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색당파와 붕당정치
1. 당파싸움의 개략
정치세계의 권력 다툼은 항상 현재의 세력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세력과 그것을 타파하여 한순간에 권력을 뒤집고자 하는 진보 혹은 혁신세력의 다툼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좀더 깊이 들여다 보면 그들 중에서도 서서히 하자는 비둘기파와 급진적으로 하자는 매파로 또 나눌 수 있다. 조선조의 당파싸움 또한 마찬가지이다.
태조 이성계 이래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가 중종 중엽 때부터 서서히 조정에서 밀려나고 끊임 없이 출세하고자 준비하던 숲속의 선비들인 사림파가 드디어 권력을 잡게 된다. 그 중에서도 동인은 훈구파를 청산하는데 있어서 급진적인 입장이었고 서인은 온건적인 입장이었다. 동인의 우두머리 격인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불리웠고, 서인의 우두머리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는 것이다.
선조때 동인에 속해있던 정여립이 난을 일으킴으로써 동인의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서인의 우두머리인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다시 동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동인은 서인에 대한 처리를 두고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 정인홍 중심의 북인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 유성룡 중심의 남인으로 또 다시 갈라지게 된다.
광해군 대에 북인이 권력을 잡았으나 서인과 남인이 손을 잡고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북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지속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숙종 대에 이르러 여러차례의 환국을 거치면서 남인은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숙종 초기에 서인은 남인에 대한 처리를 놓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노론의 영수는 송시열이었고 소론의 영수는 남구만이었다. 이후 경종 대에는 경종이 아들이 없는 것을 기화로 노론이 연잉군(후의 영조)을 후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소론에게 공격을 받아 노론 4대신 등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고 이후 영조가 즉위하여 다시 노론이 권력을 잡자 이번에는 소론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정조 대에 노론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높이는 것을 둘러싸고 반대파인 벽파와 찬성파인 시파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나 정조 순조가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 가문에 의한 세도 정치가 다른 성격으로 시작됐고 절치부심하던 대원군이 왕권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거센 외세에 밀려 결국엔 일제에 강점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붕당이란 결론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성격이나 이념적 성격에 따라서 파가 갈리는 것이다. 지금의 정당정치와 비교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 정체랑 조선의 정체는 다르다만) 개인적으로 조선이 망한 이유가 붕당정치 때문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예나 지나 동이나 서나 정치세계에서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사색당파. 그리고... 사색당파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싸잡아 말하는 단어이다.
2. 당파의 계보
1) 서인 → 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
영조 때 사도세자의 처형을 둘러싸고 벽파와 시파로 갈려 대립.(서인, 특히 노론이 사실상 조선 후기의 정치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다.)
2) 동인 → 1591년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
북인은 광해군 폐세자론을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은 몰살, 소북은 자연 소멸.
남인은 인조반정 당시 서인의 파트너로서 정권에 참여하여 서인과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공존하기도 했고, 숙종 이후로는 서인과 피비린내 나게 싸우기도 했다. 정쟁에서 패한 서인의 주요인물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청남과 탁남으로 갈리게 되는데 청남이 주도권을 쥐었고, 갑술환국(1693)에 의해서 정치주도권을 영원히 잃게 되는 것이다.
3. 당파 싸움과 주요 이슈
1) 동인 VS 서인: 당시 중요한 관직이었던 이조정랑직을 둘러싼 싸움, 그리고 선조의 외척이었던 기성세력인 심의겸에 대해서 진보적인 선비들이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면서 붕당이 생긴다.
2) 남인 VS 북인(동인이 두갈래로 분당됨) VS 서인: 1589년에 벌어진 기축옥사(정여립 반역 의혹 사건) 당시 정여립과 친했던 많은 동인계 인사들을 처벌한 서인의 주요인물인 송강 정철의 행동에 대해서 동인에서는 맞대응해야한다는 쪽과, 정여립이 모반한 것은 사실이니 그냥 자숙하자는 의견이 대립. 정철은 2년 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진언했다가 밉보이고 강화도로 유배당하는데 이 당시 정철의 처벌 강도를 둘러싸고 동인이 두 패로 갈려서 대립함으로써 북인/남인으로 갈라 졌다.
3) 대북 VS 소북(북인이 분당됨):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실권을 잡게 된다. 선조 말년에는 서자인 광해군의 세자자리를 빼앗고 이를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물려주려던 소북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북이 대립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대북이 승리하게 된다. 광해군 즉위 이후 소북은 광해군에게 숙청당하고, 이 당시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대북이 쥐고 있었다.)
4) 남인 VS 서인 <공존기>: 인조반정(1623년)에 의해서 대북은 완전히 말살되고, 소북도 얼마간 근근히 명맥 유지하다가 자연소멸하고 만다.(북인 몰락) 따라서 남인과 서인은 한동안 평화적으로 공존했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서인이었으니만큼 실권은 서인이 가지고 있었다 하겠다.
5) 남인 VS 서인 <대립기>: "효종의 계모가 죽은 뒤, 효종이 몇년 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논쟁을 시작한 현종 때의 예송논쟁.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문제 같아보이지만 이것은 [왕은 특별하다]는 남인과 [왕도 신하랑 다를 게 없어야 한다]는 서인의 이념적 대립이 숨어있는 것이었고, 효종 같은 경우는 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소현세자를 미워했던 아버지 인조의 개입으로 인해 정식 상속자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젖히고 새치기로 왕위에 오른 만큼 정통성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했었다. 그것은 효종의 장남이었던 현종에게도 공통되는 문제였다.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지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남인의 발언권이 강화되게 된다.
