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자 사모] ③ 부모님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2011/11/29 (화) 01:56 ㆍ추천: 0 ㆍ조회: 516

1. 고통 받고 있는 아이들
지난 주간 조국 대한민국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발생한 우등생이었던 고등학교 3학년 아들의 ‘존속 살인과 8개월 간의 사체 유기 사건’ 으로 인한 충격이 태평양 건너 뉴욕의 동포사회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들이 엄마를?” “오죽했으면?”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만 깊어져 갔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아이의 부모는 불화로 부부가 5년 전부터 별거 중이었고, 우등생이었던 외아들과 함께 산 어머니는 아들의 성적(공부)에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너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야 하고, 반드시 외교관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입시켜 왔다고 합니다. 아버지에 의하면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일곱 살 때부터 자기가 기대하는 성적을 받아오지 못했을 때에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 며 폭언과 폭력을 일삼아 왔고, 시댁 식구들은 물론 친정 식구와도 발을 끊고 살았기에 그 누구도 아이의 일을 간섭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경찰 조서에 의하면, 아이가 일을 저지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사건)다음 날에 있을 '학부모 회의에 어머니가 참석하여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예전에 본 모의고사 성적(등수)을 고쳐서 어머니에게 보여준 것이 발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분명히 어머니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순간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자백했답니다.
이와같이 자녀가 부모를 살해한 존속 살인 사건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따금씩 있어 왔습니다. 존속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로서 법의 판결을 받아야 했던 자녀(아들 또는 딸)중에는 술만 마시면 폭군으로 변하여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아버지의 행패를 막아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도무지 없었다고 절규하였답니다. 그들은 가해자이기 이전에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무력한 미성년 피해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아이들을 그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까? 그런 상황이 될 때까지 부모는 무엇을 했으며, 이웃들은 ‘사생활 침해’ 라는 그럴듯한 법적인 핑계를 대며 뒷짐을 진 채 ‘강 건너 불 보듯이’ 할 수 밖에 없었단 말입니까? 어른들이, 이웃들이, 학교가 그렇게 그들에게 무관심했던 오랜 세월 동안 그 아이들은 혼자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의 늪 속에서 지옥과 같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꿈과 희망으로 피어 올라야 할 나이에 부모를 미워하며, 세상을 야속하게 여기며, 언제나 이 어둡고 침침한 고통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몸부림쳤을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옴을 느낍니다.
2. 어린 시절의 상처가 평생을 갑니다.
어린 시절(모태에 잉태된 순간부터 사춘기까지)이 행복해야 건강한 인격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여러가지 이유로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 상처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치유받지 못하면 아이들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가 때론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쓴 뿌리(bitter root)’ 가 되거나 ‘견고한 진(strong hold)’ 이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가정 생활, 학교 생활, 직장 생활, 신앙(교회)생활을 할 때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받을 수 있는 상처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큰 충격이며, 동시에 큰 상처로 남는 것은 바로 '부모의 이혼' 입니다. 부모의 이혼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가치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 엄청난 혼돈입니다. 이외에도 복잡한 가정 형편(너무 바쁜 부모, 재혼 가정, 편 부모 가정, 동거 가정, 다문화 가정 등), 질병, 사고, 성폭행 등으로 인한 상처가 아이들을 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주 요인이 되곤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어린 시절에 ‘기본적 필요(중요감, 안정감, 수용감,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 칭찬, 훈육, 그리고 하나님 : 죤 드레셔)' 가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둘 중의 한 방향을 택하게 되는데 하나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되는 경우로서 ‘도피 반응’ 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남에 대해 공격적인 성격이 되는 것으로 이것을 ‘도전 반응’ 이라고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줄 수 있었으면 그런대로 큰 문제없이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받은 고통이 적절히 발산 되거나 해소되지 못하면 그것은 그대로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둥지를 틀고 있다가 언제든지 '탈출구(Exit)' 가 생기면 그곳을 통하여 '무서운 독소'를 뿜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사건이 좋은 실례(example)가 되기에 소개합니다. 첫째는, 2007년 4월 16일, 무고한 32명의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전(全) 미국을 전율케 했던 '버지니아 텤(Virginia Tech) 총기 난사 사건’ 의 ‘조승희’를 기억하시지요? 똑똑했지만 말 수가 적었던 조용한 아이, 말로 자기 표현을 제대로 못했던 아이,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 고립되었던 아이, 그런 그는 어린 시절에 ‘도피자’ 의 삶을 살 듯 소외된 채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청소년 기를 지나면서 어린 시절부터 마음 속 깊이 쌓여진 분노와 열등감은 마치 화산 속의 마그마가 되어 꿈틀거리고 있다가 대학 4학년이던 어느 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불을 뿜어댄 ‘도전 반응’이 바로 ‘총기 난사 사건’ 으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지난 7월 22일, 북유럽의 조용한 나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중심부와 우퇴위아 섬에서 77명이나 되는 소중한 생명을 앗아감으로 나라 전체를 아니, 이 지구촌을 순식간에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32세의 청년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있습니다. 그의 겉모습은 부족함 없이 자란 건장한 청년 같아 보이지만 영국의 언론 ‘인디펜던트’에 의하면 그가 한 살 때 부모는 이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는 재혼 후 아들 곁을 떠났고, 군인 출신 의붓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어린이로 자랐지만 예민한 15세(사춘기)에 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사생활이 문란한 양 아버지에 대한 불만 등이 커지면서 ‘극우 사상’에 심취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역시 어릴 적에 받은 깊은 상처가 타인을 향한 공격적인 ‘도전 반응’이 되어 ‘테러와 총기 난사’라는 비극을 낳게 한 것입니다.
