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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회의 파주 나들이
I. 사수회
어? 을지로 4가? 아차차! 내려야지. 그러나 전철 문은 자기 내릴 곳도 못 챙기는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이 바로 내 코앞에서 문을 닫아버린다. 할 수 없이 을지로 3가에 내려 4가에서 나를 픽업할 상직이 형에게 전화를 하고는 지상으로 올라간다.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차를 대는 상직이 형. 상직이 형 차를 타고 파주로 향한다. 오늘(2013. 4. 9.)은 사수회 회원이자 파주문화원 책임연구원인 권효숙님이 이끄는 역사 세계로 들어가는 날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역사 세계가 펼쳐질까? 매번 답사 갈 때마다 모르던 새로운 사실(史實)을 알게 될 때의 그 희열감이란!
참! '사수회'라고 하니, 뭘 사수(死守)하겠다는 건가 궁금해 할 것이다. 죽도록 뭘 지키겠다는 것은 아니고, 역사를 지키자는 것, 그래서 사수회(史守會)다. 작년 봄에 김영조 선생이 열강하는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 강좌가 있었다. 그 강좌를 통해서 우리가 매일 몸 부비며 살고 있는 서울의 숨겨진 역사, 문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끝남을 아쉬워하는 술자리에서 상직이 형이 강의가 끝났다고 각자의 공간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라 모임을 지속적으로 갖자고 제의하였다. 상직이 형은 내가 소개해서 이 강좌에 나온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이 앞장서서 모임을 만들자고 하는데, 내가 빠질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고교 선배이자 공군 선배장교인 상직이 형이 모임을 하겠다는데, 내가 빠진다면... 후유~~ 뒷일이 무서워서 가입하였다. 그리고 부회장을 맡으라는 상직이 형의 협박에도 끽소리 할 수 없었고... ^.^;;
파주시 와동동의 '갈비와 밀밭' 식당에서 - 갈비와 밀밭이 어떤 궁합이지? - 점심을 해결한 회원들은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 유적지로 향한다. 법원읍이라고 하니까, 법이 없으면 굶어죽을 나로서는 당연히 이름에 눈길이 간다. 더군다나 한자로도 '法院邑'이지 않은가? 나는 도대체 이 작은 동네가 법원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틀림없이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겠지 하며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건가? 읍으로 승격하기 전의 법원리는 법의리(法儀里)와 원기리(院基里)의 두 마을을 합치면서 이름도 법원리로 합친 것이다. -_-;; 차 앞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 일기예보에 곳에 따라 약간 비가 오는 곳도 있다고 했지.' 그런데 계속 가다보니 앞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뭔가 좀 이상하다. '왜 그렇지?' 이런! 눈이다! 4월에 내리는 눈! 이거~ 날씨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한 여자 회원은 이제 봄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며 반팔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II. 율곡 유적지
1:35경 율곡 유적지 주차장에 차를 댄다. 율곡 선생 가족들의 묘와 율곡을 모신 자운서원을 한 울타리로 하고, 그 안에 율곡 기념관을 두어 전체적으로 율곡 유적지라 한다.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율곡 이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여기서 다시 율곡 선생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꺼낸다면 하품만 낼 테니, 율곡에 대해 눈에 띄는 것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도록 하자.
율곡은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리었다. 나는 처음에 무엇 하러 9번씩이나 과거를 보아 다른 사람 과거 붙을 것 하나 떨어뜨리나 했더니, 초시, 복시 등 대과에 이르기까지 9차례에 걸친 시험에서 장원을 하였다는 것이다. 권선생은 정확하게 9번 장원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장원급제라면 그 답안도 명품답안이었을 것이다. 특히 율곡이 23세 때 과거시험 답안으로 제출한 '천도책(天道策)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에서는 율곡을 '해동의 주자'라고 일컬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채점위원이었던 정사룡은 율곡의 답안지를 읽고 나서 나머지 답안지는 읽어볼 필요도 없다며 율곡의 답안을 '一之本', 즉 최고의 답안으로 인정하였다.
그야말로 율곡은 천재였다. 그런데 권선생은 그런 율곡도 처음에는 과거에 떨어진 적이 있으며, 율곡의 과거 낙방에 퇴계가 위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 그래야지. 매번 장원만 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기죽어서 어떻게 하누? 퇴계는 율곡에 편지를 쓰며,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과거에 합격하는 것도 안 좋은 거라며, 낙방한 것은 장차 하늘이 크게 쓰려는 것이라고 위로를 했단다. 율곡은 노력하는 천재였다. 율곡은 20세 때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이를 실천하며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중 하나만 든다면 재물, 영예 같은 생각을 쓸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일을 처리할 적에 털끝만큼이라도 편의한 것을 택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니 더욱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우산을 쓰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간다. 바람까지 불어 문으로 들어서면서 겨울로 들어서는 것 같다. 저 앞으로 펼침막이 걸려 있다. 이곳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25호로 승격하였음을 경축하는 펼침막이다. 어? 아직 사적지가 아니었구나. 퇴계가 있는 곳은 진작에 사적지로 되어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학문적으로도 이(理)를 중시하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보다는 율곡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 마음이 가는데, 성리학에서 율곡은 퇴계에 비하여 저평가 되어있다. 아마 이는 율곡이 한 때 불교에 빠져 금강산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율곡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불교를 공부하기도 하였다. 율곡으로서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하며 불교에서도 이를 구해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고루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율곡의 이러한 전력을 문제 삼아 비판하였다. 심지어는 율곡이 머리 깎고 중이 되기까지 하였다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율곡은 다른 양반들이 자신의 이런 약점을 들어 공격하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문정왕후가 기용한 보우대사를 요승이라고 앞장서서 비난하였단다. 율곡도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가. 율곡 기념관
먼저 율곡기념관으로 들어간다. 정면 오른쪽으로는 율곡의 초상화가, 왼편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한다. 그런데 어머니나 아들이나 다 비슷한 나이 때 초상화를 그렸는지, 어머니와 아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기보다는, 꼭 부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 같다. 이걸 보니 사직단 – 아직도 사직공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명칭을 바꾸자 – 뒤편 마당에 좌우로 나란히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의 동상도 부부처럼 보이던 것이 생각난다. 이렇게 모자의 초상화를 나란히 걸어놓으려면 그에 맞는 초상화를 걸어놓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하긴 예전에 아무리 양반이라도 초상화를 자주 그리지는 아니했을 테니까, 이 초상화 밖에 없었다면 다른 방도가 없겠지.
