지불하여 환난 속에서 드리는 감사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성무일도 9월 16일 독서 기도). 성찬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이를 하느님께 감사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미사의 모든 것] (31) 성체 성혈 축성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신앙의 신비
나처음: 미사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 정말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나요? 솔직히 아직 성체 안에 예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죄송해요.
조언해: 저도 성체성사의 신비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믿지만, 가끔 미사 때 정말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할까 의심할 때가 있어요.
라파엘 신부: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을 단순히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돼. 실제로 미사 때마다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야. 700년께 이탈리아 란치아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단다. 그곳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한 신부님이 처음이랑 언해처럼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정말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할까 의심했지. 그 신부님께서 어느 날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그러한 의심을 또 품게 된 거야. 그 순간 축성된 빵이 살로, 포도주가 피로 변한 거야. 이 기적의 성체와 성혈은 지금도 란치아노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당에 잘 보존돼 있단다.
이러한 성체와 성혈의 기적은 란치아노뿐 아니라 이탈리아 볼세냐와 시에나 그리고 독일의 상트 게오르겐부르크 수도원 등지에서 일어났단다.
처음이랑 언해가 의심하듯 교회 안에서 수 세기 동안 성체에 관한 논쟁이 이어졌어요. 특히 성체가 ‘진짜 주님의 몸’이냐 아니면 단순히 ‘상징’이냐 하는 문제로 수많은 신학자가 다투었단다.
이에 개신교는 빵과 포도주는 변화 없이 그대로이고, 단순히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상징’이라고 설명한단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성체성사는 주님께서 행하신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상징’이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현재화)하는 것이며 실제로 축성한 성체와 성혈이 주님의 참된 몸이요 피로, 주님께서 그 안에 현존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단다. 가톨릭교회는 그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대해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시며… 이 현존은 분명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또 완전하게 현존하신다”며 믿을 교리로 선포하고 있단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374항)
이렇게 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축성한 성체와 성혈을 주님의 몸과 피라고 고백하는 근거는 마지막 만찬 때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단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하시고, 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하셨기 때문이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명하셨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교회가 행하는 미사를 통해 성체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것이야. 이처럼 축성한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을 ‘성변화’라고 해.
나처음: 그러면 빵과 포도주가 언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나요.
라파엘 신부: 제대 위에 빵과 포도주가 놓여 있다고 해서 저절로 모두가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는 게 아니란다. 반드시 사제의 성찬 제정과 축성 기도가 있어야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히 변화된단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후에는 반드시 ‘성체’와 ‘성혈’로 고백하면서 흠숭의 예를 표해야 해.
성변화는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고 사제가 바치는 ‘성령 청원’으로 시작돼. 이어 사제가 성찬 제정과 축성 기도를 바치면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주님의 몸과 피로 ‘성변화’가 일어나지.
이후 사제는 주님의 몸과 피가 된 성체와 성혈을 높이 들어 회중에게 보이며 거룩한 변화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신앙의 신비여”를 환호하면 회중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1코린 11,26)라고 큰 소리(또는 노래)로 고백한단다.
필요에 따라 전례 봉사자(복사)는 축성 바로 전에 종소리로 신자들에게 신호해요. 마찬가지로 성체와 성혈이 든 성작을 높이 들어 보일 때 종을 치기도 하지.
나처음: 사제가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작을 높이 들어 보이는 이유는 뭔가요?
조언해: 방금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빵과 포도주가 그 순간에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했다는 것을 높이 들어 신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사제가 제단에서 계속 기도만 하면 언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었는지를 모르잖니. 그래서 높이 들어 보여주는 거야.
라파엘 신부: 언해가 잘 설명해 주었구나. 미사 때에 사제가 축성한 성체와 성혈을 높이 들어 올리는 행위를 ‘거양성체’(擧楊聖體)라고 해. 라틴말로는 ‘엘레바치오’(Elevatio)라고 하지.
미사 때 이렇게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단다. 먼저, 교회의 봉헌 예물인 빵과 포도주가 하느님의 능력으로 축성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가 되었음을 회중에게 드러내 선포하는 뜻이 있단다. 두 번째로는 성체와 성혈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구세주께 사랑과 흠숭의 마음으로 경배하라는 뜻이 있지. 세 번째로는 인간 구원을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하며 합당하게 미사를 하느님께 봉헌하자는 지향이 담겨 있단다.
미사 때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어 올리는 예식은 13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당시 평신도 사이에서 축성되지 않은 빵까지 성체로 공경하려는 그릇된 신심이 확산되고 있어 파리교구장 에우데스 드 쉴러 주교가 사제들에게 축성 전에 빵을 드는 것을 금하게 했지. 그리고 반드시 축성한 성체만을 거양하도록 명했지.
