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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채꽃은 지고 개나리 진달래는 폈고 벗꽃이 금방 얼굴 내밀려고 하는 걸 보네. 다들 평안 하신가? 지난번 모임에 참석도 못 하고 바쁜척 지내고 있다네. 조만간 봄꽃처럼 화사한 친구들 얼굴 볼 수 있겠지. 배우는 글 이나 또 주책맞게 한 편 올리네....
바람과 안개
이 성 상
쿠웨이트 공항이다. 적당한 온도가 유지된 실내는 많은 여행객들로 카운터마다 붐비고 있다. 그동안 몇 개월은 견딜만한 기온이어서 다행이었는데 이제 서서히 기온이 오르고 살인적인 그 여름이 또 오려고 한다. 쿠웨이트의 3월은 한 여름으로 가는 시작의 달이다.
그리스행 비행기는 11시에 떠나기로 되어 있다. 비행기 티켓은 야스민이 가지고 나오기로 했었다. 도착해 살피니 그녀는 2층 출국 수속카운터 앞에 벌써 나와 앉아 있다. 호준은 천천히 걸어가 눈인사를 나눈 후 티켓만 받아들고 멀리 떨어져 앉는다. 다른 소파에 앉아 휴대 가방을 열어보며 뭔가를 확인하듯 티켓을 드려다 보고 있다. 공항 내에서는 둘은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하기로 했었다. 야스민도 큰 백 하나와 같이 멀리 앉아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12번 게이트의 탑승시그널에 따라 그녀가 먼저 들어간 후 호준도 일어나 줄을 따라 들어가 번호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그녀 옆 좌석번호를 보고 그 자리에 앉는다. 그리 크지 않은 비행기 실내는 복도를 가운데 두고 좌우 두 사람씩 앉는 자리라 다른 승객 시선을 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창가 옆에 자리한 그녀의 옷차림은 아랍 전통 옷을 벗어 던지고 벌써 웃옷을 벗어 윗 칸에 얹으니 간편한 티와 바지 차림이다.
“준? 아이 디든 스맆 어 윙크 라스트 나이트.”(준 어제 한잠도 못 잤어.)
“와이? 유 원이드 미 투 씨 투 머취.”(왜? 나 많이 보고 싶었구나.)
“롸이트! 왓 어바웃 유? ” ( 그래! 당신은?)
“미 투! 앤드 아이 워리드 썸, 어바웃 아워 딧스 트맆.”(나두. 이번 우리여행이 좀 걱정도 돼서)
“돈 워리. 플리즈 두 씽크 온리 비 해피. 준!”(걱정 하지마. 즐거운 것 만 생각해. 준!)
간단 명료하다. 그녀는 여행이 많이 즐거운 듯 계속 떠들었고 상기돼 있었다. 그러나 호준은 마냥 같이 즐거워만 할 수는 없었다. 잠시후 그녀는 졸린 지 눈도 감고 자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이 엄한 국가에서 호준은 건설현장 일하러, 돈 벌러 나와 이래도 되는 건가를 생각도 해본다. 그는 쿠웨이트에 진출해 있는 한국 건설업체 자재과 직원이다. 이제 해외근무 16개월을 조금 넘긴 직장생활 5년차이고 이곳 근무 발령이 나서 도하 발전소 공사팀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미혼이고 나이는 31살이다.
한편 야스민은 이곳 정통 쿠웨이트 현지인으로 정부 요직에 직책을 가지고 있는 부친를 둔 집안의 6번째 딸이라고 했다. 학교를 영국에서 마쳐 영어가 원어민 같고 지금은 쿠웨이트 시내 여행사에서 매니저로 근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나이는 28살이고 보통 사무실 근무 때도 히잡을 쓰고 검은 투시를 입고 근무를 하지만 정장도 잘 입고 유럽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성격이 밝고 생각이 서구적으로 보인다. 여자라기 보단 남자 같다. 호준의 더듬거리는 영어를 그래도 잘 이해해 주고 고쳐주고 가끔 아랍어도 가르쳐 주며 이렇게 둘이 교재한지 벌써 4개월이 되어 간다.
호준은 지금도 현실 같지 않은 야스민을 만날 때 마다 느끼는 즐거움보다 위기감 그리고 떳떳지 못한 이성 교제 같아 불안감도 솔직히 가지고 있다. 무슬림 국가인 이 나라 아니 전 아랍지역에서 타국 남자는 물론이고 자국인의 남녀 교제도 엄격히 금지 되어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자고 야스민과 호준은 정이 들고 이렇게 같이 여행을 간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리냐. 이건 모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 율법대로라면 크게 위법을 저지르는 처사 일 것이다. 이런 것이 발각되는 날엔 어떻게 처리가 될지는 야스민도 잘 모르겠다고만 한다. 알면서도 한 번 터진 이성적 끌림은 그녀나 호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국내에서도 못해본 이성교재를 금지된 아랍지역에서 그것도 하루 종일 뜨거운 현장일 뿐인 험지(險地)에서 누구도 흉내 못낸 선택받은 연인처럼 한번 감당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만나게 된 것은 어쩜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안 보이는 어떤 높은 곳에서 누가 그들을 인도 했을지도 모른다고 한 번은 야스민이 얘기를 했었다. 그것이 ‘인샬라’라던가 뭔가 더 붙인 말이 있는데 잊어버렸다.
