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년 없는 일" 35년 軍생활 접은 장군, 무대 택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2023.05.20 05:00
업데이트 2023.05.20 07:46
이근평 기자 구독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대화 중 튀어나오는 큰 손짓. 1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공연장에서 이귀우(60)씨는 영락없는 연극배우의 인상이었다.
그런데 이씨는 2년 차 신인 배우다. 그의 늦깎이 데뷔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2020년 1월까진 그는 제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마지막 계급은 육군 준장.
35년 군 생활을 마무리한 예비역 장성이 연극배우가 됐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두 직업 사이의 간극에 의아한 마음이 들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씨는 “삶이라는 무대는 변함이 없다”고 덤덤히 응수한다.
이귀우 예비역 육군 준장이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공연 연습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귀우 전 예비역 준장 제공
“과거 배역은 군인, 지금 배역은 배우”
이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배역에 충실한 건 마찬가지”라며 “과거엔 나의 배역이 군인이었다면, 지금은 배우인 셈”이라고 말했다. 육군사관학교 41기로 1985년 임관한 그는 2018년 준장으로 진급한 뒤 제7포병여단장을 2년간 맡고 군 생활을 마쳤다. 7포병여단은 '동북아시아 최강'이라는 제7 기동군단에 화력을 지원하는 부대다.
인생의 새 막을 연 이씨는 지난 3일부터 오는 21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무대에 서고 있다. 로마 시대 3두 정치를 이룬 레피더스와 집정관을 지낸 돌라벨라 등 1인 2역이 그의 배역이다.
이귀우 예비역 육군 준장(가운데)이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성아트홀에서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공연이 끝난 뒤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평생 직업으로 배우를 선택했다”는 그에게 한 때 군인이었다는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배우로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요. 영화, 연극 가리지 않고 배역을 따내려고 벌써 200번 가까이 지원서를 냈네요. 독립영화 17편, 상업영화 1편에 출연했고, 연극은 지난해 1월 첫 작품 후 이번이 두 번째에요.”
평생 직업으로 선택한 배우의 길 “마음 굳게 먹었다”
전역 후 새 출발을 고민하는 건 이씨 역시 다른 군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2020년 그는 “무엇보다 정년 없이 앞으로 30년 이상은 꾸준히 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군과 관련된 고문·연구 관련 직종은 자연스럽게 새 직업 목록에서 빠졌다. 기술을 배워볼까도 했지만, 체력적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단다.
“결정이 어려워 뺄 거부터 빼봤더니 남는 게 ‘예술’이더라고요. 세상 많은 일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화나게 하기도 하는데, 예술은 그렇지 않죠. 그런 점 역시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배우의 길을 결심했지만 무모한 면도 없지 않았다. 취미로 연기해본 적도 없었고, 남들보다 연극이나 영화를 더 많이 봤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드라마를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느끼는 정도였다. 그는 “2020년 5월 무작정 연기학원에 가 1년 3개월을 ‘연마’했다”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말했다.
배역에 진심을 담는 배우처럼…인간의 삶 자체도 연기와 비슷
이씨는 연기를 하면서 새삼 ‘진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배역에 진심을 담는다고 해요. ‘무대 위 삶이 진짜, 오히려 무대 바깥 삶이 거짓’이라는 말도 있죠. 반면 연기를 못한다는 배우를 보면 대사에서 진심을 느끼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에게 ‘생도 시절을 포함한 40년 군 생활도 연기였냐’ 물었더니 “우리 모두 배역을 갖는 배우가 아니겠냐. 그렇게 보면 인간의 삶 자체가 연기와 비슷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40년 군 생활은 내가 만든 각본으로 했고, 이 중 일부가 장군 역할이었다”며 “만들어진 이야기를 표현할 때 진심을 담아내야 하듯 나름대로 진심으로 군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귀우 예비역 육군 준장이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성아트홀에서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공연이 끝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씨는 사람을 대할 때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 역시 요즘 젊은 세대와 부대끼면서 다시 깨닫는다고 말했다. 그는 “군을 떠난 지 3년이 넘어서 조심스럽다”면서도 “관계에서 일어나는 군 내 문제들 대부분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지 못해서 벌어졌던 일”이라고 말했다. “맡은바 배역에 거짓을 보태 자꾸 자신을 포장하려 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척, 또 재단하려 하니 갈등이 빚어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대학로 생활에서 느끼고 있는 대목이죠. 저 또한 지금 홀가분한 걸 보니 군 생활 중 제복과 계급이 물체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더군요.”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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