그런데 나는 그저 막연히 ‘신사임당, 신사임당’ 했는데, ‘사임당’이라는 당호도 그냥 지은 것이 아니다. 당시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고 하여 ‘師任堂’이라고 지었단다. 태임은 문왕을 임신하였을 때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며, 입으로는 거만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태교(胎敎)를 이야기 할 때에 태임의 보기를 많이 든다고 한다.
홀에는 양옆으로 그림이나 서예 작품이 디지털 화면으로 펼쳐졌다 사라지고, 다시 다른 작품이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눈에 익은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도 나타난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얼마나 초충도를 사실적으로 그렸나 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려 마루에 널어놓았는데, 거기에 메뚜기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 닭이란 놈이 그게 실제 메뚜기인 줄 알고 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면에 나타나는 초충도에는 메뚜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그냥 땜방으로 처리되어 있다. 신라시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도를 그렸더니,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고 하더니, 신사임당의 그림도 그런 경지일 줄이야. 사임당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이다. 난설헌도 사임당처럼 자신을 이해해주는 시가(媤家)와 남편을 만났다면 27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을 텐데... 난설헌이 사임당만큼이나 살았으면 사임당을 능가하는 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펼치지 않았을까?
그런데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자녀들에게도 전해졌다. 화면에는 막내아들 이우의 서예 작품도 나타난다. 이우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 시, 거문고에도 뛰어나 4절(四節)로 불려졌다고 하는데, 워낙 형 이이가 유명하여 형의 그늘에 가려져 우리가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화면은 바뀌면서 매창의 그림이 나온다. 나는 매창이라고 하여 그 유명한 부안 기생 매창이 율곡과 무슨 로맨스가 있었나 했더니, 율곡의 누나 이름도 매창이다. 매창도 어머니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리고 학문이 높아 ‘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리었단다. 그런데 율곡의 여자 형제 이름들이 재미있다. 매창, 매화, 매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딸들이 매화 같이 예쁘고 지조 있으라고 매(梅)를 돌림으로 하여 딸들의 이름을 지었구나. 뜻은 좋지만, 자꾸 기생 이름이 생각나서... -_-;;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율곡의 가계도가 나온다. 이제 봤더니 율곡은 부인을 3명 두었다. 본처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두 명의 부인을 더 두었으니까, 쉽게 말해 첩을 두었다는 얘기다. 조선 시대야 첩을 두는 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율곡 같은 대유학자까지 첩을 2명이나 두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권선생님 말씀은 본처 곡산 노씨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여 둘째 부인 전주 김씨를 얻었고, 둘째 부인마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자 셋째 부인 용인 이씨를 얻었단다. 물론 율곡이 ‘옳다구나!’ 하며 얼른 첩을 둔 것은 아니다. 율곡이 37살인가 되었을 때, 대를 끊을 거냐는 문중 어른들의 강압에 둘째, 셋째 부인을 둔 것이다. 어쨌거나 율곡은 3명의 부인을 둔 행복한 사내 아닌가? ^.^;;
결국 율곡은 셋째 부인에게서 원하던 아들을 얻었고, 뒤늦게 둘째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두 아들은 서자다. 조선은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이가 엄연히 있는 나라 아니던가? 그러니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슬픔을 얘기하였지. 그래서 주위에서는 율곡에게 양자를 들이라는 권유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율곡은 이런 제의를 단호히 거절한다.
첩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초년병 판사 때 가사 재판하던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가사 재판에 친생자 부존재 확인 소송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예전에 남자들이 첩에게 난 자식이나, 어디서 바람피고 난 자식의 출생신고를 할 때에 본처를 어머니로 하여 출생신고를 많이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커서 자기 생모를 찾아 호적에 올리려고, 적모(嫡母)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며 친생자 부존재 확인 소송을 많이 냈던 것이다. 요즈음은 이런 소송이 그때에 비하면 엄청 줄었다고 할 것이다. 요즈음 그렇게 밖에서 아이 낳아 들어오면 호적에 올리기는커녕 잘못하면 뚜들겨 맞을 테니까 그런 소송도 줄어들었겠지? ^^
그런데 기념관을 돌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율곡이 쓴 간찰(簡札, 편지)이다. 그냥 간찰이 아니다. 율곡이 황주기생 유지에게 보낸 간찰이다. 아니 부인이 셋씩이나 있으면서, 또 기생과 사랑놀이? 그렇게 정력이 좋았나? 율곡이 39살로 황해감사로 있을 때, 이 기생 유지가 율곡의 수청을 들었단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에 아내를 데리고 가지 못하니까, 공식적으로 수청을 드는 기생을 두었지. 그런데 율곡은 이제 갓 피어나는 어린 기생을 차마 꺾지 못하고 다만 공무가 끝나면 유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귀여워만 하였단다. 그리고 9년 후에 율곡이 명나라 사신 황흥헌을 마중하기 위한 원접사가 되어 평양에 갔을 때에 율곡은 다시 유지를 만난다. 이제 유지는 한창 피어오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이었다. 유지나 율곡이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율곡은 이번에도 참았다.
다음 해에 율곡은 황주에 있는 누님의 병문안을 가면서, 다시 유지를 만난다. 율곡이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곳에 머물렀을 때, 밤이 이슥한데 누군가 율곡의 방문을 두드린다. 유지였다. 세상에 그 어떤 남자가 자기를 못 잊어 먼 길을 따라온 여인을 만나보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낼 수 있을까? 율곡은 연지를 방에 들인다. 그러나 율곡은 이번에도 연지를 품에 안지 않았다. 율곡은 편지에서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문을 닫아건다는 것은 인을 상하는 것, 그렇다고 동침한다는 것은 의를 해하는 것). 율곡은 연지를 방에 들이고 병풍을 걷어치우고 밤새도록 연지와 이야기로 정분을 나눈다. 그리고 날이 밝자 율곡은 유지를 돌려보낸다. 율곡은 이렇게 연지를 돌려보내고 그 안타까운 심정을 편지에 담아 보낸다.