5개 월 전이었다. 휴일인 어느 금요일 직원 몇이서 이라크로 가는 국도에서 서북쪽 내륙에 있는 오아시스를 찾아 피크닉을 갔었다. 평소 유원지가 별로 없는 이곳에서 현지인들도 가끔 그곳에 가족을 데리고 놀러들 나갔다 쉬다가 돌아오곤 하는 곳이다. 별 생각 없이 우리도 무료한 휴일을 직원들끼리 의기투합해 그곳을 찾았었다. 돌아오는 길인데 좌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 가운데 도로변에 승용차를 세운 체 현지인 가족들이 웅성거리고 우리를 붙잡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우리들 차는 회사차 랜드로버여서 좀 힘이 있어 보였는지 견인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휴대폰, 카폰이 없을 때라 정비소나 구난차를 즉시 부를 수도 없고 인편에 도움 요청을 해도 먼 곳에 와 있어 언제 차를 끌고 갈지 난감 했을 터였다.
그들이 야스민네였다. 언니 동생들 어머니 남동생 여섯명이 꼼짝없이 사막에서 미아기 된 것이다. 우리가 거절하고 가면 다른 차들도 뜸한 때라 난감하기도 했다. 그래서 왜 차량에 문제가 있는지 호준이 먼저 살펴 봤다.
스타트 모터만 돌고 시동이 안 걸리는 것이었다. 기름이 안 올라와 시동이 꺼진 듯 했다.
그 당시 차들은 아무리 좋은 차라도 엔진 가동이 전자식이 아니라 캬브레타가 달린 습식 구동형이었다. 회사에 정비차량도 많이 봤고 서울에서도 고물차를 타고 가다 시동이 꺼진 경험으로 응급조치를 해 봤었다. 에어 크리너 통을 제거하고 캬브레타 구멍을 손바닥으로 막고 압축을 하며 스타트 모터를 돌리라고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손바닥으로 열었다 닫았다 시도를 했더니 드디어 웽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리는 것이었다. 야스민네 식구들이 환성을 지른다. 슈크란(고맙다)!을 외친다. 도움 받아서 그런지 우리 회사를 묻고 내 이름을 물어 본 듯 했다. 처음엔 우리가 일본 사람들 이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가 졸지에 그들의 구세주가 된 것이다. 무언가에 막힌 연료 파이프를 강제로 압축시켜 기름 통로를 뚤리게 만든 것이 효력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호준은 다 잊고 회사일에 뭍혀 지내다 부장의 해외 출장 비행기표를 찾으러 여행사에 들렸다가 다시 야스민을 만나게 됐다. 쿠웨이트 시내 다운타운 가에 자리한 그 여행사는 그리 크지 않은 실내에 팔레스타인 여직원 몇이 창구에 앉아있고 남자직원 서넛과 같이 야스민은 안 쪽 창가에 역시 히잡을 쓰고 뭔가 작성하는 듯 몰두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야 해서 두리번 거리고 실내를 살펴보다 야스민을 발견 한 것이다. 확실히 그녀 같아 창구 여자에게 야스민을 가르키며 아는 사람 같다고 하니 그녀에게 조르르 가더니 나를 쳐다보게 한다. 야스민이 달려오더니 얼굴을 활짝 열고 “하이! 워류 두잉 히어?”외친다. 호준이 할 소릴 그녀가 한다. 호준도 반가웠다. 안으로 안내되어 차도 얻어 마시고 명함도 교환하고 자기가 사장인 것 처럼 호들갑을 떠는걸 보면서 뜻하지 않은 그녀의 환대가 즐겁고 예쁘게 보였다. 가무잡잡하고 둥그런 눈, 다소 통통한게 아니라 넉넉하고 퉁퉁하게 보이는 체구는 하이힐을 신었는지 키도 꽤 커 보였다. 무엇보다 강한 향수가 그녀의 몸에서 코를 독하게 자극도 했다. 연신 튀어나오는 유창한 영어가 호준을 다소 주눅 들게 했지만 반갑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게 됐다. 그런데
며칠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이국 만리 타국에서 외국어로 여자가 호준을 찾는 전화가 오다니 건네 받은 후 쉽게 감격을 하고, 신세 갚으려는 것인지 밥을 사겠다고 한다. 메리어트 호텔에서 휴일 날 저녁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왠 생각지도 못한 호사냐 싶어 “오케이!”를 서너 번 한 후 그렇게 그녀와의 교제가 시작이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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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위에 띄어 놓은 큰 여객선을 호텔로 개조한 5성급 호텔이다. 전 실내를 황금빛 카펫을 깔아 화려함을 더 했다. 넓은 로비를 지나 잘 보이지도 않는 커피샆을 찾아 조금 두리번 거리다 그녀를 발견하고 앞에 가 서서 인사를 하니 활짝 웃으며 맞이하는 모습이 호준을 설레게 한다. 오똑한 콧날, 짙은 눈썹, 둥그런 눈, 빨려 들어갈 듯하다. 화장도 하고 퍼머를 한 듯 웨이브가 진 검은 머리의 맑은 얼굴은 몰라 볼 뻔 했다. 까만 아바야도 벗어던지고 옅은 핑크 자켓에 종아리도 보이는 스커트를 입었다. 그녀의 변신과 활달함에 그리고 유창한 영어에 호준은 또 기가 죽는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앉기도 무섭게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호준은
“별 말씀을 ...”
