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목요일(2005년 3월 17일) 밤 10:15분부터 약 90분간 CBS 생방송에서 숙명의 대결이 펼쳐진다. 이번 토론 대결은 한나라당 지지 운동가와 한나라당 의원 사이의 운명의 한판 승부라는데에 그 특징이 있다. 두 분 다 보수 우익 정당 한나라당을 헌신적으로 섬기는 분들인데, 어째서 이런 토론이 필요할가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사태 두 주역에 대한 두 다른 명예심의 결려있는 대결이기에 O.K. 목장에서의 이번 토론 대결은 두 분 다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토론이다.
한편에서 광주사태 희생자들의 명예에 대하여 말할 때 한편에서 상처받는 국민도 있다. 광주사태 희생자의 삼분의 이는 군경이다. 그리고 공산화를 막았다는 데서 그들이야말로 민주화의 주역이었다. 민주화와 공산화는 결코 혼동될 수 없는 의미이다. 폭도들이 5월 22일 광주시청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전남 도청에 (공산당 행정구)라는 의미의 해방구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공산화 운동이었다. 일본 조총령으로부터 주체사상 이념서적을 밀수로 공급받아 전국 대학가 운동권에 보급하던 광주의 좌익 서점 녹두서점이 광주사태 선봉에 있었다. 광주사태 이후 주체사상 이념서적이 386 세대의 대학가에 급격히 퍼지면서 주사파 운동권이 그 세를 키워나갔다. 주체사상은 북한 공산주의 사상이요, 그 세력이 커진다는 것은 공산화를 의미한다.
광주 녹두서점은 북한 이념 서적을 조총련을 통해서 밀수해 드려오던 서점이었기에 간첩단 혹은 자생 간첩단의 접촉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녹두서점 주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는 분명 자생 간첩은 아니었으되, 어디선가 괴전화가 그를 선동하였다. 우리는 그 괴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광주사태가 확산될 때 북한군이 일제히 남침하기 위해 휴전선에 총집결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원희룡 의원이 매년 5월이면 망월동으로 내려가는 것 이상으로 북한에서는 매년 5월 광주사태를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다.
"5월의 광주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저를 학생운동가로 변모케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라고 말하는 원희룡 의원은 자신을 광주사태(그의 말로 광주 민주화운동) 세대의 정치인임을, 5월의 정신을 기리는 정치인임을 기린다. 이것이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한나라당 후원 운동가 지만원 박사가 5.18 관련 발언을 할 때마다 심히 못마땅해하는 이유이다. 원의원이 지박사에게 토론 대결을 신청한 직접적인 이유는 한승조 교수의 기고문에 대한 두 다른 해석이었지만, 지박사의 5.18 해석에 대한 평소의 그의 반감이 이제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쌓였기 때문이 듯하다.
그러나 원희룡 의원의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지만원 박사도 광주사태의 희생자를 생각한다. 광주사태 희생자 중 삼분의 일은 군경이다. 희생자들 중 국적이 대한민국 국적이 아니었던 시민군들의 수를 제외하고 나면 시민군과 군경 희생자의 수는 사실 엇비슷하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군경은 공산화를,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군무를 수행하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에 군경 희생자들은 소외된다. 그들에게는 보상도 위로도 없으며 죄인 취급을 받는다. 폭도들 혹은 시민군에 희생당한 수많은 군경들은 왜 5월에 소외되어야 하는가?
지만원 박사 입장에서 광주사태 때 희생당한 군경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 나라는 이상한 나라이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군무에 충실했던 젊은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 군인의 사기를 그렇게 꺽어 놓으면 차후에 어떻게 군인이 나라를 지켜주기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광주사태와 똑같은 사태가 1975년 3월 월남 중부지방에서 있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 간판을 건 시민군의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월남군인들은 탈영하였으며 그 틈을 타 월맹군은 총 한번 안 쏘고 월남 수도 사이공을 정복할 수 있었다. 월남 시민군의 민주화운동은 그 의도가 무엇이었던간에 그 결과는 월남 공산화였던 것이다.