슬픔을 머금고 情人을 멀리 떠나보내나니 (含悽遠送以情人)
오랫동안 서로 알아 깊은 정까지 나누었네, (只爲相看面目親)
다시 태어나면 네 말대로 따르겠지만 (更作尹邢說爾念)
병든 사내라 정욕(心事)은 이미 재처럼 변해버렸네 (病夫心事己灰盡)
으~음~~ 과연 그랬나? 화담 서경덕도 황진이와 같은 방에 들면서도 끝내 황진이를 안지 않고 정신적 사랑으로만 참아 황진이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던데, 율곡도 그랬나? ‘다시 태어나면 네 말대로 따르겠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는 율곡의 안타까운 마음... 유지는 이런 율곡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율곡이 죽자 유지는 율곡을 위해 3년상을 보낸다. 율곡의 사랑보다도 더 많이 알려진 것이 퇴계의 기생 두향과의 사랑 이야기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있을 때 9개월간의 짧은 사랑을 남기고 퇴계가 떠나가자 기적(妓籍)에서 몸을 빼어 평생 퇴계만을 사랑하며 살았다는 두향이. 그리고 퇴계가 죽자 강선대에서 스스로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두향이.
퇴계도 율곡처럼 정신적인 사랑만을 나누었을까? 퇴계가 두향이를 사랑할 때에는 퇴계는 아내를 저 세상에 떠나보내고 난 이후라, 둘은 육체적인 연인으로까지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퇴계는 두향이 헤어질 때 선물한 매화 화분을 죽을 때까지 고이 키웠다. 퇴계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며 한 말도, 두향이가 준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것 아니었나? 퇴계는 평생 그 매화를 두향이로 생각하며 살아간 것이지. 기생과 양반의 사랑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는 송강 정철이 사랑한 기생 강아(江娥)의 무덤이 있는데 – 송강의 무덤도 여기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충북 진천으로 이장하였다 – 다음번에는 강아의 무덤을 방문하고, 소주 한 잔 올리며 강아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
돌다보니 지폐를 크게 확대해서 붙인 것이 있고, 또 군함 사진과 모형이 있다. 5만원 지폐에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5천원 지폐에는 아들 율곡이 있어, 우리는 매일 모녀를 만나고 산다. 한 나라의 돈에 얼굴이 실린다는 것은 전 국민이 그만큼 그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존경한다는 것이다. 그런 영광의 자리에 어머니도, 아들도 올라가 있으니, 모녀가 다 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퇴계는 1,000원자리 지폐에 얼굴이 나오니, 조선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율곡이 더 우대받는다고 해야 하나? ^.^;; 그런데 생뚱맞게 군함은 또 뭔가? 저 군함의 이름은 율곡함이다. 해군은 군함을 진수할 때 본받을 인물을 군함의 이름으로 명명한다. 이순심함이 있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광개토대왕함,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유성룡함 등등. 율곡함은 단순한 전함이 아니라 최신예를 자랑하는 이지스함이다. 해군의 군함이 ‘율곡함’이라는 이름을 쓴 연고로 해마다 율곡함에 새로 오는 장교들은 이곳 율곡 유적지에 참배를 온다고 하는군.
율곡기념관을 나서기 전에 율곡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 하나만 얘기하고 나가자.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임진강가의 화석정 얘기다. 우리는 보통 율곡이 죽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의주로 몽진갈 선조를 위해 화석정에 기름을 발라 놓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한밤중에 선조가 강을 건너야 하는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 화석정을 불태워 그 불빛으로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하지. 그러나 권선생은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실재로는 목재 창고를 불태운 것이란다. 혹시 뒤따라오는 왜군이 그 목재로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널까봐 불에 태운 것이란다. 덕분에 그 불빛으로 선조가 무사히 강도 건널 수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마침 목재 창고 근처에 있던 화석정을 생각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라. 화석정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화석정에는 율곡이 8살에 지었다는 시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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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나 되는 바람을 품었구나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聲斷暮雲中 기러기 소리만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나. 자운서원
어찌 8살짜리가 이런 시를 지을 수가 있을까? 율곡의 천재성에 다시 감탄하면서, 율곡기념관을 나와 자운서원으로 향한다. 자운서원은 당연히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사원으로, 1650년(효종 원년) 효종이 ‘紫雲’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율곡 이이를 모신 사원이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율곡과 쌍벽을 이루는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은 서원 철폐령을 벗어났다. 자운서원에는 율곡뿐만 아니라 율곡의 제자인 김장생(1548 - 1631)과 그 외에 박세채(1631 - 1695)도 모셔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일반적인 서원 배치와 마찬가지로 양옆으로 동재인 입지재(立志齋), 서재인 수양재(修養齋)가 있고, 정면으로 유생들에게 강론하는 강인당이 있다. 동재의 오른쪽 방에는 '사임당 선생 영당(師任堂 先生 影堂)'이라는 조그만 문패가 달려있다. 권선생은 신사임당의 영당을 정식으로 세우기 전까지 이곳에 신사임당의 초상화를 임시로 봉안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강인당 좌우로는 나이가 300년 되었다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들어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저 느티나무들은 철폐되기 전의 자운서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겠구나. ‘그때는 어떠한 모습이었니?’
내삼문 밖 오른쪽에는 숙종 9년(1683)에 세워진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묘정비의 내용은 송시열이 썼다고 하는데, 옆의 동판에 그 번역문을 새겨놓았다. 내용을 보니 신사임당이 용이 잠자리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율곡을 낳았기에, 율곡의 어렸을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하였단다. 율곡이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그런 태몽으로 태어난 율곡이기에 13살에 진사 초시를 합격하였다. 여기서 또다시 율곡이 천재 중의 천재임을 다시 실감한다. 그 밖의 내용들은 이미 우리가 역사에서 잘 배운 것들이라 다시 언급하지 말자.