6) 탁남 VS 청남(남인이 분당됨):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그 후로도 서인 쪽에 불리한 스캔들이 거듭되어 터지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 서인의 처벌문제(특히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죽이느냐, 봐 줄거냐)를 둘러싸고 온건파인 청남과 강경파인 탁남으로 갈라진다. 청남은 허적이, 탁남은 윤휴와 허목이 우두머리였는데, 이 싸움에서는 온건파인 청남이 승리하게 된다. 덕분에 송시열은 죽음을 면하게 됐다.
7) 노론 VS 소론(서인이 분당됨): 1680년에 숙종은 장인인 김석주의 도움을 받아 남인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한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청남의 허적, 탁남의 윤증이 처형당함으로써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은 하루 아침에 몰락한다.
서인은 송시열을 비롯한 원로들의 주도하에 숙종의 브레인이었던 김석주와 손을 잡고 정국을 주도한다. 당시 김석주의(왕권강화를 위했다고는 하나) 역모날조사건과 공작정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놈은 모두 <사문난적>이다"는 식으로 남인들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하는 송시열의 독단성에 반발하여 서인 온건파였던 윤증을 중심으로 당파가 쪼개져 나간다. 이것이 상대적으로 윤증이 젊다하여 소론으로 불리게되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존서인들은 노론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당시 소론의 힘은 약했고 남인은 식물인간 상태였기에 노론은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했었다.)
8) 노론 VS 남인: 남인계의 후궁이었던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임신하자 크게 기뻐한 숙종은 그 아이(훗날의 경종)를 원자로 책봉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노론 쪽에서는 서인계의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어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집요하게 태클을 걸었고, 숙종은 이를 무시하고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옥정을 장희빈으로 봉했다.
이 때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은 숙종의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논지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가 숙종을 미치도록 노하게 만들었다. "한 나라의 원로라는 놈이 끝난 일을 가지고 불씨를 지핀다"고 노한 숙종은 남인들을 기습적으로 등용, 송시열을 탄핵케 하여 제주도로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처형하고, 그 후속조치로 노론계 대신들을 몰아냈으며, 노론계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후에 봉했다. 이 사건을 기사년에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하여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이 때 남인들의 노론에 대한 보복은 경신환국 못지 않게 잔혹했다. (이로서 남인이 다시 정국 장악)
5년 후, 서인계에서 일어난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남인들이 탄압하는 데에 태클을 건 숙종은 남인들을 조정 요직에서 모두 쫓아내거나 몰아내고 그 자리에 소론의 중심인물들인 박세채, 남구만 등을 등용한다. 그리고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다시 복위시킨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서 숙종에게 철저하게 당한 남인은 다시는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남인 쇠퇴)
9) 노론 VS 소론: 노론과 소론은 인현왕후 저주혐의로 심판대에 오른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대립하게 된다. 노론은 장희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장희빈을 살려줘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노론이 승리하여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는다.
숙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1721년) 장희빈의 아들. 경종에 대해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를 후계자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넣고, 자신들이 지지한 연잉군에게 실권을 주어 경종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소론이 노론을 [불충한 무리] 로 탄핵하고 경종이 소론의 편을 들어 노론인사 일부를 축출함으로써 정국 주도권이 소론 쪽으로 기운다. 이를 신유옥사라고 한다. 1722년 소론은 공작정치를 벌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을 일으켜 노론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노론의 우두머리 4명을 처형한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1724년 사망) 연잉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정국은 다시 노론이 장악하게 된다.
10)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붕당정치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여 노론, 소론, 남인들을 고루 등용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영조의 지지기반이 노론에 있었기에 시작부터 한계가 있었다. 특히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은 소론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난의 된서리를 정면으로 받은 영남 지방(경상도)선비들은 과거 응시를 금지당했다. 그리고 1755년에는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다. 벼슬길이 끊긴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역적모의사건이었는데, 이 사건도 소론을 곤란하게 했다.
11) 벽파 VS 시파(사도세자 사건): 영조의 의향을 받들어 사도세자를 처형해야 한다는 벽파(노론 강경파)와 사도세자를 살려줘야 한다는 시파(노론 온건파, 소론, 특히 남인)의 대립이다. 결국 벽파의 입장이 우세하여 사도세자는 죽음을 당한다.(사실 사도세자의 처형 당시에 벽파와 시파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 생긴 단어로써,
정조의 對사도세자 정책에 찬동하는 사람을 (시류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비앙조에서) 시파라고 불렀고, 정조의 사도세자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벽파라고 부른 것이다.
정조의 탕평정책과 개혁정책이 좌절되고, 정조가 의문사한 이후 노론 벽파가 재집권하여 시파를 대청소하면서 조선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노론이 권력을 잡게 된다.(세도정치의 시작이며, 붕당정치는 여기서 사실상 종막을 맞이한다고 보면 된다. 그 이후로반대당이 없어지고 노론이 벼슬자리를 독차지하니까.... )
그 이후 조선말 안동김씨의 오랜 세도정치로 약해질대로 약해진 왕권을 대원군의 안동김씨와의 정면대결로 차츰 회복하는 중에 일제의 침략으로 강제 한일합병을 당하고 조선은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사색당파와 붕당정치|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