“회사에서 무슨 일 하세요?”
“자재 조달 업무이지요”
“저는 당신이 엔지니어나 맥가이버인줄 알았어요. 하하”
“때론 그런 소리도 가끔 들으며 지내지요.”
“정말 그때 당신을 못 만났더라면 어쩔 뻔 했는지 몰라요.”
“알라의 뜻이었나 부죠. (인샬라!)하하하”
“비싼거 사드리고 싶어요.”
“어떤게 비싸고 맛있는 건줄 몰라서...”
“이태리 음식이나 삭스핀요리는 어때요?”
“그런거 못 먹어요,”
“양고기와 라이스는 괜찮으세요?”
“그건 먹어 봤어요. 그걸루...”
자리를 식당으로 옮겨 앉아 그녀가 사람을 불러 아랍어로 캄사(양고기요리)음식을 시킨 후 뒤따라 나온 것을 보니 걱정스럽게도 나온다. 처음 보는 음식이 참 많이도 나오는 것이다. 입에 맞고 맛도 있어 한참을 먹는데 그녀도 잘 먹어댄다. 그래서 몸도 덩치가 호준만큼은 무게가 나갈 것 같다. 한편으론 돈 벌러 온 노무자가 배 고플거라는 생각에서 많이 먹게 하는 건 아닌지 노파심에 궁색한 생각도 들었다.
현지 아랍인들은 별로 몸을 크게 안 움직이고 힘쓰는 일을 안 하고 먹는 문화만 보여서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녀 거의가 중년이 되면 비만형의 둥그런 몸매를 긴 로브 비쉬트에 가리고 고급차를 몰고 다니며 늘 먹는 게 일로 보였다.
거의 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야스민과 호준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오랜 유럽생활이 몸에 밴듯 활달함이 넘쳐 거의 야스민이 둘의 대화를 리드하면서 많은걸 호준에게 물어왔다. 건설현장 일을 하면서 힘들지는 않느냐? 기후와 음식은 맞느냐? 언제 한국으로 들어가느냐? 등 그리고 결혼은 했느냐? 한번 한사람 같아 보인다는 등 농담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도 한번 할 뻔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50살이 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갈 뻔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영국으로 도망을 가다시피 피해서 4년을 더 지냈단다. 거침없이 오랜 지인 대하듯 상대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다소곳하지만 내숭이 잔뜩 들어있는 동양 여성과는 또 다른 면이 있어 보였다. 대접을 잘 받고 차로 바래다 주겠다고 하니 기겁을 하고 안 된다고 한다. 아는 사람 보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에프터를 갖기로 하고 그렇게 그날은 각자 헤여졌다.
쿠웨이트는 면적이 아주 작은 나라다. 쿠웨이트 중심가에서 한 두시간 이면 사방 국경까지 도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상북도 넓이에 원주민은 그 당시 200만 명이 살고 그 배가 넘는 외국인들이 들어와 섞여 지낸다. 국가 재정 90%를 석유수입에서 얻고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25%를 차지한다며 왕정체제로 한번 왕이 죽을 때 까지 다스린다. 진주 조개잡이를 하던 작은 어촌마을이었다는데 무역로에 위치한 길목이었고 석유가 터지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나라이기도 하다.
호준이 그녀에게 먼저 데이트를 청하고 부담을 준 게 아닌 만큼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지만 거듭 되면서 그들도 모르는 사이 둘은 연인사이로 발전되어 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주로 휴일이나 저녁 늦게 그녀가 건물 뒤에 기다리며 서 있으면 차에 테우고 차량에서 데이트를 했다. 회사 현장에서 쿠웨이트시내 그녀 건물까지는 1시간 정도 걸렸지만 언제나 즐겁게 그러나 남의 눈을 피해 접선하듯 만났고 사막으로, 바닷가로 때론 드라이브 인 극장으로 가 데이트를 했다. 젊은 남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흉내도 내보며 서로를 더 깊이 알게도 되어 갔다.
