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OO,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 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의사들의 집단폐업이란 사상초유의 의료대란을 접하면서 필자는 문득 박남철 시인이 쓴 〈독자놈들 길들이기〉(1984, 문학과 지성사, 지상의 인간)란 시를 떠올렸다. 당돌하지만 시에 나오는 ‘독자’를 ‘국민’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싶어서였다. 한 네티즌은 PC통신을 통해 이번 사태를 ‘국민의 피해, 정부의 패배, 의사의 상처’란 문구로 요약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여야 영수회담으로 7월 임시국회 중 약사법 개정이란 후퇴안을 내놓은 정부에게 패배를, 집단 이기주의란 굴레를 쓰고 의협회장 등 집행부가 줄줄이 구속된 의사에겐 상처란 수식어를 부여했지만, 이번 의료대란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애꿎은 국민임을 강조한 것이다.
언론 역시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한 의사들을 맹비난했고, 정부의 대책소홀에 대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 언제나 그러했듯 국민이 최대의 피해자이며 국민을 위해 의사들은 진료현장으로 무조건 돌아와야 하며 정부도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아야한다는 논지였다. 하긴 언론의 입장에서 국민이란 말처럼 신성한 것도 없다. 국민을 위하는 일에 누가 감히 제동을 걸 것인가. 필자 역시 어떠한 명분으로도 의사가 환자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의사에게 있다고 본다. 그리고 명분만 내세워 의사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다가 이 같은 파국을 초래한 정부도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정말 불쌍한 희생자일뿐 이번 사태에 대해 과연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의사들을 비난하지만 집단폐업이라는 의사들의 그릇된 행태를 만들어낸 토양도 결국 국민이 제공한 것이며, 면밀한 준비없이 밀어붙이기로 일관한 정부 역시 국민이 선택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 역시 우리 국민의 수준이 그대로 투영된 자화상으로 봐야한다면 필자만의 과격한 생각일까. 그 동안 의사나 정부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충분한 비판이 가해졌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엔 화살을 국민, 즉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돌려보면 어떨까.
먼저 이번 의료대란의 최대 쟁점사항인 임의조제부터 풀어보자. 임의조제란 무엇인가. 약사가 의사 대신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행위다. 물론 의료법 위반이다. 약사회도 임의조제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정부와 시민단체는 모의환자를 투입해 약사들의 임의조제를 감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의사들은 현행 의약분업안이 임의조제의 소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약사법 39조 2항에 PTP나 알루미늄 호일에 싸인 알약에 대해서는 예외규정을 둠으로써 낱개로 파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면 포장지에 싸인 알약에 대해서는 포장지를 뜯지 않은 상태에서 낱개로 여러 종류의 약을 혼합해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논란의 대상은 일반의약품이다.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없는 일반의약품에 대해 임의조제면 어떠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예를 들어보자. 환자가 약국에 와서 소화제 훼스탈과 영양제 우루사를 달라고 요구해 약사가 여러 알을 섞어 판다고 한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작용이 적고 널리 쓰이는 일반의약품이니까 환자가 자신이 원하는 약을 골라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가 약국에서 약사에게 두통과 소화불량이 있는데 약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환자의 증상을 듣고 약사가 판단해 약을 주는 것은 의사의 진찰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명백한 임의조제란 것이 의료계의 주장이다.
의사들이 임의조제 문제에 민감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일반의약품에 대한 임의조제 문제가 방치될 경우 진료수익에 막대한 타격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네의원은 감기나 고혈압 등 가벼운 환자들을 대상으로 치료하는데 이들이 약국에서 임의조제를 통해 약을 구입할 경우 환자 수가 격감한다는 것이다. 비보험 시술이나 고가검진 등 돈벌이가 되는 치료가 여의치 않은 동네의원의 입장에서는 진료수익이 전적으로 방문환자 수에 달려 있다. 내과나 소아과의 경우 하루 방문 환자 수가 50명을 넘지 못하면 임대료와 리스료, 인건비에다 개업자금에 대한 은행이자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이러한 임의조제가 선진국형 의약분업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약국에선 약사의 조제실과 일반의약품의 판매대가 격리되어 있어 환자는 일반의약품을 자신의 의지대로 고를 뿐 약사와 상의하는 일이 없다. 약사는 조제실에서 환자가 건네준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 조제만 할 뿐 환자의 증상이 어떤지 따로 묻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의사들이 내놓은 임의조제 금지방안이 포장알약에 대해선 최소판매량을 30정 이상으로 하고 판매기록부를 약사가 작성토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타이레놀 한두 알이면 가능한 가벼운 두통환자도 불필요하게 30정 이상 사야하는 데다 일일이 신상명세를 공개하고 판매기록부를 써야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사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선진국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임의조제 문제가 이처럼 의약간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 국민 사이에 뿌리깊이 박힌 관행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가벼운 질환에 대해 약사와 상의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즉 일차진료에서 약사를 의사와 동일시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관행을 제도를 통해 인위적으로 개선하려고 하다보니 최소판매량 30정이란 웃지 못할 억지대책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관행에는 과거 의원에 대한 문턱이 높았고 의사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한 탓도 크다. 그러나 잘못된 관행이라면 고쳐야 옳다.
일반의약품이라 할지라도 약사의 문진을 거쳐 약을 구입하는 임의조제가 나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대부분의 중병도 처음엔 가벼운 증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위암도 소화불량으로 시작하며 뇌종양도 두통으로 시작한다. 만일 대부분의 환자들이 관행대로 증상이 나타날 때 의사보다 약사를 찾아 약을 구입해 복용한다면 위중한 병을 늦게 발견해 치료시기를 놓치는 불행한 사태가 생길 수 있다. 둘째 이유는 의약분업 본래의 취지와 달리 일반의약품에 대해 의약품 남오용 현상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약사는 일반의약품을 많이 팔수록 조제료 외에 일반의약품에 대한 판매수익이 덤으로 늘어난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보재정을 아낄 수 있어 내심 환영이다. 일반의약품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귀찮게 의사를 찾아가기보다 약국에서 간편하게 약을 구입하길 원할 것이다. 제약회사는 자사의 제품이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기 위해 사생결단의 로비를 벌일 것이다. 결국 일반의약품의 남오용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란 것이다.