강인당 뒤로 돌아가니 율곡의 위패를 모시는 문성사(文成祠)가 있다.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이다.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으나, 권선생은 가운데에 율곡, 오른쪽에 김장생, 왼쪽에 박세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예학의 대가 김장생은 율곡의 제자이고, 박세채는 평소 율곡을 존경하여, 율곡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에 대해 영남유생들이 반대할 때에 이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고 하던데, 이런 연유로 이들이 율곡의 좌우에 모셔진 것일까? 이제 문성사 옆문으로 나와 자운서원의 담장을 끼고 내려가는데, 노란 산수유가 때늦은 눈바람에 떨면서 우리를 쳐다본다.
율곡을 모시는 또 다른 서원에 황해도 벽성군 석담리에 있는 소현서원이 있다. 율곡이 43세에 처가에 은거하면서 주자를 추모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하던 곳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북한은 일찍이 소현서원을 보물급 문화재 24호로 지정하였단다. 북한이 소현서원을 보물로 지정하였을 때, 우리는 먹고 사는데 바빠 문화재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못 쓰고 살던 때이다.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이북에 갔을 때에 이 소현서원을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북한은 그러면서 남한에 있는 율곡의 유적지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란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냥 논밭으로 변해있었지. 이후락 부장은 대충 얼버무리고는 돌아와 황급히 율곡 유적지 복원, 정비에 들어가, 이와 같이 자운서원을 복원하였다.
그런데 그때 급히 자운서원을 복원하면서 처음 단 문성사의 편액은 '文成祠'가 아니라 '紫雲書院'이었다. 여기에는 씁쓸한 사건이 하나 있다. 처음에 자운서원의 편액을 쓴 것은 당시의 실권자 김종필 국무총리였단다. 김총리가 붓글씨에 일가견이 있으니까 '紫雲書院'을 썼던 모양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글씨 잘 쓰는 권력자가 직접 편액의 글씨를 쓰는 것은 조선 시대에도 많이 있던 일이니까. 그런데 김총리는 '紫雲書院'이라고 쓴 왼편에 자기 이름까지 드러냈던 모양이다. 이게 문제가 되자 나중에 '김종필'이라는 이름은 지워졌는데 그래도 김총리의 낙관은 남아 있다가, 2005년도에 어느 신문사에서 문제 제기를 하자 지금의 '文成祠' 편액으로 바꿔달았다고 한다.
다. 율곡 가족묘지
이제 마지막으로 율곡의 가족들이 안장되어 있는 묘지로 올라간다. 이곳에는 율곡과 부인 곡산 노씨묘를 비롯해 율곡의 부모 합장묘, 율곡의 형과 아들 이경립의 묘 등 가족묘 14기가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율곡의 묘가 부모의 묘보다 더 윗자리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에는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나, 권선생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묘가 있는 능선이 좁은 능선이라 율곡의 묘를 쓸 때에 부모 아래쪽에는 마땅히 쓸 묘자리가 없어 위에 묘를 쓴 것뿐이라고 한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이 곡산노씨의 묘는 또 율곡의 묘보다 조금 더 위쪽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례 풍습은 임진왜란 이후 정립된 것이지, 율곡 때만 하더라도 그렇지가 않았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 시대에는 딸에게는 상속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때만 하더라도 딸도 아들과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시집살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처가살이도 많이 하였다. 신사임당만 하더라도 시가에 와서 산 기간보다, 본가인 강릉에서 산 기간이 훨씬 더 길다. 그렇기에 율곡이 강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럼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 이런 신분질서가 고리타분한 방향으로 강화되었을까? 조선은 짧은 기간 내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었다. 이런 큰 전란 기간에는 신분제 질서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집권층으로서도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 평민의 힘을 모으려면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이라는 당근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하여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가 동요할 조짐을 보이자, 양반들은 신분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성리학 중에서도 예학(禮學)이 발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리학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처단하는 등 사상의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
그래서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 대비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나, 3년 입어야 하나로 양반들이 두 패로 나누어 논쟁을 벌이고(1차 예송 논쟁), 효종의 비 인선 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 대비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한다, 아니다 9개월만 입으면 된다’로 논쟁(2차 예송 논쟁)을 벌이며 국력을 소모한다. 사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한다. 물론 왜놈들에 의해 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조선 내부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를 세웠어야 한다. 그렇게 했으면 새 국가에서 새롭게 문화가 발달하고 국력이 신장하여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은 두 차례의 큰 환란을 겪고서도, 사회를 개혁하여 진보된 방향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노론 일당독재, 성리학 일본주의로 양반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급급하다가 외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거 묘자리 얘기하다가 얘기가 옆으로 너무 많이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다음 답사지로 가기 전에 두 가지만 더 얘기하고 가자. 율곡의 본처 곡산노씨의 묘는 율곡의 묘 바로 뒤쪽에 있는데, 곡산노씨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에게 저항하다 자결하였다고 한다. 겁탈하려고 하였기에 자결하였을 것이다. 그 때 곡산 노씨를 모시던 몸종도 같이 죽었다. 일본놈들이 양반집 규수라고 하여 봐줄 리가 없으니까, 임진왜란 당시 이렇게 죽어간 아녀자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결국 율곡 이이의 집안도 그런 화를 피하지 못했구나. 어쨌든 전란통에 이들의 시신은 같이 묻혔기에 나중에 곡산노씨의 묘를 제대로 모시려고 하여도 유골을 분리하기가 어려웠단다. 권선생은 그 때 분리한다고 분리하였다지만 아마 저기 곡산노씨의 묘 속에 들어가 있는 유골에는 몸종의 유골이 전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한다. 후손들이야 묘에 참배할 때에 혹시 몸종에게도 참배할지 모른다는 깨름직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어쨌거나 곡산노씨는 이렇게 자결하여 나중에 열녀문이 만들어진다. 살아서는 자식을 못 낳아 속을 끓였을 텐데, 죽음마저 그렇게 비극적으로 죽은 곡산 노씨. 안타까운 생각을 하며 묘 옆의 비석을 바라본다. 그런데 비석에 여러 발의 총탄 자국이 있다. 6.25. 때 생긴 자국이란다. 그렇구나. 율곡의 묘를 가운데 두고 후손들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구나. 이런 총탄 자국이 있는 것이 어디 여기뿐이랴.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있는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에서도 이런 총탄 자국을 본 기억이 난다.