이번 여행을 하게 된 것은 회사현장의 장비가 갑자기 고장이 생겨 부품 구매차 그리스로 출장을 호준이 가게 되면서 이루어 진 것이다. 그 시스템의 부품이 가까운 그리스에 대리점이 있어 고장난 부속을 빼서 들고 가 같은 걸로 구해 와야 가동이 되는 일이었다. 그 얘기를 야스민에게 했더니 즉각 자기도 따라 가겠다는 것이다. 호준은 회사에선 당일치기로 갔다 오라는 걸 비행편이 마당치 않다는 핑계로 1박을 하게 된 것이고. 야스민이 여행사에 있으니 그런 스케쥴이야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운도 좋은(?) 신혼 여행길 같은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아데네 공항에 도착 한 것은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서 였다. 에게해의 코발트빛 비슷한 파란 물빛이 창가에 비치는가 싶더니 비행기는 사뿐히 내려앉는다. 트랩을 나서니 푸른 나무숲이 보이고 삭막하고 건조하기만한 쿠웨이트하곤 우선 공기부터 다르다. 산소가 풍부한 듯 산뜻한 향기도 있어 가슴을 펴고 크게 힘껏 마셔 본다. 먼저 택시로 대리점을 찾아 섭외해 놓은 대로 부품을 인수하고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 당시는 택배니 인터넷, 팩스가 없던 시절 1983년도 여서 급하면 일일이 샘플들고 찾아가서 부품 구매를 해야 했다. 스팩 전달이 쉽지 않아 쉽사리 항공화물 주문도 꺼려하던 시절이다. 도면도 보내려면 우편으로 시간이 걸리고 오직 전화와 테렉스만이 있던 시절이어서 그런 불편이 두 사람의 커플여행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야스민은 이곳 그리스를 친구랑 두 번이나 여행을 했다고 한다. 누가 볼까 봐 얼른 선 글래스를 꺼내 낀다. 그 모습이 허리우드 인기 여배우 못지않다. 캬롤베이커 닮았다. 저 여자가 과연 자기 여자일까 호준은 생각이 들고 매혹적인 자태에 떳떳지 못한 교재를 만드는 것 같아 한편으론 왠지 야스민이 가엾어 지기도 한다.
관광객이면 누구나 찾는 곳이라는 아테네 시내 언덕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또 작은 신전을 먼저 봤다. 그 육중한 돌기둥들이 그 옛날 기중기도 없이 어떻게 들어 올려 졌는지 신기했다. 깨진 돌 장식물들을 모아 놓고 대수리 공사를 장기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멀지않은 곳에 소크라테스가 감옥생활을 했다는 철문달린 토굴 같은 곳도 돌아보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호준으로서는 그리스 관광이 이때가 기회였는데 야스민을 생각해서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유적지를 더 돌아보기에 하루라는 시간은 무리일 것이다. 호준을 생각해서 안내를 해주고 다른 곳을 더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묻었지만 그만 하자고 했다.
영화에서 봤던 메테오라의 그 절벽 수도원도 보고 싶었고. 그림으로만 봤던 하얗다 못해 동네 전체가 희고 푸른 물감 통 속에 담갔다 빼놓은 듯한 작은 집들과 계단, 그것을 덮은 코발트 빛 파란 지붕, 누가 신들의 동네라고 명한 산토리니 섬도 못가 보는 게 많이 후회도 됐지만 언젠가 다시 찾을 기회가 있으리라고 달래면서 들어가 쉬기로 했다.
야스민이 잘 알아서 예약해 놓은 곳이라 그런지 호텔 룸이 널찍하고 깨끗하고 화려하다. 창문을 여니 바다가 푸른 이온음료처럼 거품도 보이며 출렁인다. 야스민도 즐거운 듯 윗옷을 벗어 던지고 호준에게 달려들어 뽀뽀를 하며 팔을 감는다. 조신한 신부타입은 못될 듯 자기가 뭐든 앞장을 서야 도리인줄 아나보다. 호준 보고 먼저 샤워를 하란다. 같이 하자고 했더니 눈을 살짝 흘긴다. 그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녀를 한 번 번쩍 들어 안았더니 무게가 만만치 않고 무거워 얼른 내려 놨더니 투정이다. “노오!” 매너가 없단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식탁엔 2개의 와인 잔에 찬 맥주가 넘실거린다. 여러 열대 과일도 큰 접시에 담겨져 있고 육포 같은 마른 안주도 있다. 맥주 구경을 다하다니 알콜이 없는 맥주라고 숙소에서 마셔본 적은 있다. 야스민의 사려 깊은 준비성과 마음에 감탄까지 하면서 한잔을 들이켰다. 이런 분위기 처음 경험하는 호준으로선 너무 호사하는 것 같아 왠지 불안 하기까지 하다. 샤워를 얼른 마치고 나온 야스민은 팬티만 입고 가벼운 까운만 걸치고 자리에 앉는다. 그러더니 그녀도 맥주잔을 들어 ‘치어스!’ 하잔다. 잔을 부딪히고 몇 잔이 비워진다. 그렇게 서슴없이 같이 마시는 야스민을 보고.“ 유 룩 낫 아라비언!” (넌 아랍사람 같지 않다).했더니
“학생 때 영국, 프랑스에서 많이 마셨어.” “ 지금도 집에 맥주는 있어.”
“그래? 그러면서 일반인들은 술을 못 먹게 하잖아.?”
“그건 코란에 술과 돼지고기,또 마약을 금하는 건 건강과 정신을 해친다는 거지. 기호품까진 생각을 못했나 봐”
“무슬림 국가인 바레인과 이라크 이집트는 술을 팔더라.”
“그래 쿠웨이트도 아마 10년 후면 많이 달라 질걸”
“여자들의 참정권 인권 제도가 먼저 개선 되어야 한다고 보지”
“맞아요. ‘쿠웨이트의 여자’를 쓴 시인 ‘수아드 알 사바’가 우리 친척이 되요.
