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냥 옛날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예전에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이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아마 대충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였던 것 같은데... 하여간 그 때에는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오는 게임들의 대부분이 그러한 부류였다. 이러한, C&C 아니면 워크래프트의 아류들이 흘러넘치는 유행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하면서도 예리한 관점과 취향으로 명작들을 선별해나갔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나도 그런 게임들을 재미있게 했었다. 「Earth 2140」의 엔딩을 보았고 「Dark Reign」도 재미있게 했었다. 그 이외에는 크게 기억나는 게 없는데, 그러고 보면 게임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게임잡지에 의존해서 게임을 구하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괜히 눈높이를 높여주고 게임 플레이에 관한 선민의식을 심어준 게 Close Combat(이하 "CC") 시리즈였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했는지 의문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 시절 그 느낌은 그 자체가 진솔한 것이었다.
첫 경험은, 게임 자체가 그렇게 큰 건 아니었는데도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A Bridge Too Far」(1997)의 데모 버전이었는데, 이런 희귀한 걸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서 다운받았을 리는 없는 거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게임잡지의 부록 CD를 통해서일텐데, 이것도 불분명하다.
데모 버전인만큼 그 내용은 딸랑 전투 하나였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마을을 두고 싸우는 것이었는데, 독일군에서는 판터 전차가 등장했고 영국군은 셔먼이나 스튜어트 전차가 나왔던 것 같다. 제한된 병력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치고받는 것이었는데, 그 짧은 전투가 대단히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병사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무기를 갖춘 채로 등장하고 부대별로 지시할 수 있으면서도 병사들이 일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게 마치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의 게임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듯한 사실감이었다.
겨우 데모 버전인데도 그걸 몇 십 번은 즐겼던 것 같다. 이 때의 일을 계기로 CC는 나의 마음에 깊게 각인되었고, 하여간 기회만 되면 진짜 게임을 구하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물론 가급적이면 무료로, 아니면 값싸게.
당연히 게임잡지의 공이 컸다. 그게 『게임피아』였나 잘 모르겠다. 하여간 「The Battle of the Bulge」(1999)를 부록으로 구했다. 1944년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주제로 하였는데, 독특한 건 일종의 전략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점과 선으로 구성된 지도에서 여러 부대들을 마치 장기말처럼 옮기며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는데, 적의 보급로를 절단하고 포위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다.
사실 이 게임은, 당시의 나에게는 고사양 게임이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내가 소유한 컴퓨터 사양이 대충 133mhz CPU에 램이 8메가, 하드디스크가 1기가 정도였을 것이다. 전투로 진입할 때 로딩 시간이 꽤 길었으며 전투에서도 폭발 효과마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순간적으로 흐름이 느려졌는데 아마도 CPU가 너무 딸렸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게 했었고 독일군으로 엔딩도 보았다. 설상에서 싸우는 모습 그 자체의 매력이 컸고 기갑과 보병의 비중도 적절하여 묘하게 균형이 맞았다. 여러 종류의 지형에 기갑과 보병의 조합으로 다양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고 기회가 되면 적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 게임을 하면서 기갑의 강점과 취약점을 이해하며 운용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한편으로 매복과 기관총의 압도적인 위력을 체감했다.
다만 이 작품을 거듭 즐기면서, 어떤 전형적인 방법을 익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걸 딱 뭐라고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는 아군의 움직임을 철저히 은폐하면서 적의 움직임을 먼저 포착해서 가급적 약점만을 노려 공격하는, 소극적인 병력 운용을 통해 최대의 효율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CC의 독이었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되는 「Invasion: Normandy - Utah Beach to Cherbourg」(2000)는 확실히 「게임피아」 부록으로 제공되었다. 그러고보면 CC 시리즈는 국내에서 상업적으로 모두 망한 모양이다.
전작의 전반적인 특성들을 이어받으면서 몇 가지를 개선한 게임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그렇게 몰입해서 즐기지는 못했다. 일단 그래픽이 더욱 발전하여 사양이 너무 높아진 게 큰 원인이었고 또한 전작에 비해 그렇게 크게 나아졌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점도 있다.
이 게임에서는 미군이 공세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그만큼 강력한 병력을 갖고, 반면에 독일군은 양과 질 모두에서 열세인 상황에 있다. 독일군의 효과적인 방어가 그만큼 필요한데, 당장 기갑을 잡을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게 큰 문제이다. 기갑을 잡을 수단이 없으면 몰살당한다. 주제상 당연한 거겠지만, 균형이 너무 안 맞으니 의욕이 떨어졌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새로운 컴퓨터를 구입하고 인터넷을 연결한 뒤에 「The Russian Front」(1999)를 구했다. 아마 MSN을 통한 공유였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CC 시리즈의 최고 명작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병력을 자유롭게 구성하여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건이 된다면 병력의 대부분을 기갑으로
채울 수도 있으며, 실제로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병종과 무기의 적절한 조합 그리고 시기적절한
은폐와 기습이 최고의 덕목이다.
