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길, La Strada> ]
전후의 이탈리아, 황폐한 도시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빈민, 이때의 영화를 네오 리얼리즘이라고 하여 어둡고 황폐한 이탈리아의 모습을 잔잔히 그려낸 영화들이 나왔습니다. (사진, 가련한 여인 젤소미나)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이라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 그리고 비토리오 데 시카의 <움베르토 D>와 <자전거 도둑>에서 보여준 지독하게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 이 두 감독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의 40-50년대 영화는 다시 이탈리아의 삼각 거장으로 일컫는 루키노 비스콘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그리고 페데리코 펠리니로 이어졌습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중 <길>과 <8과 1/2>은 세계 영화사상 역대 최고걸작을 선정하는 목록에 단골로 상위권에 오르내리는 작품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난해한 <8과 1/2>보다는 친근하고 서민적인 영화 <길>이 훨씬 가까이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펠리니 감독은 길에서 우리나라의 신상옥 감독처럼 자신의 아내인 줄리에타 마시나를(사진,짐승같은 차력사 잠파노)
주연으로 내세워서 영화를 찍었습니다. 감독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는 것도 신상옥-최은희 부부와 닮은 점이고, 여배우가 썩 뛰어난 미모가 아니지만 감독의 영화에 잘 어울리는 배우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합니다(그러나 최은희는 마시나보다 훨씬 미모였지요).
물론 줄리에타 마시나가 출연한 영화중에서는 펠리니 감독이 아닌 다른 감독의 작품이 훨씬 많습니다. <카비리아의 밤>과 <영혼의 줄리에타> 등이 <길>외에 남편이 감독한 영화에 출연한 대표적 작품입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 <길>하면 떠오르는 것은 구슬프게 들려오던 니노 로타의 선율(젤소미나의 테마)일 것입니다. <길>이라는 짧고 단순한 제목처럼 이 영화는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잠파노와 젤소미나'라는 극중 이름도 너무나 유명해졌을 정도로 <길>은 대중들에게 높이 각인된 작품입니다. 오토바이로 포장수레를 끌고 다니며 쇠사슬을 끊는 묘기를 보여주면서 <길>에서 살아가는 잠파노(안소니 퀸 분)과(사진,포장수레)
그를 따라다니며 조수역할을 하는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분)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굉장히 묘하고도 애매한 사이입니다.
둘은 표면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정상적인 부부관계처럼 보이지 않으며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부려먹고 말을 안 듣는다고 두들겨 패기도 합니다. 젤소미나는 그런 잠파노를 원망하며 떠나려고도 하지만,정작 떠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잠파노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거칠고 투박한 잠파노, 바보같고 순종적인 젤소미나, 이러한 어울리지 않는 이 커플이 벌이는 생활은 굉장히 고달프고 공허합니다.
삶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않으며 그래서 생각을 할 이유가 없이 살아가는 잠파노,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괴로워하는 젤소미나,이런 두 사람 사이에 줄타기를 하는 어릿광대(리처드 베이스하트 분)의 출현은 잠파노와 젤소미나의 이런 일상적인 삶을 깨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젤소미나는 광대를 따라 떠날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잠파노에게 자신이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잠파노의 곁을 지키게 됩니다.
젤소미나에게 단 한 번도 다정한 말을 해주지 않았던 잠파노... 결국 뜻하지 않은 살인으로 젤소미나와 헤어지게 된 잠파노....(사진,회한에 잠긴 잠파노)
<길>은 전형적인 라스트씬의 기억을 심어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내 애절한 사랑도,애증도,그리운 만남이나 이별도 없이 하녀를 부리듯 젤소미나를 대하는 잠파노의 모습은 바뀔 줄 모르는데...
두 사람이 헤어지고 몇 년이 흐른 뒤 우연히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잠파노가 취한 채 바닷가에서 울면서 절규하는 라스트 장면은 <길>이라는 영화를 관객들의 뇌리에 깊고 구슬프게 심어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안소니 퀸 ]
영화 속에서 거칠고 투박하고 단순 무식한 역할에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안소니 퀸은 배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더 이상 깊을 수 없는 연기를 통해 알려주었습니다.
영화 <길>에서는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로,<노틀담의 꼽추>에서는 꼽추 콰지모도로,<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천하의 자유인 조르바로,<25시>에서는 전쟁의 희생자로...