여성 인권 운동가이기도 하고 왕족으로 사회사업가이며 노벨상 후보로도 오른 우리여자들의 희망이 되는 사람이야.”
“그래! 나도 그분이 쓴 시 ”미친 여자“라는 몇 편을 읽어 봤지. 대단 하더라”
“읽어 봤어? 어떻게 아랍어를 알아?”
“우리나라 글로 번역이 되어 책으로 나왔고 우리나라 어떤 문학상도 받으러 한국에 오기도 했었지.”
“그래요? 기억 나는 거 있어?”
“ 조금, 읊어볼까?”
당신 남자들은 지혜로 충만하여
한 여름의 녹음을 만끽하지만
난 지혜롭지 못하여 한 겨울 들판에 서서
한파에 맞섭니다.
난 예민한 여자입니다.
남자가 내 귀에 숨을 몰아넣으면
내 몸뚱이는 연기처럼 공중을 유영합니다.
난 마치 대양에서 길 잃은 물고기처럼 방랑하는 여자입니다.
언제 당신은 나를 구속에서 풀어 줄 건가요
외투 주머니에 내방 열쇠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여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이여
하지만 당신은 북극에 있고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은 적도에 있습니다
나는 나의 조국을 사랑 합니다
당신의 심장에는 감귤 나무가 있습니다
나의 조국만이 나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테러와 전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통 받는 일반 아랍여성들의 아픔을 여성의 섬세한 손길로 잘 어루만진 글이라고 본다. 호준이 떠듬떠듬 영어로 번역해 읽은 이 시를 들으며 야스민은 자기도 장차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얘기한다.
잠시후 두 사람은 정해진 일인 것처럼 손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마치 결혼 초야에 하는 의식처럼 서로의 옷을 천천히 벗기고 서툴지만 소중하고 부드럽게 깊게 그 의식을 치뤘다.
하루뿐인 이 시간을 두 사람은 알고 있으므로 그냥 룸에서만 보내긴 너무 아까워 저녁은 바람도 쏘일겸 나가서 하기로 하고 거리로 나섰다. 아테네의 상징이라는 산타그마광장을 돌아보고 그리스의 케밥이라는 수불라키도 호준과 야스민은 하나씩 입에 물고 그 맛을 음미하며 둘이는 처음 팔장을 끼고 걸었다. 그러다 나이트크럽 같은 유흥장을 발견하니 야스민이 춤추자고 잡아끈다. 호준은 사교춤은 영 모르는 것이라 또 숫기도 없고 기가 죽어 손에 끌려 들어가긴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홀을 꽉 메우고 단체로 몸을 흔들고 있다. 가수인 듯 경쾌하고 느린 째즈풍의 음악이 흐른다. 서울에서도 한 두 번은 본 풍경이다. 그 율동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야스민이 그 물결속으로 잡아끈다. 둘이는 음악에 맞춰 따라 몸을 움직여야 했고 야스민은 금방 신이 나 했다. 호준은 옆 사람 움직임만 보고 열심히 따라 했다. 그나마 대학 때 공부 안하는 녀석들과 몇 번 가본 것이 그나마 이 때 도움이 되는구나 생각하니 배워 나쁠게 없구나 생각하며 픽 웃음이 지어지기도 한다. 거의 두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후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오렌지 나무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었다. 금쪽같은 이날 하루였다. 피곤도 잊은 채 침대에 올라 둘이는 거의 뜬 눈으로 그 밤을 밝혔었다.
꿈속 같던 그리스 출장이 끝나고 복귀해 두 달 가까이 현장 근무에 여념이 없이 지내는데 어느 날 늦은 시각에 누가 호준을 찾아 왔다고 한다.
쿠웨이트 정부 종교경찰이라고 했다. 박 과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호준을 그들에게 안내한다. 그들 두 사람은 못 알아듣는 아랍어로 ‘성 호준’ 이 맞느냐는 것이다. 그리고는 차에 태워 어디론가 그를 데려가려고 한다. 호준은 올 것이 온 거 같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지만 그들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말도 안 통하는 이들의 동행 요구에 무슨 보여주는 영장 같은 것도 없다. 급하게 회사 아랍어 통역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은 즉슨 호준이 이 나라 풍속법 위반같은 법 위반으로 조사할게 있어서 데려 간다는 것이다.
데려 간 곳은 쿠웨이트 경찰서가 아니라 그랜드 모스크를 지나서 어느 관공서 건물 같은 데로 갔다. 실내가 비교적 장엄하고 조용하다. 어느 방으로 안내되어 기다리니 영어 통역과 같이 풍채 좋은 현지인이 나타난다. 다시 호준의 이름을 물어보고 야스민을 아느냐고 묻는다. 답변을 하니 다시 또 호준을 어디로 데려 간다. 그때 까지도 야스민에게 전화를 해서 이 상황을 알려 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기회가 없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라 상황 봐서 전달할 때가 있겠지 했다. 옮겨간 곳은 응접실이 넓은 고위직 집무실 같다.
그곳에서 깨끗한 구투라(천)에 까만 아가리(테두)를 올린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천천히 집무실로 들어온다. 엄격해 보이지만 어딘가 야스민을 닮은 얼굴이다. 그분이 바로 야스민의 아버지 마흐므드였다 이 곳은 이 나라 환경교통부 장관실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바로 야스민의 아버지가 그 직책을 맡고 있는 곳이었다.
