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문재인 정권 시절 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문 전 대통령이 종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검찰개혁의 선봉에 선 자신을 중도 퇴진시켰으니 지금의 윤석열 정권을 만든 일등공신은 자신이 아니라는 취지였다. 그동안 자신에게 덧씌워진 대선 패배 책임론을 일축해 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친문·비명 세력과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당권을 쥐고는 있지만 박광온 원내대표 선출에서 확인됐듯이 친문·비명 색이 짙은 상당수 현역 의원들을 아우르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이다.
힘겹게 가동한 김은경 혁신위도 ‘이재명 호위무사’라는 프레임에 갇혀 민감한 공천 룰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청와대를 저격한 추미애는 이 대표를 “문화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는 피해자”라고 감쌌다. 깊은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정치적 재기를 위해 이 대표의 손을 들었다는 선언이라고 볼 만한 이유다.
누구나 불편한 현실 직시는 꺼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로마의 카이사르가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추미애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확증 편향을 보인 것 같다.
추미애는 ‘민주적 통제’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윤석열 검찰을 몰아붙였다. 장관 시절 “내 지시 절반을 잘라 먹었다” “장관 말 겸허히 들었으면 좋게 지나갈 일을 지휘랍시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며 목청을 높이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장 민주적이라고 자부하던 정권에서 가장 반민주적인 ‘갑질’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았나. 당내에서조차 추미애가 윤석열 정권을 만든 일등공신이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지 정녕 몰랐단 말인가.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의 중심에 있는 송영길 전 대표도 마찬가지다. 송영길은 뜬금없이 지난해 대선에서 진보진영 단일화가 무산된 책임을 정의당 심상정 후보 탓으로 돌렸다. 심상정이 이재명 후보와의 막판 단일화를 거부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섰다고 주장하자 정의당은 “단일화 제안도 없었다”고 반발했다. ‘내 탓이오’ 없이 ‘남 탓’만 한 것이다.
3년 전 당시 민주당 지도부가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서 나눈 은밀한 대화 내용이 보도됐다. 정의당을 의식해 비례위성정당을 거부하기로 했던 당론을 뒤집으려는 자리였다. 일부 참석자가 “심상정(정의당 대표)과 (연대는) 안 된다. 정의당이나 민생당이랑 같이 하는 순간, ×물에 뒹구는 것”이라고 한 막말도 흘러나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듯한 마포 발언에 정의당은 격분했다. 조국을 편들다 맞은 역풍의 상흔도 깊었다. 상호 불신의 책임은 명백히 민주당에 있는데도 송영길은 애써 눈을 감은 셈이다.
당내에선 추미애, 송영길의 행보를 예상치 못한 돌출 행동으로 치부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이재명 민주당이 걸어온 길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선 패배를 놓고 응당 벌어졌어야 할 치열한 진단과 자기반성, 쇄신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통과의례 같은 대선 평가 보고서도 내지 않은 채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온정주의에 휩쓸려 간 것이다. 그동안 조국의 강을 건넌다는 말만 난무했을 뿐 제대로 매듭지어진 것도 없다.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지지층 결집을 위해 조국의 후광에 기대 보려는 꼼수마저 엿보인다. 대신 ‘닥치고 공격’ 대열에 뭉치자는 깃발만 펄럭이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불편한 기억이 쉽게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동아일보. 정연욱 논설위원
출처 : 동아일보. 오피니언 오늘과 내일, ‘닥치고 남 탓’만 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