이 거양성체 예식은 성체를 보기를 간절히 원하던 신자들의 뜻에 부합해 급속도로 퍼져나가 50년이 채 안 돼 모든 유럽 교회에서 이 예식을 행했다고 해. 성혈 거양은 성체 거양보다 늦어 14세기에 가서야 보편화 되었어.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신자들이 성혈이 담겨 있는 성작을 보려는 갈망이 덜했기 때문이겠지.
페스트가 창궐하던 당시 중세 유럽은 성체에 대한 신심이 유독 강했단다. 아마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죽어 나갔기 때문에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크게 의탁했던 것 같아. 그래서 어떤 사제들은 성찬례 거양성체 예식 후 축성한 성체 앞에 오랫동안 무릎절을 하고 기도하는가 하면, 신자들은 성체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사제에게 더 높이 성체를 들어 올려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대. 성체를 봄으로써 언제 닥칠지 모를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 하지만 ‘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성체에 대한 경외심이 줄어들어 성체를 쳐다보지도 않고 의례적으로 고개를 숙여 절만 하는 신자들이 크게 늘기도 했단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니. 우리 신자들도 성체께 대한 경외심 없이 의례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참 많아.
이를 보다 못한 성 비오 10세 교황(재임 1903~1914)께서 1907년에 「올바른 성체 공경을 위한 지침」을 발표해 “미사 중 거양성체 때 신자들은 신앙과 애정을 가지고 성체를 쳐다보며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께 고백하였듯이 ‘저의 주님, 주님은 내 참 하느님이십니다’(요한 20,28 참조, 옛 미사 경본에는 ‘주님, 주님은 내 참천주로소이다’로 표기됨)라고 고백하라”고 명하셨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후에는 거양성체 예식 때 사제는 속으로 “저의 주님, 주님은 내 참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기도하고, 회중과 함께 성체를 바라본 후 허리를 숙여 깊은 절은 한단다.
[감염병 시대의 전례 사목] (4) 주님을 더욱 가까이
방역수칙 지키며 이어주고 함께하고 연대하자
코로나19로 인해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변화가 급하게 당겨졌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특징은 ‘융합’이다. 다양한 분야가 서로 연계되어 조직되고 체계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이고, 이어주고, 함께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는 ‘공감과 조화’가 이 시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교회 전례가 실천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언택트 환경’에 처하게 돼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돼야 하는 상황이다.
교회 전례와 사목의 디지털화와 개별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일상 가지던 행사, 기도모임, 잔치 등 함께 어울리면서 가졌던 모든 것들이 요원하게 됐다. 긴 시간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많이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상 소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새롭게 느끼며 더 이상은 그런 것들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진다.
물리적으로는 흩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어주고 함께하고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함께 모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더 크다. 그러기에 오프라인 모임(물리적인 현장 모임)에서 온라인 모임(여러 통신 매체를 통한 모임)으로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다.
교회 전례 사목의 중요한 핵심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삶이 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 말씀’에 더 집중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본당이나 여러 공동체 차원에서 ‘매일 복음 묵상글’을 문자로 보내주는 것도 좋다. 단체별로 그룹방을 통해 말씀 나누기를 정기적으로 갖도록 한다. 소공동체 운동에서 해왔던 가족간 말씀 나누기도 가능할 것이다. 또 온라인으로 하는 ‘사제와 함께 하는 성경통독’도 좋을 것이다. 그 외에 레지오마리애 주회도 그룹방을 이용해 각자 집에서 온라인으로 시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디지털 기기 사용이 보편화돼 있으므로 조금만 익히면 가능할 것이며, 항상 ‘주님 말씀을 가까이 접하고 친밀하기’ 위한 목표로 진행돼야 한다. 더 나아가 실시간 영상(유튜브 중계 등)을 마련해 성경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고 보충해 주거나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르신들은 봉사자가 개별 방문해 말씀과 기도 안내를 해줄 수 있다.