여기에 원희룡 의원이 말하는 5월의 정신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국민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이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광주사태의 한 배후였던 녹두서점이 북한 이념 서적을 조총련을 통해 밀수하였던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과 관계가 된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좌익 서점들을 통해 주체사상 서적을 1970년 대에 한국 운동권에 공급하던 조총련은 문세광을 보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였다. 무엇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의 목표였던가? 아마도 그것은 김일성의 남침, 남한의 공산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조총련이 어떤 단체인지 모를리 없건만 광주사태 주동 세력 중에 이렇듯 거래하는 서점이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국민이 어째서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객관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이유는 북한에서는 광주사태를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때 시민군으로 변장한 북한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5월 22일 전남도청 지하실에 광주시를 한순간에 대한민국 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만한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한 이들이 광주 시민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사흘 전 5월 15일 유시민 등 서울 운동권이 시위를 주동하였을 때 시위대 속에 숨어있던 괴한이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전경들을 여러명 깔아죽이고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운동권은 그런 전경 살인을 계획한 일이 없음을 증언한다. 요즘 노빠들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고 성화이지만 우리는 당시 그 괴한이 누구였을지를 물어야 한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던가? 광주사태가 끝나자마자 주사파 전대협이 등장하였으며, 전대협의 후신이 한총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체사상 확산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개념의 혼동 작전이다. 공산화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월남은 영토와 주권이 공산화되기에 앞서 운동권 의식이 먼저 공산화되었었다. 따라서 사상계에 주체사상이 확산되는 것도 공산화이다. 그리고 공산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광주사태를 일으킨 민주주의 철학은 혹은 광주사태 후에 자라난 자유 민주주의 운동은 무엇이었는지를 국민은 알고 싶어한다.
그러면 한국 운동권 혹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광주사태를 어째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북한 입장에서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다. 김일성이 1980년에 왜 광주사태를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에 이용하려 하였는가? 그것은 한국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중산층이 등장하였을 때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이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민의 소득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계층이 일시 생겨나는 것은 후진국의 경제가 빨리 성장할 때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광주사태는 북한편에서 대남적화 전술의 틀을 잡아나가는 계기였다. 사람들은 전남대생들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한 것이다. 5.18단체들도 마치 전남대생들이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던 것처럼 선전하지만 이것은 국민을 크게 기만하는 행위이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 반에 백 명의 전남대생들이 7명의 경비병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 주동한 자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전남대생들은 예비군 무기고를 약탈하여 국군에게 총을 쏘거나 광주 군납회사에서 탈취한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래서 5.18단체들도 광주사태를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전남대생들과 시민군을 구별한다. 여기서 선량한 광주시민과 시민군은 이렇게 구분된다. 5월 22일 도청 점거 후 총기 무장을 한 채 도청에서 숙식을 하던 무리를 시민군이라고 부른다. 즉, 저녁 때 귀가하지 않고 해방구(공산당 자치구) 사령부 근무를 하던 자들을 말한다. 광주사태 10일에서 실제 진압작전은 27일 새벽에 단 한시간 있었다. 그때까지 도청에 남아 있다가 국군에게 사격하였던 무리를 시민군 중심 세력으로 보면 된다. 문제는 그들의 신원이다. 모두가 직업이 구두닦이이거나 목욕탕 떼밀이거나 무직 등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이 민주주의 이념을 위해 국군에게 총을 쏘았는가? 아니다. 이것은 북한 편에서는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자발적으로 북한에 이용당할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그래서 광주사태를 기점으로 북한의 대남 적화 전략이 확 달라졌다. 1970년대까지는 북한은 쉴새없이 무장공비를 남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남한 국민들의 반공 정신만 높여줄 뿐이었다. 그래서 광주사태를 기점으로 북한은 무장공비 대신 남파공작원들을 보내 주체사상을 퍼뜨리는 등 심리전에 초점을 두었다.