조사관들이 호준의 국적과 소속회사와 직책과 이름을 묻고는. 영어로 심문한다. 그것을 노인은 바라만 보고 있다.
야스민을 왜 만나느냐고 묻는다.
“여행사 일로 만나게 됐다”고만 말하곤 더 이상은 끊었다.
“지금 당신은 이 나라 법을 위반하고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모른다”
“풍기 문란죄를 짓고 있다.”
“몰랐다”
“다시 또 만날 생각인가?”
“.....”
“계속 만나고 문제를 일으키면 구속되고 재판에 넘어가면 최소 징역 5년에 추방이다.”
“조심하겠다”
“약속 할 수 있나?”
“선처를 베풀어 주면 약속 하겠다”
“.....”
한 동안 말없이 그들은 노장관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언질을 받았는지,
“이번일은 장관님의 특별 배려로 구속없이 훈방하니 절대 다시 만나거나 문제 일으키지 마라. 이런 케이스는 전에 없었다.”
호준을 유심히 살펴보던 노장관은 말 한마디 없이 천천히 일어나서 자리를 뜬다. 장관자리의 직권으로 아마 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도 조용히 매듭을 짓고 싶지 않았나 싶다..
밖에 나오니 부서 부장님하고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대사관에서도 직원이 나와 지켜보며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내가 한 번 얘기 했었지. 조심 하라구. 조마조마 하더라니까.” 정말 다행인줄 알아. 큰 문제되면 회사까지 지장 있는 거 알지?
“예,...죄송합니다.....” 호준은 정말 죄인 된 심정이었다.
먼 해외 일터에서 추방이나 교도소를 간다는 게 말이 되는 일 인가.. 이국 만리까지 떠나와서 힘든 일 하며 서로 직원과 가족들 생각해서라도 이런 문제는 호준이 일으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랍의 맹주 사우디 아라비아에선 이런 경우 가혹한 제재와 형벌이 따른다고 했다.
먼저 외국인이 그 나라 여자를 건드리는 경우, 경미해도 태형(곤장) 최소 60대 그리고 징역형과 추방. 유부녀를 농락했을 땐 돌로 쳐 죽이는걸 목격한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자기 집에 고용한 필리핀 메이드(하녀)를 건드려도 별 입건도 안하고 오히려 여자를 매질 하거나 추방시킨다는 고무줄 율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야스민은... 어떻게 한다...? 야스민과의 관계를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결정일지 알지를 못하고 고민만 한체 또 한 달이 지나갔다. 야스민한테 전화를 해도 출근을 안 한다고만 얘기를 들으며 더 간절히 그녀의 소식이 기다려졌다.
그러던 어느날 전화가 왔다. 그녀 아빠가 여행사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집에만 있으라고 해서 갇혀 지내고 있다고 했다.
“준? 많이 속 상하지?”
“잘은 있는 거야?
“응, 집에서 엄마랑, 울기만 하고 있어. 사람이 날 지키고 있어 글쎄.”
“우리가 졸지에 로미오, 줄리엣이 됐구만.”
“맞아. 염려는 했지만 이럴 줄은....”“우리가 만나는 걸 누가 고자질 했어.
사무실사람인 것 같애”
“그랬구나.”
“내가 아빠한테 사정했어. 이제 안 만난다고. 준이 다치게 하지 말라고.”
“그래, 하여튼..... 이제 어떻게 하지?”
“우리,... 조금 기다려 봐. 방법이 있을 거야.”
이런 사정을 아는 부장은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도울 힘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큰 걱정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훈방 조치가 되어 천만 다행이라며 무조건 끝내고 자숙하란다. 형님 같고 직속상관이라 많이 의지를 하며 지낸다. 이젠 큰 벽에 부딪혔다며, 사람이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불행한 일을 만들지 모르니 잘 판단하고 그만 만나야 한다는 걸 충고처럼 여러 번 얘기한다.
며칠후 야스민한테 전화가 왔다. 쌀미야 해변가 던킨 도너스점 뒷길에서 그녀 남동생을 만나 달라고 한다 편지를 전해 줄거란다. 퇴근하듯 도로 주변을 살피며 그곳에 도착해 남동생을 만났다. 올해 19살이 되는 직계 동생이다. 이 친구도 방학이 되어 영국에서 들어와 집에 있다고 한다. 퍽 우호적인 미소를 띠고 의젓하다. 훤칠한 키에 아랍 전통 옷을 입고 나왔다. 일전에 차 사고 때 한 번 봤던 친구다. “앗 쌀람 알레이 쿰! 인사에 하이! 로 답하며 편지를 건네 받았다. 편지외에도 보자기로 싼 묵직한 찜통을 차에서 꺼내준다. 그녀가 만든 듯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음식 같았다. 애뜻한 야스민의 마음과 정성이 보이는 듯해서 마음이 더 뭉클해 진다. 호준도 그제사 답장이 생각 난듯 차로 가 급히 몇자 적어 봉투에 넣어 동생에게 전달을 했다. ‘아이 미쓰 유 투’ (‘나 역시 많이 보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보자. 나도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 ‘사랑해! 보고 싶다. 아주 많이.!!’ 악수로 그를 전송하고 캠프에 돌아와 동료들과 음식을 나누고 편지를 다시 꺼내 읽는다.