또한 다수가 모이는 형태의 교회 활동이 불가능하다면 소수가 개별적으로 연결돼 교회 활동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런 형태는 이미 실천해 왔던 활동과 전례가 있다. 예컨대, 병자 영성체가 개별과 소수로 이루어지는 전례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방역 단계에 따라 미사 외에 여러 소모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아무런 사목 프로그램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4인 이하 식사 모임이 가능한데, 4인 이하 교회 모임을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식사 모임은 마스크도 쓰지 않지만, 교회 활동 모임은 마스크 착용과 충분한 거리두기를 갖고 시행한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이다. 넓은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이 모이는 교리반, 주일학교 등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미사 후에 갖는 합동 주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코로나 우울증인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전쟁을 해도 밥은 먹어야 하고 학교 공부는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해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미사를 못하더라도 기도는 해야 한다. 미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교육 모임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손을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방역지침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른 형태로라도 진행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팬데믹으로 그동안 활동량이 줄어들어 신체적으로 소화불량, 몸살이 생기기도 했다. 정신적으로는 멍 때리듯 집단 우울증세를 가진 것은 아닌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놓고 있었다. 아무런 사목도 하지 않는 이유를, ‘방역지침’이라는 규정에 숨겨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새로운 사목적 노력들을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되새겨볼 일이다. 우리 신앙의 우울한 모습을 훌훌 털어버리고 신자들에게 빈번하게 말 걸기, 하느님 은총 전하기, 사랑과 관심 보이기를 위한 사목적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백신 접종과 치료제 개발이 시작됐지만, 올해 내에도 집단 면역이 완료되지 않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전 세계 인구가 백신 접종을 완료하는데 5년 이상은 걸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 시대에는 예전과 동일한 생활 패턴을 갖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임을 또한 암시하는 말이 된다.
전례 탐구 생활 (38)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채로
예물을 차려놓은 제대 앞에 허리를 숙여 우리가 바치는 제사를 하느님께서 너그러이 받아주시기를 청한 다음 사제는 물로 손을 씻습니다. 구약성경은 예식을 본격적으로 거행하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제 임직식 때 사제와 레위인들은 성소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정결례를 거행해야 했습니다(탈출 29,4: 민수 8,7).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갈 때나 화제물을 살라 바치려고 제단에 다가갈 때도 사제는 청동 대야에 담긴 물로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탈출 30,17-21).
성전에 봉사하는 이들뿐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는 이는 누구나 손을 씻는 예식 같은 것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시편은 말합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이 시편에서 손 씻는 예식은 사람이 제단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요구되는 마음의 정화를 상징합니다. 깨끗한 손은 마음의 결백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러한 성서적 배경에서 보면, 구약성경의 사제나 레위인들, 또는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처럼 오늘날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도 ‘지극히 거룩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손 씻는 예식을 진행합니다. 사제가 서 있는 제대에서 예물로 바쳐진 빵과 포도주는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될 것이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실 때에 주님은 우리 안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 유일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이 일을 사제의 손을 통해 이루실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하여 사제는 새로운 ‘지성소’로 나아가면서 구약의 사제들처럼 손을 씻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신의 영혼을 준비하기 위하여 다윗이 바친 참회의 기도를 조용히 바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시편 51,4 참조)
교우들은 조용히 앉아 사제가 기도와 예식으로 이 거룩한 임무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런 다음 사제는 감사 기도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 준비로 교우들을 향하여 기도하자고 청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 권고문의 라틴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 권고문의 숨은 뜻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형제 여러분, 나와 여러분의 제사를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받아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여기서 “나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직자가 바치는 제사를 가리키고, “여러분의 제사”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자신을 바치는 교우들의 제사를 의미합니다. 한국어 전례문처럼 “우리”의 제사라고 통칭하지 않고 구태여 “나와 여러분의 제사”라고 한 것은 세례받은 교우들도 자신만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사제직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제와 교우들은 하나의 제사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우들도 “사제의 손을 빌려서뿐 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사제와 일치하여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비오 12세, 『하느님의 중개자』, 92항).
이 권고문에 교우들도 힘차게 응답합니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 이 응답은 하느님께 직접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사제의 권고를 들은 교우들이 사제에게 화답하는 기원문입니다. “당신(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제사를 주님께서 그 이름의 찬미와 영광을 위하여, 또한 저희와 주님의 거룩한 교회 전체의 도움을 위하여 받아주시기를 빕니다.”
[미사의 모든 것] (30) 교황과 주교를 위한 기도
신앙을 수호하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위해 기도하다
조언해: 사제가 미사 중에 감사 기도를 드릴 때 교황과 여러 주교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데 이유가 뭐죠?
라파엘 신부: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단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교회 안에 존재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종말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지.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아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목자로 세우셨지. 즉 주님께서 베드로를 으뜸으로 하는 사도들에게 교회를 사목할 임무를 주셨단다. 이 임무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들을 통해 행사돼요. 그래서 교황과 주교를 ‘신앙의 수호자들’이라고 불러.