3. 부모들이 모르는 자녀들의 스트레스
데이빗 엘킨드(David Elkind)는 그의 저서 「조급한 아이(The Hurried child)」에서 “요즈음 아이들은 본의도 아니고, 자기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의 희생자가 되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신들도 과거에 어린이 시기와 청소년 시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녀(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특성과 관심사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녀를 몸으로는 낳았지만 마음으로는 낳지 않았기에 저절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부모가 자녀의 심리적이고 영적인필요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무지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우기 부부(부모)의 관계도 원만하고, 경제적인 형편도 여유가 있고, 신앙생활도 자리가 잡혀 있어서 비교적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계신 부모들은 자녀들이 이웃들로부터 “저 집아이는 공부도 잘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교회에도 잘 다니는 아이” 라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이 정도면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환경을 잘 조성해 주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도 부모의 생각과 항상 같을까요?
반면에, 부부(부모)가 불화하여 안정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못했거나,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싱글 맘이나 싱글 대디(편 부모)가 되어 자녀와 살고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어 자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하는 부모 중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한 부류의 부모는, 자녀를 이런 결핍된 가정 환경의 일방적인 피해자로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자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저 자세로 대합니다.
아이가 잘못된 일을 했을 때 마땅히 부모의 권위를 행사해야 할 때에도 아무런 벌도, 훈계의 말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주저 앉고 맙니다. 반대로 다른 한 부류의 부모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으로 인하여 자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싸매어 주고,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격려해 주어야 할 상황에서도 어린 자녀가 느꼈을 ‘거절감(아이들은 부모가 불화하거나 이혼하게 되면 그 원인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상실감, 분노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자신(편 부모)의 고통만을 이해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너는 공부나 더 열심히 해!" 라고 몰아갑니다.
어린 자녀들도 부모 때문에,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생활에서, 친구 관계에서, 신앙 문제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부모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녀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뭐하냐? 공부 좀 해라!” 고 반복하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아이가 짜증이라도 내면, “아니 언제 아빠, 엄마가 너희더러 돈 벌어 오라고 했냐? 하라는 공부만 하면 되지, 너네가 신경 쓸게 뭐있냐? 도대체 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야?” 고 자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버럭 화부터 내니 자녀들은 부모님 앞에서 아예 말문을 닫을 수 밖에요. 그리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 입니다. “그래, 우리 아빠, 엄마와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구나. 앞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다. 이제부터 나는 그저 이 집의 하숙생일 뿐이야!”