하이! 준. 많이 보고 싶어. 잘 지내는 거지? 준, 많이 힘들지?
아빠가 언제까지 나를 가둬둘지 모르지만 조금만 근신하면 엄마가 도와준다고 했어. 그때까지만 좀 참어. 하지만 우리도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애. 우리 유럽으로 가서 살면 어떨까? 준은 한국의 부모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거 알아. 나도 취직해 돈 벌수 있어. 여행사 일도 괜찮고 영어교사 일도 할 수 있어. 자격증 있어. 우리의 지금의 시련, 준도 잘 이겨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늘 건강하구 야스민만 생각해. 사랑해! --당신의 야스민
2주가 지나 야스민으로 부터 또 전화가 왔다. 동생 만났던 그 도너스집 뒤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도로와 주변을 잘 살피며 단숨에 달려가 그녀를 만났다. 차에 올라타자 마자 호준의 앞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직 초저녁인데 눈물을 보이며 울기 시작을 한다. 그동안 얼굴도 핼쓱해 졌다. 눈이 쑥 들어가 더 그윽한 자태를 보이며 순박한 자태가 꼭 서울에서 본 사춘기 여중생 모습 같다. 어떻게 보면 좀 단순한 것 같기도 하고 길 안 들여진 야생마 같기도 하다. 허긴 우리네 여자들처럼 지난하고 궁핍한 시절 살아오면서 생활에 단련된 그런 모습은 야스민에게선 찾아 볼수 없으니 낯설긴 하다. 그냥 허툰 일만 저지를 부잣집 막내딸 같지만 콩깍지가 두껍게 씌었는지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은데도 그녀가 그냥 이뻐보이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야스민을 태우자마자 해변 도로를 벗어나 서부쪽 링 로드를 올라타고 사막 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흐느껴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위로가 필요 한 것일까 야스민 답지 않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아 "Stop!” 해도 그칠 줄을 모른다. “please....”해도 끝이 없이 울어 댄다. 그리고는
“아이 해버 베이비!”( 나 임신했어.) 3개월 이래 .
“왓? 리얼리?”(뭐? 정말?) .그러면 그리스에서 아이를 가지게 된 것 같아 계산이 앞선다.
“준? 임신 된거 준도 좋아?“ ”
“그래. 어떻게 안 좋아 할 수가 있어?”
“집에서는 알아?” 그게 제일 걱정 같다.
“엄마만 알고 있어.”
“그래? 괜찮은거야? 어떻 게 .....”
“돈 워리!.........
호준은 청천벽력이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다? 축복 받아 마땅한 일일텐데 야스민과 호준은 큰 걱정에 휩싸인다. 9월의 쿠웨이트는 격렬한 하리케인 같은 사풍(砂風)과 혹독한 더위도 이제 차츰 사그러 들기 시작할 때다. 그래도 한 낮은 40도 이지만 현장 공사도 속도가 붙고 저녁 외출은 꺼려지지 않을 만큼 거리가 붐비기도 한다. 이제 좀 지낼 만 할 때인데 큰 일이 닥친 것이다.
제3국으로 넘어가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그렇게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이럴 때는 철이 없는 소녀 같다. 그녀의 어머니가 도와주겠다고 말했단다. 그녀의 어머니도 장관의 3번째 부인으로 예전에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인 것 같다. 그 어머니 또한 4년 전, 50대와의 야스민의 정략적 결혼 중매에 대해 적극 반대 했고 자기처럼 야스민은 살지 않기를 바랬다고도 한다.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부유층의 자녀로 충분히 순탄한 미래가 보장도 됐을 터인데 이방인 동양사람 호준을 만나 고초를 겪게 한다는 게 마음이 더 아프다. 호준 자신 또한 그의 미래도 귀국해 들어가면 집 장만하고 예쁜 처자 만나 결혼해 가정 꾸리고 평범한 삶 평범한 직장인으로 생활 하며 지낼텐데 하는 아쉬움도 겹친다.
이렇게 위협도 느끼고 모험도 감행해야 할 일이 과연 지금 호준이 감당 할 수 있을지도 심히 고민스런 일이지만 자신이 택하고 저지른 일에 대해 회피하고 무력해지긴 싫어한다. 사랑하는 야스민과 임신한 아이를 위해서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의무를 다하고 싸울 것이라고. 국가적으로도 야스민과 잘 이루어져 결혼으로 맺어만 진다면 국익에 해당되는 일이라고 대사관 직원은 용기를 주기도 했었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신문에 날 일이고 기자들이 몰려 올 일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이 나라 현재 왕 자비르 아흐마드 알 사바흐의 8촌이 되는 권력자인 마흐므드장관의 딸을 우군으로 갖게 된다는 것은 이 나라 큰 공사 몇 건 수주 한거나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안 받아 들여질 경우 고난의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슬람의 하디스(코란에 이어 이슬람 제2의 경전)에는 무슬림들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이 가지며 아무런 이유 없이 부모가 종교적으로 신실한 남자라면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단다. 하지만 자녀의 결혼은 오직 남자인 아버지 혼자 결정을 다 해버리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이어 경전에는 교훈적인 얘기도 들어 있어 보인다
결혼의 반은 믿음이고 그 나머지 반은 인내다. 이것의 비교(秘敎)적 의미는 분명히 교리적이다. 즉 결혼은 결합의 즐거움을 인정해 줄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존재자 안에서 그들의 형이상학적 원형으로 재통합시켜주는 수단이다. 즉 대 섭리(신)로의 회귀인 것이다.