안소니 퀸은 1915년 4월 21일 멕시코 북부 치와와에서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인디언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안토니오 루돌포 옥사카 퀸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판초 비야의 혁명군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혁명세력이 와해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농업노동자로 전전하다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습니다.
퀸은 10세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소년 가장이 되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공사장 심부름꾼, 내기 권투선수 등을 전전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힘겨운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남자와 재혼한 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온 뒤는 더욱 더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는 돈받고 스파링 파트너를 해주는 권투선수였고, 시멘트공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전기 수리공이기도 했습니다. 고생 때문에 일찍 성숙한 얼굴을 가지게 된 퀸을 다른 거리소년들과 구분해주는 점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고 또한 건축물 스케치 대회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그 라이트는 퀸이 부정확한 발음을 고치고 오면 조수로 써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서 배우학원에 잡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등록한 그는 연기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여배우 매 웨스트에 의하여 18세에 <깨끗한 침대>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처음 섰습니다. 이 연극에서 퀸은 육십을 넘은 노인역이 주어졌습니다.
이후 주연급은 아니었지만 그는 곧 거장 세실 B. 데밀(십계, 삼손과 데릴라의 감독)의 <평원아>에 출연하게 됩니다. 리얼리티를 목숨처럼 여겼던 데밀은 순수한 샤이언족 인디언 배우를 찾고 있었숩니다.(사진,, 희랍인 조르바에서)
아일랜드와 멕시코 원주민의 피가 섞여있는 퀸은 데밀을 찾아가 자신이 샤이언족이라고 구라를 쳤고 데밀은 이를 그대로 믿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퀸의 연기력을 영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데밀은 그를 퇴짜를 놓을려고 했었는데 이때 그를 살려준 것은 대배우 게리 쿠퍼였습니다. 쿠퍼는 “퀸이 수더분하고 착하게 생겼는데 한번 써 봅시다”해서 퀸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곳에서 퀸은 배우로서의 경력과 함께 첫 번째 아내이자 데밀의 수양딸인 캐서린 데밀을 한꺼번에 얻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데밀은 배우로서 그랬던 것처럼 사위로서의 퀸도 끝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튼 할리우드 실력자의 사위가 되어 차츰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넓혀가던 그는 1940년대 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자, 동료를 빨갱이로 고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의 연극무대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명장 엘리아 카잔의 눈에 띈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았던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고,(사진, 25시에서)
이어서 1952년에는 카잔이 감독한 <혁명아 사파타>에 출연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사파타(말론 브랜도 분)의 동생 역을 맡아 혁명의 조력자에서 술주정뱅이로 타락하는 연기로 1953년 아카데미상의 남우조연상을 받게됩니다.
1954년에는 네오리얼리즘으로 세계 영화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에서 차력사 잠파노 역으로 출연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56년에는<열정의 랩소디,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에 고갱 역으로 8분간 출연, 주인공 고흐역의 커크 더글러스보다 빛나는 연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두 번째 아카데미상의 남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1964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희랍인 조르바>에서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과 천하의 자유인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조르바 역을 맡아 절정의 연기를 보였습니다.
그는 "내가 바로 조르바"라고 말할 정도로 조르바라는 인물을 평생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으며, 1983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동명의 뮤지컬에서 다시 이 역을 맡기도 하였습니다.(사진,나바론의 요새에서)
이후 <노트르담의 곱추>, <나바론 요새>), <바라바>, <아라비아의 로렌스>, <25시>, <사막의 라이온> 등을 비롯하여 150편이 넘는 영화에서 거친 남성적 캐릭터로 선 굵은 연기를 보이면서 영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노년에는 회화와 조각에 몰두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198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선포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그의 그림이 실렸으며, 1998년 말에는 조각가인 아들 로렌조와 함께 방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세명의 아내와 두명의 정부(情婦)로부터 열세명의 아이를 얻은 그는 “우굴거리는 자식들은 내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습니다. 80세가 넘은 나이로 47세 연하의 여비서 캐시 벤빈과 결혼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사생활이야 어쨌든 영화사적으로 수많은 걸작과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안소니 퀸은 2001년 3월 향년 86세의 나이로 미국 보스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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