미사의 감사 기도 중에 교황과 주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오는 전통이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처음부터 많은 박해와 이단의 오류를 경험했기에 교황과 주교들이 주님의 보호 아래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보편 신앙을 수호하고, 이 신앙을 받드는 모든 이들을 잘 돌보아 교회를 평화롭게 사목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실 것을 미사 중에 기도해 오고 있단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49항에 따르면 미사 집전자가 주교이면 기도문 안에서 “교황 아무”(예-프란치스코)와 다음에 “주님의 부당한 종인 저와”라고 하지. 그러나 주교가 자기 교구 밖에서 집전하면 “이 교회의 주교인 저의 형제 아무와 주님의 부당한 종인 저와”라고 하며 기도하지. 집전자가 사제일 때는 교구장 주교나 법적으로 그와 동등한 이를 “저희 주교(또는 대목구장, 자치구장, 지목구장, 대수도원장) 아무”라고 해야 해.
감사 기도에서 부교구장 주교와 보좌 주교의 이름은 부를 수 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주교의 이름은 부르지 않아야 해. 주교가 여럿일 때는 “저희 주교 아무와 협력 주교들과”로 표현하지.
조언해: 교황과 주교를 위한 기도 다음에 산 이를 위한 기도가 이어지는데 사제가 정성껏 드리는 이 기도를 들을 때마다 정말 신자로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요.
나처음: 그런데 교회는 왜 산 이를 위해 기도하죠?
라파엘 신부: 집전 사제가 “주님, 주님의 종 (아무)와 (아무)를 생각하소서. 아울러, 주님께서 여기 모인 모든 이의 믿음과 정성을 아시오니 이들도 굽어보소서…”라며 기도하지. 사실 이 기도가 생긴 것은 사제에게 개인 지향으로 미사 예물을 봉헌한 이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란다. 그러다 차츰 미사 지향자뿐 아니라 미사에 참여한 이들과 그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까지 일반화된 것이지.
교회의 사명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주님과 일치시키는 것이란다.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며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일을 말하지. 그래서 교회를 이 세상에서 ‘구원의 성사’이고,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의 표지이자 도구’라고 말하기도 해.
하느님께서는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신단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완전하고 충만한 방법을 세상에 증거하고 있지. 그래서 교회는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령의 일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나처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한한 은총을 베푸시는데 기도가 왜 필요한가요?
라파엘 신부: 기도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이야. 아울러 이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도 하지.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라고 교회는 가르친단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께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청하라고 권고하셨지.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친히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
기도의 원천은 하느님 말씀, 교회 전례, 대신덕이라고 부르는 믿음과 희망, 사랑의 덕을 들 수 있지.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란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1테살 5,17)고 당부하셨지. 그러면서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라고 권고하셨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기도의 필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지. “기도만큼 값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고, 어려운 것을 쉽게 해 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죄에 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안나에 관한 설교」 4,5)
그리고 고대 교회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인 오리게네스는 “기도를 일과 결합시키고, 일을 기도와 결합시키는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원칙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단다.(「기도론」 12,2)
조언해: 그럼, 감사 기도 중에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을 성인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뭐죠?
라파엘 신부: 성인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도를 미사 중에 하는 것은 지상 교회의 전례가 천상 교회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뜻하지. 교회는 지상에서 싹 틔우고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지. 그래서 교회는 근본적으로 ‘천상 예루살렘’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지상에 세우신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단다. 그날까지 교회는 세상의 박해를 견디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자신의 순례 길을 걸어가지.(「교회 헌장」 8항 참조)
이처럼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 보화로 가득 찬 교회를 두고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이며,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지니고, 열렬히 활동하면서도 관상에 전념하고, 세상 안에 현존하면서도 다만 나그네인 것이다”라고 설명해요.(「전례 헌장」 2항) 감사 기도 중에 성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이 기도에 명기돼 나오는 성인들은 먼저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12 사도들, 그리고 초기 12 순교자들이란다. 이들 중 리노와 클레토, 클레멘스와 식스토, 고르넬리오는 교황이고, 치프리아노는 주교, 라우렌시오는 부제, 크리소고노, 요한과 바오로,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평신도들이야. 사도들과 12명의 초기 순교 성인들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24명 원로(묵시 4,10)를 떠올리게 해.
성인들은 교회 역사의 가장 어려웠던 상황에서 언제나 쇄신의 원천과 기원이 되신 분들이지. 그래서 교회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이미 완덕에 이르러 어떠한 티나 주름도 없이 서 있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자라나도록 노력하고 있단다.(「교회 헌장」 65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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