율곡의 가족묘라고 하는데, 여기에 묻혀있는 사람들 중에는 율곡의 누나 매창의 시부모도 있다. 율곡의 누나 매창이라면 제대로 된 집안에 시집갔을 텐데, 매창의 시부모가 자기네 선산에 모셔지지 않고, 율곡 집안에 빌붙어 있다. 이 또한 이때까지만 하여도 출가외인이라는 관념이 없었기에 매창은 시부모의 묘를 이곳에 쓴 것이리라. 아까 율곡에게는 부인이 셋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첫째와 둘째 부인 묘만 있고, 셋째 부인 묘는 황해도 해주에 있다. 그런데 권선생은 여기에 있는 것이 둘째 부인 묘라지만 실제로는 셋째 부인 묘란다. 셋째 부인이 맏아들을 낳았기에 율곡의 문중에서는 셋째 부인을 둘째 부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사실을 왜곡까지 할 필요가 있나?
II. 윤관 장군 묘
이제 정말 율곡 유적지를 떠나 윤관 장군 묘로 가자. 그런데 많은 분들이 시간이 없다고 여기서 돌아가겠다고 한다. 결국 공회장님 차에 권선생을 모시고, 나와 소총무가 공회장님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윤관 장군 묘로 향한다. 차에서 내려 윤관 장군 묘역으로 들어가는데, 장군의 묘역은 어느 왕릉 못지않게 꾸며져 있다. 왕이 아닌 일반인의 묘가 이렇게까지 꾸며져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도 장군이 제일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군, 장군' 하는데, 사실 윤관은 원래는 문관이었다. 고려 시대 때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 장군도 사실 문관이다. 무신 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려는 문신 우위의 정책을 펼쳤기에, 여진족을 정벌하러 가는 군대의 총지휘관은 문신인 윤관이 한 것이다. 이러한 문신 우위 정책은 점점 도가 심해져 결국 의종 때 무신정변이라는 무신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을 담당하는 문화유산 해설사가 권선생에게 반가운 인사를 한다. 권선생도 예전에 이 묘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쌓은 업적은 우리나라 국민이면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윤관이 별무반을 설치하는 등 치밀한 준비 끝에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까지 쌓았음에도, 고려는 9성을 너무 허무하게 여진족에게 다시 내준다. 여진족이 9성의 반환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침략하고 외교적으로도 애걸하자, 고려는 불과 2년 만에 9성을 다시 내준 것이다. 그리고는 주화파는 윤관이 무리한 정벌을 일삼아 국력을 소모했다고 윤관을 공격하여 9성을 쌓고 개경으로 돌아온 윤관은 왕에게 보고도 못하고 불명예 퇴진을 당한다. 사실 주화파들이 이런 트집을 잡고 윤관 장군을 공격한 그 이면에는 윤관이 돌아와 정권을 잡을까봐 하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예종은 신하들의 다수 의견에 밀려 윤관을 퇴진시켰지만, 윤관에게 미안했던지 다음 해에 복직을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런 조정의 풍토에 환멸을 느껴 끝내 복직을 거부하였고, 그 다음 해에 이 더러운 세상을 뜬다.
아까 율곡 유적지에서는 율곡이 8세 때 시를 썼다는 것을 보고 왔다. 그런데 윤관은 율곡보다 1살 어린 7세 때 시를 썼다. 윤관도 천재이구먼.
葉養天蟲 防雪寒 뽕잎은 누에를 길러 눈보라 치는 추위를 막아주고
枝爲强弓 射犬戎 가지로는 굳센 활을 만들어 오랑캐를 쏜다네
名雖草木 眞國寶 이름은 비록 초목일지라도 참으로 나라의 보배
莫剪莫折 誡兒童 자르거나 꺾지 못하게 아이들을 타일러야 되리
윤관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는 것은 우리가 국사 시간에 다 배웠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런데 이런 전쟁 이야기 뒤에는 여자 이야기가 야사처럼 붙어 있는 경우가 있지. 윤관 장군도 여진족을 정벌할 때에 여진족 추장의 딸인 웅단을 자기 애첩으로 삼았다. 웅단이 자발적으로 따라오진 않았을 테고, 포로로 잡힌 것이겠지. 어쨌거나 처음에는 적으로 만났지만, 윤관과 웅단은 서로 사랑하였나보다. 윤관 장군이 죽자 웅단은 삼일 밤낮을 울다가 바위에 올라 개울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단다. 그리하여 웅단이 몸을 던진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고, 웅단이 몸을 던진 개울은 웅담(熊潭)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열녀 웅단의 이야기는 지명까지 바꿨으니 바로 파주시 법원읍 웅담리가 그것이다. 웅담리 눌노천가에 있는 낙화암에는 이러한 웅단을 기려 낙화암비가 있었다는데, 2011. 7. 28. 집중호우로 안타깝게도 떠내려가버렸단다.