여자는 절대자 앞에서 무궁해진다. 남자는 여자의 무궁함속에 스며들어 사라진다. 각각은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사막은 이날도 두 사람을 위한 조용하고 아늑한 자리를 베풀었다. 대지는 보드랍고 구름은 바람을 따라 모양을 바꾼다. 그 사막은 다시 태양의 정오를 기억하고 석양의 지평선을 불태울 준비를 하고 있다. 조용히 애무하듯 짙고 느린 생각의 흐름속에 호준은 머언 구름따라 그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둘이서 함께 어디론가 무심히 떠내려 가고 싶다. 어둠이 오고 밤하늘엔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이 고단한 두 사람을 감싸주는 듯하다. 이들에게도 장밋빛으로 물드는 조용하고 신선한 행복감으로 충만한 아침은 있을 것만 같다. 우주의 어떤 질서처럼 다가온 그녀와의 사랑에 대해 두 사람의 미래는 벌써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택한 야스민이다.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다.
아직은 이 나라의 여성들, 남성들과 같은 동등한 인권과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알라신의 실수 일 것만 같다. 어떻게 한 남자가 서너 명의 여자를 차지하고 돈으로 거래도 이루어지는 축첩제도가 과연 정당한 율법인지 이제는 이들도 눈을 떠야 할 것 같다. 이 나라 여류시인 수아드 알 사바의 외침처럼 오랜 잘못된 제도가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면서다.
호준은 생각해본다. 당장은 이런 상황 헤쳐 나갈 어떤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다. 이곳에 와서 어쩌다가 이렇게 운명적 만남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금지된 교제인 걸 알면서 호기심 였는지 아님 진정 그것이 사랑 인지. 자신의 처지와 자제도 모르고 쉽게 야스민에게 끌려 자신과 그녀 다같이 힘든 상황을 만들고 만 것이 과연 잘 한 일이었는지 몇 번 이나 뒤집어 봐도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단순하게 신의 섭리일지도 모른다는 편한 생각으로 일관 한 게 과연 맞는 일인지 후회스럽지 않다. 다만 잘 안 풀리면 회사에 누를 끼치게 될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운명의 모난 굴레를 자초해서 떠안게 된 것 같지만 이렇게 된 것 이 다 호준의 운명이라고 명분도 가치도 있는 일이라고 고집 한다 .야스민도 애타하며 용기를 주는 만큼 그녀에게 입지를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다 호준 자신 탓이니 끝까지 헤쳐 나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도 키운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차가 들이 닥친다. 방송사 기자들까지 합세해서 온 것 같다. 현장 사무실 앞은 현지인과 구경꾼까지 금새 복작인다. 본부장이 나오고 통역이 열심히 언성을 높이지만 준을 경찰차에 태운다. 이번엔 제대로 범법 처리를 할 모양 같다. 바짝 긴장이 된 준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어둡다. 준은 경찰차에 실려 회사를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부장과 박과장이 급히 차를 몰아 뒤 따라 간다.
얼마 전부터 고민 끝에 준은 일단 귀국해서 결정하기로 할까 생각도 했었다. 아니 귀국 결정이 먼저가 아닐지도 모른다. 거대한 공룡 앞에 맞서 있는 자신의 처지가 많이 외로웠다. 야스민의 임신이 그녀의 부모나 쿠웨이트 정부가 알게 될 경우, 어떤 조치가 내려질지 모르는 일이어서 호준은 부장과 상의후 이틀 후 급하게 출국을 결정하기도 했었다. 회사 현장공사 일도 어느덧 기성이 60% 진척이 있어 그나마 호준이 빠져도 될 일 같고 대체 인력이 올 것이었다. 그것이 하루 사이에 처지가 바뀌게 된 것이다.
다음날 현지 신문에 두 사람의 연정 얘기가 2면에 크게 보도가 됐다. 호준의 사진과 함께.
(2편에 계속)
(원고지 9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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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용히 한가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 뭐.인터넷들 하는 동창친구가 별로 없으니 이럴수 밖에
역시 댓글도 없구만. 그래도 누가 읽었는지 많이는 읽어 줬구만. 감사하고 이 새봄에 기력들 찾아 봄놀이도 잘들 다녀 오시길. 또 보기로 하고......
인터넷을 할수있는 사람도 안올리는데 더이상 뭘바라나요 ㅋㅋ 여전하십니다 잘 읽어보았읍니다 넘 대단하시고 쫗아요 건강하세요
읽을 시간이 없었네
바다건너 이곳 와이오밍에 와서야 자네글을 읽게되네~~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것 같으니 보기에 좋구만
또 연락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