4. 자녀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 중에는 부모와 학교와 친구들과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기를 겪으면서도 크게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어두운 데서 흐느끼고 있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아이가 문제를 밖으로 터뜨리기 까지는 긴 시간의 ‘잠복기’ 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한 손에는 캔디를, 다른 한 손에는 곰 인형을 안겨 주었다고 해서 '만사 오케이(Okay)'가 아닙니다. 청소년 자녀에게 그들이 입고 싶어하는 고가의 브랜드 옷을 사 주었다고 해서,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스마트 폰을 손에 들려주었다고 해서, 요구할 때 마다 용돈을 넉넉히 주었다고 해서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준 것이라고 위안을 삼으시면 안될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빠와 엄마가 -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며, 다정하게 지내는 -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며, 인정받는 것이고, 울면서(울고 싶은 심정으로)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빠나 엄마가 두 팔을 벌려 안아주며 위로해 주는 것이고, 함께 있어주기를 원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고, 잘못한 일에 대하여 따끔하게 야단쳐 준 후, 분명한 기준을 가르쳐 주는 것이며, 때론 부족하여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실수하여 일을 저질렀어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무개야, 그래도 아빠(엄마)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소리 내어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5. 자녀 세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를 ‘SNS(Social Network System)시대’ 라고 합니다. SNS란, 의사 소통과 정보 공유를 통하여 온라인 인맥 구축을 목적으로 개설된 커뮤니티 형 웹 사이트로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는 싸이 월드(cyworld), 페이스 북(facebook), 트위터(twitter), 마이 스페이스(myspace)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령기 자녀들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가서 앉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유아들까지도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면 자리를 뜰 줄 모릅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디지털 기기 증후군' 으로 병원과 전문가를 찾는 부모(유아)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컴퓨터만이 아니라 스마트 폰(smart phone)이나 타블렛 pc(tablet personal computer)등도 그들의 삶에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결코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며, 애장품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컴퓨터 매니아들은 ‘컴퓨터 없이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무인도에 가서 사는 것이 낫다’ 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1970년대, 그러니까 지금은 50-60대의 중년이 되신 부모님들이 청소년기를 지내고 있을 때 단어의 뜻도 잘 모르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팝송(popular song)에 심취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내셨습니까? 그 때 우리 부모님들께서 우리들을 이해하시고 반겨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환영받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들이 ‘세대 차이’ 때문에 우리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던가요?
이젠 우리가 우리 자녀들로부터 역습을 당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자녀의 뒷 꼭지(모습)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물론 긴 시간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방치하라는 의미는 아님) 일방적인 잔소리나 야단침이 아닌, 부모와 자녀 쌍방간에 의견 조율을 통한 ‘바람직한 컴퓨터 사용 수칙’ 을 만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옥신각신하는 충돌이 없기를 바랍니다. 행여 컴퓨터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중독(?)수준이라면 거기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와의 세대 차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일단은 최대한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에게 코드를 맞추려고(신앙생활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면)노력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컴맹의 늪에서 벗어나 자녀들을 컴퓨터의 사각지대(음란물과 같은 유해 사이트)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6. 자녀의 마음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의 신앙교육은 교회가 어련히 알아서 책임져 주겠지.” 라고 기대하며 자녀의 복된 인생을 위하여 ‘부모에게 맡겨진 신앙교육의 권한(특권)’을 교회로 이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자녀는 ‘여호와의 기업’ 으로서 ‘언약의 자녀’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왕국의 자녀답게 품위 있는 자녀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가정이 ‘제1의 학교’이며, 부모인 여러분이 ‘제1의 교사’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녀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성경적인 가치관’ 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 만사를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실력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 교육이 가져다 주는 결과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 학문과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저절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죄 가운데 태어난 자녀들에게는 ‘복음’ 외에는 그들을 바르게 세울 대안(해결책)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복음을 알아야 하고, 구원의 은총 속에서 거듭남을 체험해야 하며, 세상을 향한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위해 헌신하고 그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그들의 선두 주자가 되어 좋은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배의 모범, 가정 생활의 모범, 교회 생활의 모범, 직장(비니지스)생활의 근면과 정직,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과 섬김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가정에서 식사 시간이나, 가정 예배 시간에 식탁에 둘러 앉아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대로의 느낌과 이해와 의견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매우 바람직한 교육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부모 세대에서 자녀세대로(Generation to Generation)’ 계속 전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며, 간절한 소원이시기 때문입니다.
7. 부모의 역할, 배워야 합니다.
훌륭한 부모는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부모의 역할을 열심히 배우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녀로 만들어주고 싶지 않으십니까? 부모의 역할을 잘 하려면 ‘부모와 자녀의 정체성 확립’ 과 ‘사명 인식’ 이 필요합니다. 정체성의 문제는, 부모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양육해야 할 자녀가 어떤 존재인지(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의 앞부분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분에 걸맞게 살아야 할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왕족으로 선택 받았기에 왕족답게 키우고, 왕족답게 자라서, 왕족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 입니다. 과거 소인배로 살 때처럼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 입니다.