이 게임의 기억나는 단점은, 병력과 실제 전투 규모에 비해 공간이 너무 넓어서 썰렁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보병의 가가호호 시가전에 익숙해있던 나에게 이러한 공간은 너무 넓고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동부전선을 주제로 하는 이 게임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게임에의 몰입을 방해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열린 공간에서 기갑의 위력이 너무 컸다.
그러고 보면 CC 시리즈에서 제대로 즐겼던 것은 딱 하나, 아르덴 공세를 주제로 한 작품 뿐이었다. 주제와 배경의 이미지가 갖는 매력이 크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게임의 특성이나 흐름이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 또한 처음으로 제대로 즐겼던 작품인만큼 그것이 다른 작품들을 평가하는 잣대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CC 시리즈 전반의 단점도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병종의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쓰이는 조합과 전술은 대체로 제한된다. 물론 전투의 효율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은폐와 기습을 철저히 우선시하는 습관은 종종 게임을 지루하게, 거의 시간낭비 수준으로 만든다. 컴퓨터가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특히나 컴퓨터가 우세한 병력의 공자 입장에 있을 경우에는, 그저 공자의 움직임이 나타날 때까지 지켜봐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된다.
또한 기갑의 위력을 철저히 의식하다보니, 정형화된 전술을 반복하게 된다. 가급적 적의 기갑을 먼저 잡거나 혹은 적 기갑의 시야가 닿지 않는 범위에서 적의 보병을 살상하고 그 다음에 적 기갑을 노리는 방식이다. 원리적으로는 너무 당연한 것이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상황이 나올 수도 있지만, 반복하다보면 "그게 그거다"라는 느낌이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의 원인이 게임 자체보다는 나 자신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기보다는 이기는 데 집중하다보니까 그런 형식에 몰입된 게 아닐까. 가장 높은 승률에 집착하지 말고 좀더 적극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즐길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한편으로 게임이란 게 이겨야 재미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기기 위해 하는 게임 아닌가.
얘기가 길어졌는데, 그 시절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CC 시리즈는 특별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여러 무기의 고증도 그렇고 제한된 병력으로 싸우는 상황으로 인한 여러 가지 독특한 성격은 다른 어떤 게임에서 느껴본 적이 없다. 다만 지금 할 거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걍 안 한다". 전술 같은 거 생각 안 하고 마음 놓고 편하게 게임하련다.
이미지 출처 : http://www.mobygames.com/
첫댓글 저도 4편을 제일 재미있게 햇엇읍니다.
저의 경우는 4탄을 가장 먼저 접하기도 했었고... 또 시가전의 재미가 컸던 것 같습니다.
마소브랜드에서 나온 매우 비슷한 게임이 있었는데 병사들 경험치까지 주는... 같은 건가요?
경험치 개념이 있는 건 맞는데, 그 게임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Close Combat: Modern Tactics
Close Combat: Wacht am Rhein
Close Combat - The Longest Day
Close Combat Last Stand Arnhem
Close Combat: Panthers in the Fog
클로즈컴벳은 메트릭스게임을 통해 지금도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출시작이 2012년이였죠.
클컴중에서
Close Combat II A Bridge Too Far 이걸 가장 재미있게 했습니다.
하이텔 개오동시절 모님과 모뎀플레이 한적도 있었고, 모뎀이였는데도 외국인들이 당시 많이 접속해 있어서 유럽인과도 게임을 새벽에 많이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클컴2까지는 해외접속자들이 많앗는데 클컴3부터는 모뎀접속자도 많이 줄었고, 국내에서도 클컴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지 않았었죠.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버전은 역시 Close Combat II: A Bridge Too Far 이 버전이 성공한 버전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당시 PC사양은 팬티엄100에 메모리 8메가로도 외국인과 모뎀플레이 할정도로 게임하는데 전혀 지장없는 사양이였죠.
진짜 고전적인(?) 게이머이시군요! 클컴의 인지도야... 저도 그 데모 버전을 우연히 접하지 않았더라면 클컴을 평생 몰랐을 수도 있죠.
저랑 비슷하게 클컴을 접하셨군요 ㅇㅇ;; 클컴은 다 좋은데 공자가 방자에비해 너무 불리하고(유닛수에 제한이있어서... 거의 1:1전력비에서 공격이면;; 이건 최신작들에서는 많이 사라졌죠. 독일군 보병중대들이 약해지면서요) 전체적으로 독일이 연합군에비해 너무 셉니다 ㅇㅇ;; 독일군의 우월한 장비빨때문에 연합군이 갈려나가죠...(이것도 최신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하죰. 연합군은 대신 물량이 얄짤없어서). 전술의 획일화는 어쩔수 없는거같습니다. 방어시에는 최대한 개활지를 끼고 은엄폐 -> 적이다가오면 끔살내고... 공격시에는 보병으로 정찰 ->전차로 정리->보병으로 전진... 이건 뭐 효율성의 문제니까요
아..과거의 향수여
8년전 쯤인가 이 카페서도 사람들 많이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