왕릉처럼 되어 있으니 묘로 가기 위하여 언덕을 오른다. 묘 앞에는 왕릉처럼 무인석과 문인석, 석수(石獸)가 도열해 있다. 도열해 있는 맨 앞에 있는 것은 동자석이다. 윤관의 시중을 들라고 동자들을 맨 앞에 세운 것일까? 윤관 장군 묘소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또 임진왜란이라는 큰 변란을 겪으면서 잊혀졌다가, 영조 때 지석이 발견되어 묘역이 다시 조성되었다. 그러다보니 묘역 내의 석물과 봉분 등이 고려의 형식이 아닌 조선 후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된 이 인물상이나 동물상은 모두 버짐이 생기듯 둥그런 무늬가 이곳저곳에 나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흔하여 이런 무덤을 지키는 인물상이나 동물상, 비석들의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오래된 것에는 어김없이 이런 버짐 현상을 볼 수 있다. 다만 대리석으로 된 비석 몸돌의 경우에는 버짐 현상이 안 보이나, 이 역시 화강암으로 된 받침돌이나 머릿돌의 경우에는 이런 버짐현상이 보인다. 인문학습원 자연사학교의 박정웅 교장 선생님은 버짐과 같이 보이는 것은 지의류라고 한다. 지의류 - 참 대단한 놈들이다. 도대체 먹을 거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런 바위 표면에서도 살아가고, 또 이놈들은 남극과 같은 극지에서도 살아간다. 용암이 식으면 먼저 달라붙는 놈들도 이놈들이리라. 사실 이놈들이 있어서 지구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묘 뒤를 두르고 있는 곡장(曲墻)이 유달리 높다. 너무 높아 바로 뒤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리 곡장을 높이 한 것일까? 여기에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사이의 400년간의 다툼 사연이 들어있다. 1614년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 바로 뒤에 아버지 묘를 썼다. 앞에 남의 묘가 있음에도 더군다나 영의정까지 한 사람이 왜 자기 아버지 묘를 도둑질하듯 여기에 쓴 것일까? 윤관 장군 묘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명당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지원은 이런 명당 중의 명당자리를 놓치기가 아까웠는데, 마침 윤관 장군의 묘도 후손들이 별로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자, 이 좋은 묘터에 자기 아버지 묘를 쓴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청송 심씨의 묘가 하나, 둘 늘어나 19기의 묘가 윤관 장군 묘 뒤쪽으로 포진한 것이다.
뒤늦게 이를 안 파평 윤씨 종중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관가에 고발하였다. 조선시대에 묘지 다툼은 산송(山訟)이라고 하여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당시 지방관은 양쪽 집안의 위세에 해결을 상부로 미룬다. 파평 윤씨는 고려 때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숱한 정승, 판서와 세조비 정희왕후, 성종비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 문정왕후의 4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렇다고 청송 심씨가 꿀릴까보냐. 청송 심씨에서도 세종비 소헌왕후와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를 배출하는 등 양 집안이 막상막하의 힘을 자랑하는 조선의 대표적 문중이다. 그러니 지방관으로서도 이 산송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송을 넘겨받은 영조도 어느 한 집안을 편들 수 없어 골치 아파하며 양쪽 집안에 어제문(御祭文)을 내려보내면서, 양쪽 집안은 분란을 그치고 각기 선조들의 묘를 잘 지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럼 곡장은 어떻게 된 것일까? 곡장은 1969년에 두른 것이다. 양쪽 집안의 무덤의 경계를 정확히 한다고 한 것이라고 하는데, 파평 윤씨측에서는 윤관 장군에게 참배하다보면 그 뒤의 청송 심씨 묘에도 참배하는 꼴이 되니, 꼴 보기 싫은 청송 심씨의 묘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높은 곡장을 둘렀으리라. 그러나 높은 곡장이 앞을 가리는 청송 심씨 집안에서는 불만이 많았을 것. 그리하여 계속 다툼이 있어오다가 2007년에서야 400년 만에 산송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즉 파평윤씨측에서 건너편 능선에 땅을 제공하여 이곳에 묻혔던 청송 심씨의 조상들은 그리로 이사간 것이다. 400년간의 다툼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이다.
파평윤씨 이야기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한다면, 파평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왜? 파평윤씨의 시조로 고려의 개국공신인 윤신달은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잉어처럼 비늘이 돋아있었다고 한다. 또 거란군에 쫓기던 윤관 장군이 강가까지 쫓겨 왔을 때 잉어 떼가 나타나 윤관 장군이 잉어들을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파평 윤씨는 지금도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 주위에 파평윤씨 종원들이 진짜 잉어를 먹나 안 먹나 살펴보아야겠는데?
윤관 장군의 묘역을 나오는데, 묘역 바로 앞에 아까 들어갈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 모르고 지나쳤던 2기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비석이 무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 위에 있다. 하나는 윤시중 전마총(尹侍中 戰馬塚), 또 하나는 윤시중 교자총(尹侍中 轎子塚)이다. 권선생은 윤관 장군의 애마와 타고 다니던 가마가 묻혀 있는 무덤이라고 한다. 으잉? 이게 무슨 말이야? 윤관 장군을 이곳에 묻을 때 윤관 장군이 평소 아끼던 애마와 가마를 여기에 함께 묻은 것이다. 가마는 왕에게 하사받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애마는 평생을 장군과 함께 하여서인지 장군이 돌아가시자 슬퍼하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굶어죽었다고 한다. 이럴 때는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
그런데 오랜 옛날에 왕이 죽으면 왕의 아내와 시종들 함께 묻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도 일종의 순장 흔적이련가? 이런 말무덤이나 가마 무덤은 처음 본다. 나만 그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 와서 이걸 보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궁금해 할 텐데, 무덤 앞에 이런 무덤이 윤관 장군 묘소 앞에 세워지게 된 연유에 대해 안내판 하나 세워놓으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권선생에게 요즘과 같은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거리에 대해 안내판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하였다.
IV. 용미리 석불 입상
이제 마지막 답사지로 보물 93호인 용미리 석불 입상을 보러간다. 용미리라면 용의 꼬리인데, 그럼 용의 머리가 어디쯤에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일제가 지명을 통일한답시며 구룡리(九龍里)와 호미리(虎尾里)에서 한 글자씩 따와 합성한 것이라고 한다. 아까 법원리 지명도 그렇고, 일제가 별 개념 없이 이런 지명을 많이 만들어놓았다. 이것뿐만 아니라 강화도 마리산을 마니산(摩尼山)이라 잘못 표기하고, 인왕산을 의도적으로 ‘日’가 들어가는 ‘仁旺山’이라고 하는 등 일제는 우리의 땅이름을 많이 어지럽혀놓았다.