‘정체성 확립’ 에 이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인식하는 것’ 인데 베드로 전서 2장9절의 뒷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 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려 하심이라.” 내 자녀가 대학교(원)를 졸업하고 사회의 어느 분야, 어느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되든 하나님의 자녀인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 임을 일찍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명에 합당한 자녀로 양육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들은 어린이 시기와 청소년 시기에 있는 자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떠한지, 그들이 어떤 친구들과 사귀고 있는지, 그들이 보이는 돌발적인 행동(행동의 근원은 마음입니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들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했는지, 그들의 교회(신앙)생활이 어떠한지, 지금 그들의 관심사나 고민 거리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눈치 안채게)파악할 수 있기 위하여 ‘대화의 통로’ 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교회 주일학교 지도자와 교사들 역시 그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그들이 어린이 시기와 청소년 시기를 큰 탈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신앙교육에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이 자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 가정(부모)와 교회는 보다 일찍, 적극적으로 신앙교육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8.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은 지켜져야 합니다.
저는 미국 동부에 있는 뉴욕 주 퀸즈 구의 후러싱이라는 한인 저 소득층 밀집 지역에 있는 작은 이민 교회 사역자로 살아 온 지난 여러 해 동안 가정(부모)의 위기로 인해 방황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가까이에서 가족처럼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을 다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불화하여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 마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자신들이 선택하여 태어난 가정(부모)이 아니었기에, 가정의 회복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낯선 타국인데다 아무런 여건도, 능력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위기 속에서 벗어날 길은 안개 속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늘 불안한 마음과 의심의 눈초리와, 오늘이 가면 다가올 내일에 대한 두려움 외에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나마 어릴 적부터 배워 온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위로와 은혜가 있었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돌봐주는 믿음의 가족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렇게 버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가정을 만드시고 ‘부모와 자녀’ 라는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 가게 하십니다. 그 가정들을 통하여 ‘당신을 향한 아름다운 신앙’ 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가정들을 향하여 “사랑이 있으라.” “평화가 있으라.” “용서가 있으라.” “회복이 있으라” “기쁨이 있으라.” “소망이 있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녀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방황하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먹구름으로 뒤덮힌 하늘을 바라보며 집을 나서야 하는지 아십니까? 마음 속 깊은 상처로 인해 감당하기 버거운 일을 저지른 철없는 자녀를 부모마저 외면한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났던 못났던, 부모의 기대에 부응을 했던 하지 못했던, 내 몸에서 나온 아이는 내게 맡겨주신 분깃이기에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낳아 준 엄마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갓난 장이 때 조국을 떠나 낯선 나라로 입양된 자녀들도 청소년 기를 지나 철이 들 때면 친 아버지와 친 어머니를 찾아 조국 땅을 찾아옵니다. 따뜻한 젖 한 모금 물려주지도 못했는데, 도저히 양육할 자신이 없어서 친권도 포기했었는데 어인 연고로 그 아이는 “그래도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준 부모님을 찾고 싶다. 단 한 번이라도 그 품에 안기고 싶다.” 고 하며 그 고통의 세월을 잊은 채 조국 방문길에 오를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렇듯 키워주지도 못한 자녀는 부모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부모가 자녀를 포기해서 되겠습니까? 이런 논리라면, 우리 부모들 모두는 진작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골백번 버림받아도 마땅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에, 우리의 행위에 용서받을 만한 눈꼽 만한 의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 지금 문제투성이 자녀로 인하여, 그 자녀가 일으킨 문제로 인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며, 이젠 살 소망까지 끊어질 것 같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의사소통(혹, 언어 문제 포함)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는 형성되어 있지만 도무지 가족애를 느끼실 수 없습니까? 그러시다면 눈을 감고 문제투성이 자녀의 모습 속에서, 행동 속에서 부모인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자녀 안에 부모인 여러분의 모습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발견하셨다면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로 세워주셨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을 자복하며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향한 용서와 긍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문제를 낱낱이 자백할 때 해결 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복음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부어주실 때까지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면 표현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성령의 위로와 만져주심을 처함하게 되고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집을 떠나 가지고 나간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 꼴이 되어 돌아 온 둘째 아들을 아무 말 없이 반겨주시고, 그 못난 아들을 위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까지 신겨 주셨던 그 아버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우리가 그런 아버지(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가정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언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 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혼자 힘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위기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지금 이 시간 어디에선가 위기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어린 자녀들을 건져 주옵소서! 상처로 찢겨진 이 땅의 가정들을, 부모들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회복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찬양을 받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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