그렇다면 임의조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최소판매량을 30정 대신 10정으로 하향조정하자는 중재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임의조제 근절은 최소판매량을 제한하는 등 제도를 통해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약사의 문진을 통해 약을 구입하는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관행부터 개선해야하기 때문이다. 약사는 약에 대한 전문가지만 의료법에 명시된 의료인은 아니다. 약을 어떻게 복용해야하는지에 대한 복약지도나 약물상호작용을 분석해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지 의사의 처방전을 감시할 순 있지만 환자의 증상을 듣고 질병을 진단한 뒤 약을 처방하는 것은 의사 고유의 역할이란 뜻이다. 의사를 만나는 것이 과거처럼 어려운 것도 아니다. 동네마다 의원들이 즐비하며 가벼운 질환의 경우 진찰과 약값을 포함해 환자는 3천 2백원만 내면 된다. 결국 국민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선진국처럼 먼저 의사의 진찰을 거친 뒤 처방전대로 약을 구입하는 것만으로 임의조제 문제는 충분히 해결된다는 의미다.
의료비와 관련한 문제도 그렇다. 우리 국민들은 진찰이나 상담 등 의사들의 무형적 서비스에 대한 금전적 지불에 유달리 인색하다. 두툼한 약봉지를 받거나 주사를 여러 대 맞아야 비로소 제대로 치료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장시간 의사와 상담하고 나온 환자에게 약을 주지 않고 진찰료를 청구하면 왜 돈을 내어야 하느냐는 반문을 듣기 일쑤다. 그러나 진정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라면 가급적 불필요한 약이나 주사를 처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지금처럼 약이나 주사를 좋아하는 풍토가 남아있다면 의약분업을 해도 의사들은 2천8백원의 처방료를 보전하고 그나마 오던 환자라도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처방전을 남발할 것이다. 의사의 진찰을 푸대접하는 우리네 관습이 존속하는 한 의약품 남오용의 굴레에서 벗어나긴 어렵다는 뜻이다.
비현실적으로 낮은 의보수가도 무작정 덮어두기만 해선 안 된다. 강아지 분만료가 사람을 낳는 것보다 비싸고 세탁소 옷감 수선비가 사람 살 꿰매는 것보다 비싼 현실을 그냥 웃고만 넘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US News & World Report》는 얼마 전 커버스토리로 미국의 의료보험료가 살인적으로 비싸 자녀들을 마음놓고 놀이터로 내보내지 못할 정도라고 보도한 바 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제대로 된 의료보험혜택을 받으려면 연간 8천 달러(9백6십만 원)란 막대한 보험료를 내야하므로 대개 부모만 가입하고 자녀들은 보험에 가입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자녀들이 놀이터에서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하루 입원료만 10만 원을 넘는 천문학적인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순식간에 가산을 탕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식 의료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진국과의 소득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이 보건의료를 위해 지불하는 돈이 턱없이 적다는 것이다.
수가가 낮다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지 않느냐는 반문도 있다. 그러나 의사가 잘 살고 있는지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양심진료를 행하는 의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현재와 같은 저수가 체제에서도 의사들이 잘 산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비공식적인 수단을 통해 수익보전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환자를 돌보는 것보다 상술에 강한 의사만 살아남는다면 결국 피해는 국민이 볼 수밖에 없다. 소득의 3%만 의료보험료를 내므로 원가의 70%를 밑도는 수준으로 보전되는 현행 의보수가체제로는 약삭빠른 의사만 살아남고 좋은 의사는 몰락하는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다.
국민들은 의료보험료를 더 내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긴 누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더 내야하는데 반가워하겠는가.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보약이나 건강보조식품 등 비공식 의료엔 수십만 원의 비용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건강을 책임질 의사에게 지불하는 몇천 원의 돈을 꺼린다면 이 또한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무조건 큰 병원을 선호하는 국민성도 문제다. 종합병원이 입원환자가 아니라 외래환자로 미어 터지는 현상은 전세계적으로도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 3시간 대기 3분 진료도 결국 국민들이 자초한 일이 아닌가. 감기나 고혈압 환자가 왜 명의를 찾아야하는지 필자는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른다. 동네의원 의사의 실력을 못 믿겠다지만 감기나 고혈압처럼 가볍고 흔한 병은 종합병원 명의보다 동네의원 의사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치료 노하우도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의사들에 대한 우리 국민 특유의 이중잣대도 짚고 가야할 문제다. 시장경제 논리를 내세우면서도 의사들에게만 유독 허준이나 히포크라테스를 강요한다. 의사들을 비난하면서도 막상 의과대학은 가장 높은 입시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일부 의사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과대평가해 양심적인 의사까지 싸잡아 허가받은 도둑으로 몰아친 면도 없잖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의사에 대한 불신은 국민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아플 땐 다른 사람이 아닌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결코 의사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 같은 국민의 의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잘못된 의료이용 행태엔 궁극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의사와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에게도 잘못된 의료관행을 고쳐 나가야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의료대란이라는 산고를 거쳐 탄생한 의약분업도 결국 의사나 약사보다 국민을 위해 시행하는 제도가 아닌가. 국민이 발벗고 나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의약분업은 의약품 남오용을 줄이기보다 번거로움만 보태는 또 하나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