도착하니 석불 입상 아래에는 절이 있다. 우리가 지나는 일주문의 현판에는 장지산 용암사라고 되어 있다. 석불이 있으니 절도 있었겠지만, 절 가람들은 요새 지은 티가 난다. 석불 입상으로 오르는데, 거대한 석불 입상 밑으로 한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먼저 우리를 맞이한다. 이건 또 뭘까 하고 안내문을 보는데,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참배한 후,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이 동자상과 칠층석탑을 세웠단다. 후손 잇기 기원? 이건 또 뭐야? 이대통령 어머니가 저 위 석불 앞에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여 이대통령이 태어났다는군. 그럼 후손 잇기 기원이란 이대통령이 자기의 후손 잇기를 기원하는 것인가? 가만있자... 전에 북한산 문수사에 갔을 때 보니 이대통령 어머니께서 문수사에서 기도를 하여 이대통령을 낳았다고 하던데, 이대통령 어머니가 아들을 낳기 위하여 여러 군데에서 치성을 드리셨구나. 문수사(文殊寺) 사액(寺額)도 이대통령이 남긴 것이라고 하는데, 이대통령이 이곳에는 동자상과 칠층석탑을 남겼네.
원래 동자상은 왼쪽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석탑은 그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단다. 그런데 이대통령이 4.19.로 하야한 후 재야단체들이 이대통령이 문화재 어깨 옆에 이런 동자상과 석탑을 세워 문화재를 훼손하였다는 비난이 심하여 1987년 이를 철거하여 종무소 오른쪽에 모셔두었단다. 그러다가 2009년에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라나? 동자상과 석탑을 다시 석불 어깨 옆으로 모시기는 뭐해도, 이런 것도 역사이니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석불 밑으로 모셔온 것이겠구나. 그런데 이놈들도 이미 50년의 역사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문화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놈들도 오래된 문화재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
이제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석불로 올라가보자. 이곳 석불에 얽힌 전설 따라 삼천리를 소개해보자. 고려 13대 선종(재위 1083~1094)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자식이 생기지 않았단다. 선종도 그렇겠지만, 원신궁주는 자식이 안 들어서니 더 애가 탈 것 아니겠는가? 어느 날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들이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더니 홀연히 사라지더라나. 꿈이 이상하다 생각한 궁주는 선종에게 얘기했고, 선종은 곧 사람을 장지산으로 보내 살펴보게 하였단다. 그랬더니 이곳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있더라는 것. 그래서 왕은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단다. 그랬더니 원신궁주에 태기가 있어, 왕자가 태어나니 이가 곧 한산후(漢山侯)라는 것이다.
그래? 그럼 한산후가 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를 보면 선종 다음 임금은 헌종으로, 한산후는 헌종의 동생이라고 하는데... 이거 전설하고 뭐가 잘 안 맞네. 어떻게 된 것이지? 어쨌든 이런 전설이 있기에 이곳에는 아기 낳기를 기원하는 이들의 불공이 끊이지 않는다하고, 우리가 이렇게 석불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 쌍의 남녀가 와서 촛불을 밝히고 기도를 시작한다.
석불을 올려다본다. 왼쪽 석불은 둥근 갓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을 쥐고 있음에 반하여, 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을 하고 있다. 원래 자연적인 바위에 부처의 몸통을 조각하고, 그 위에 부처의 얼굴과 갓을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석불을 둘씩이나 조각한 것은 원래의 바위가 두 덩어리로 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오른쪽 석불은 오른쪽 어깨 부위부터 왼편 겨드랑이 밑 부분까지 금이 깊숙이 가있다. 앞으로 또 오랜 세월을 여행하다보면 저 금이 더 깊숙이 안으로 파고들면서 상체가 땅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석불의 얼굴은 약간 얽은 것처럼 곰보 자국이 나있다. 총탄 자국이다. 이 또한 6.25. 전쟁의 상흔(傷痕)이구나.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지만 어떤 놈들이 용미리 석불의 보호를 받을까 하여 석불 뒤에 숨어서 총질을 해댄 것 아닐까? 그러니 총알이 오가면서 이렇게 잘 생긴 석불을 곰보로 만든 것이고... 모르긴 몰라도 전국의 문화재를 조사해보면 이렇게 6.25. 때 총 맞은 문화재가 많으리라. 권선생은 왼쪽 둥그런 갓을 쓴 석불이 남자이고, 오른쪽 석불은 여자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여서인지 왼쪽 석불은 근엄한 게 남자로 봐줄만 하고, 오른쪽 석불은 잎이 길게 찢어진 것이 뭔가 샐쭉한 표정이어서 여자로 보아도 되겠다. 남녀 석불에 대해 뭔가 전설이 있을까 했더니, 따로 전설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석불이 쌍으로 있고, 표정이 차이나는 데서, 사람들은 쉽게 남자, 여자를 구분하여 생각한 모양이다.
왼쪽 석불 옆으로 하여 위로도 올라가본다. 두 남녀 석불은 말없이 앞산을 바라보고 있다. ‘용미리’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공동묘지 아닌가? 왼편 산줄기로 눈을 돌리면 산이 온통 묘지로 덮여있지만, 다행히 지금 석불이 시선을 두고 있는 앞산까지는 죽은 자들이 넘보지 않았다. 내려갈 때는 오른쪽 석불 옆으로 하여 내려오는데, 석불 뒤쪽의 바위에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세조대왕 비인 정희왕후의 발원문이란다. 혹자는 이 발원문을 근거로 이 석불들이 고려 시대가 아니라 조선 전기에 석불이라고 주장하는데, 권선생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던 석불에 정희왕후가 발원문을 썼을 뿐이라고 한다.
V. 혜음령
이제 오늘 계획한 답사지는 다 돌아보았다. 차로 돌아가는데, 시간은 어느 새 6시로 접근한다. 오늘 권선생님이 우리들을 안내하느라고 수고가 너무 많으셨다. 시간도 저녁 시간이 되는데,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최소한 수고해주신 권선생님께 저녁은 대접해야 도리이겠지? 그런데 이 덕분에 한 군데 더 답사를 할 수 있었다. 공회장님께서 소령원 근처에 백숙을 잘 하는 집이 있다고 하여 예약 전화를 하고 간다. 소령원은 영조 어머니의 묘이다. 식당이 소령원 근처라니 예정에 없던 소령원까지 덤으로 답사하는 것이다.