자, 운동권이, 특히 김대중 선생 재지자들이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광주사태가 대통령을 만들어 준 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고 나서야 국민은 우리나라가 좌경화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미국과 가까워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미운동이었다. 한국은 미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나라요, 일본은 두 번의 원폭 이후 미국에 항복한 패전국이다. 일본이 자기네 영토로 여겼던 한반도도 미국이 일본에게서 빼앗아 한국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럼에도 일본이 점점 친미주의 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로 맺은 인연 때문이다.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혜택이 많은 나라이다. 미국이 마샬플랜으로 전 유럽에 쏟아 부은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상원조를 한국에 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 때 한국인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삼십 만 명이 피를 흘리고, 오만 명이 목숨을 바쳤다. 역사상 그런 예가 또 어디 있었던가! 그리고,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은 미국에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 오천년 사에서 언제 민주주의의 경험이 있었던가? 36년 간의 일본 총독부 정치 역시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는데, 광주사태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반미운동이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아무데나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 민주화 운동인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사회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북한 역시 자기네 경제는 사회주의 경제라고 주장하기에 여기 용어의 혼동이 있다. 또 하나의 혼동은 어떤 수준의 사회주의냐에 대한 문제이다.
북한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합쳐진 나라라면 유럽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합쳐진 나라들이 많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말할 때 양자 중 어떤 사회주의인지 명백히 밝혀야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도 영국이나 독일 같은 강대국들도 사회주의를 접목하는 순간 경제가 불치의 병에 걸렸었거나 걸리고 있기에 사회주의는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미국 같은 강대국도 만일 유럽식 사회주의를 접목하면 일시에 경제가 무너져 내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유렵식 사회주의는 미국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 높은 국민소득과 사회주의를 병행하는 나라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무식한 한국 좌파가 알아야 할 점은 이것이다. 이미 풍부한 자원과 기술 자립과 자본으로 국가경쟁력이 안전 궤도에 들어가 있는 나라들이 사회주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좌파는 자원도 없고, 기술 자립도 못하고 자본도 부족한 나라에서 경제의 성장 동력을 희생시키는 사회주의를 하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북한처럼 전부 못사는 사회주의, 외국에서 식량 원조 받지 못하면 국민이 굶어죽는 사회주의를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서민을 위한 길인가?
바로 여기에 우리가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품는 의문점이 있다. 본래 광주사태가 계엄군의 신속한 대응이 없었으면 안보 위기를 몰고올 뻔한 사태였다. 그리고, 386 중에 한때는 주사파 활동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더니, 지금은 사회주의로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안보 위기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김대중은이 북한에 핵무기 개발 자금 지원해 준 이래 휴전선 일대에는 남침 도로 공사를 해주고, 미군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시켜 인계철선을 없애고, 국가보안법마저 철폐시키려 하고, 마치 제2의 쇄국정책을 하는 양 반미, 반일 운동으로 한국을 점차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있다. 즉,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화 운동인가?
여태까지는 광주사태에 대한 주장은 한쪽편의 일방적인 인민재판으로 행해져 왔다. 그러나 인민재판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만약 5.18 당시 희생 당한 군인들을 죄인 취급하려면 그 근거를 말해 주어야 한다. 1996년 5.18 특검이 진실을 밝혔음에도 일방적인 인민재판은 여전히 계속되어 왔으며, 그때 희생당한 군경의 영전에는 여전히 꽃을 바치는 이들이 없이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만원 박사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군인의 명예와 사기를 되찾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광주사태 시민군 희생자의 명예를 보호하려는 원희룡 의원과 광주사태 군경 희생자의 명예를 되찾아 주려는 지만원 박사가 오는 목요일(2005년 3월 17일) 밤 10:15분부터 약 90분간 CBS 생방송에서 토론 대결을 하게 된 것이다.
5.18 광주사태 당시 무장 시민군의 차량 행렬. 폭도들은 무장 유혈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민은 누가 이런 선동을 하였는지 궁금히 여긴다.
* 지금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동영상 을 클릭하시면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무지한 채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노빠들은 아직 이 영화 동영상 상영 중일 때 빨리 보셔요.
첫댓글 의미있는 논쟁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