가는 길에 혜음령 고개를 넘어간다. 혜음령 - 고개 위에 오르면 그늘에서 땀을 씻고 쉬어가는 은혜로움이 있다고 하여 혜음령(惠陰嶺)이란다. 예전부터 서울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의 길목에 있던 고개라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고려 예종 때에는 이 고개 밑에 혜음원이 있어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숙박을 하고, 또 고려왕이 개경에서 남경(서울)으로 행차할 때에 혜음원에 마련된 행궁에서 머물렀다. ‘혜음원지’라는 팻말이 나온다. 우리는 혜음원지도 잠깐 둘러보려고 차를 틀었으나 길을 잘못 들었는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꽤 넓은 지역이 혜음원 터로 발굴되었다고 하던데...
혜음원 터가 발굴되게 된 것은 1998년 당시 대학원생이던 김경섭씨가 마을 주민에게 뒷산에 오래된 기와 조각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듣고부터란다. 이후 김경섭씨는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 엄청난 양의 기와와 건물 기초석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2001. 1.경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의 1차 발굴에서 ‘惠陰寺’라고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면서 이곳이 역사적으로 어떤 곳인가를 밝히게 되었다. 뒤이어 ‘惠陰院’이라 새겨진 명문기와도 발견되어 이곳에 동서 104m, 남북 106m의 숙박시설과, 이들을 위한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런데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중에는 엄청난 양의 청자가 있다. 청자도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청자를 생산하듯 ‘포개 굽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청자를 하나의 갑발(匣鉢) 안에 넣어 굽는 고급청자이다. 그 외에도 왕궁 건물의 기와에서 볼 수 있는 잡상도 발굴되었다. 즉 이곳은 단순한 ‘院’이 아니라, 고급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 즉 이곳이 바로 고려 왕이 행차시에 머무르던 행궁이다. 그럼 왜 여기에 행궁이 있는 것인가? 고려에는 개경 이외에 평양에 서경을, 지금의 서울에 남경을 두는 3경 체제를 유지하였다. 즉 혜음원은 고려왕이 남경으로 순행할 때에 머무르던 행궁이 있던 곳이다.
우리는 결국 혜음원 터를 발견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다시 차를 돌려 혜음령을 넘는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고개이면 도적들도 꼬이기 마련이지. 홍명희 소설 [임꺽정]에서 임꺽정을 몰라보고 까불던 도적들이 혼나던 장면을 생각하며 혜음령을 넘는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혜음령 아래 벽제관에서 눈물의 점심을 먹고 혜음령을 넘었다. 워낙 다급했으면 임금과 왕비 외에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이 고개를 넘었을까? 선조가 눈물을 흘리며 이 고개를 넘고 난 지 10개월 후에는 명나라 원병이 이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이들은 벽제관으로 내려가다가 매복중이던 왜군에게 참패하고 다시 혜음령으로 쫓겨 왔지. 신이 난 왜군은 여세를 몰아 우리 군이 머무르고 있던 행주산성을 공격했다가, 권율 장군이 이끄는 우리 군에 패퇴하고... 그런 혜음령을 지금은 차를 타고 휘~익 넘어간다. 고개 양옆으로는 올림픽 골프장과 서서울 골프장이 포진하고 있다. 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혜음령에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VI. 소령원
소령원 앞까지 왔다. 그런데 문은 잠겨있다. 권선생님이 이곳을 담당하던 해설사에게 전화를 하나, 그분은 얼마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단다. 권선생님이 더 알아보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시라고 하고, 입구에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무덤만 바라본다. 소령원은 영조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잘 알다시피 무수리 출신이다. 인현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난 후 최씨는 밤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기를 기도하였다는데, 그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어 영조를 낳은 것이다. 으~음 우리 같은 사람이 남의 여자 건드리면 간통을 하는 것이고, 왕이 건드리면 승은을 입는다고 하는구나. 하긴 궁궐에 있는 여자는 다 왕의 여자이니 남의 여자라고 할 수도 없겠네. ^^;; 원래 소령원은 묘(墓)였는데, 아들이 왕이 되니 원(園)으로 승격된 것이다. 숙빈 최씨는 영조가 왕이 되기 5년 전에 죽어 이곳에 묻혔다. 효심이 지극한 영조는 이곳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래? 왕자가 3년간 시묘살이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 같은데...
소령원을 보다보니 경복궁 옆에 있는 칠궁이 생각난다. 영조는 왕이 되자 자기 어머니의 신위도 종묘에 모시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경복궁 옆에 어머니를 위한 사당을 지었다. 그 후 이곳에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의 신위까지 들어오며 - 이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경종의 어머니인 그 유명한 장희빈도 있다 - 현재는 7 후궁의 신위가 모셔져 칠궁이라고 한다. 소령원 안으로 들어가면 영조가 친필로 썼다는 신도비가 있는데, 영조는 이 신도비를 어느 왕의 신도비보다도 더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무덤을 릉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니 신도비나마 왕보다도 더 크게 만들었나보다. 소령원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상긋한 솔내음을 품고 온다.
영조가 시묘살이를 했다는 묘막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영조가 효심이 깊어 시묘살이를 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한다. 당시 영조는 몸이 허약한 경종에 대비하여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경종을 미는 소론과 영조를 미는 노론 사이의 정치적 투쟁에서 영조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시묘살이를 핑계로 이곳으로 피해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라면 영조가 이곳에 피해있다고 가만 두고 보겠는가?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영조를 죽이려는 자객이 몇 차례 이곳에 왔었다는데, 그때마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 위험을 알렸단다. 시간이 있다면 소령원의 원찰인 보광사도 들러,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는 어실각과 영조의 친필이 걸려있다는 대웅보전도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겠지?
예약한 식당으로 들어서는데, 예상과 달리 마당부터 북적북적하다. 촬영장비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나보다. 식당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구가의 서’라는 드라마 촬영팀이라고 한다. 이들의 복장은 완전히 겨울이다. 그렇지. 오늘 같은 날 하루 종일 야외 촬영을 하려면 옷을 든든히 입고 있어야겠지. 우리 역시 갑작스레 눈도 오는 날씨에 따뜻한 방을 찾는다. 이윽고 먹음직스러운 백숙이 들어오고,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숙 위로 오늘의 답사를 무사히 마쳤음을 축하하며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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