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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황군(皇軍)을 격파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50) 피에는 피, 죽음에는 죽음 2
(원제 : 메즈도우소비차(МЕЖДОУСОБИЦА, 국제전).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По следам нижнеамурской трагедии). 저자 : 스말야크 (В. Г. Смоляк, 1937-2008))
바라비요프(П. Воробьев, 친일파로 나중에 변절)의 답변
(트리피츤의 질문에 대한) 바라비요프의 답변 :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명백한 신뢰 훼손,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한 부당하고 잔인한 테러, 소비에트 정부와 공산당의 진로를 따르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을 반혁명분자로 판단합니다.
프라예르만의 책에 등장하는 파르티잔의 활약
오늘날 러시아에 남아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니항사건 당시 파르티잔 간부들
니나 레비제바에 대한 심문 요약
그런 다음 니나 레비제바(Н.М. Лебедева)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전체 심문을 다시 재생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녀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꺼리거나 대답을 거부했습니다.
젤레진(Ф.В. Железин)에 대한 바라비요프의 심문 요약
바라비요프(П. Воробьев)는 사할린주 지역 집행위원회 위원장 표도르 젤레진(Железин 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을 심문합니다.
문 : 당신은 어느 정당의 일원입니까?
답 : 볼셰비키.
문 : 자신을 트리피츤의 공범자로 인식합니까?
답 : 전혀 아닙니다.
문 : 왜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시가 불탔습니까? 누가 명령 했습니까 ?
답 : 트리피츤의 개인 명령에 따라.
문 : 중앙에서 이것에 대한 명령이 있었습니까?
답 : 아무런 명령이 없었다.
문 : 부드린(Будрин), 미진(Мизин) 등이 총에 맞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나는 죽은 부드린(Будрин), 미진(Мизин)을 소비에트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들진(Дылдин)과의 합의에 따라 도시에서 대피하는 동안 트리피츤에게 부드린을 석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한 나의 보고서에 대해, 트리피츤은 그를 쏘라는 결의안을 내렸습니다.
오스카 쿠루친니이(Оська Крученный (Трубчанинов))에 대한 심문 요약
오스카 쿠루친니이(Оська Крученный (Трубчанинов))가 심문됩니다.
그는 70대입니다.
1874년부터 그의 삶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사할린 형무소의 감옥과 감옥을 거쳤습니다.
문 : 여성과 어린이 살해에 가담했습니까?
답 : 잘랐다(루비?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러시아어 약어 사용함). 사소프(Сасов), 쿨리코프(Куликов)와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따라.
문 : 잘랐다고 ? (Рубил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러시아어 약어 사용함)
답 : "잘랐다(?). 우리는 그것에 익숙하다."
심문이 끝났습니다.
판결은 낭독되었고
법원의 모든 구성원이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의 파르티잔 군대의 전직 사령관이었던 야코프 트리피츤(Яков Тряпицын)이 다음과 같은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만장일치로 받아들였습니다. (판결의 형태는 유지됨).
<......이하 103인 법원의 트리피츤 판결 요약......>
“1920년 5월 22일부터 6월 2일까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시와 그리고 5월 22일부터 7월 4일까지 사할린 지역 내에서, 다양하게, 부분적으로, 무법적으로 공식적인 행동 없이,
민간인과 그 가족에 대한 불합리한 체포와 처형이 다수 허용되었습니다.
트리피츤이 5월 27일에 부드린(Будрин), 미진(Г. Мизин), 이바녠카(Иваненко) 등과 같은 다수의 활동적인 소비에트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살인과 권력 남용,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투쟁입니다.
같은 기간 동안 트리피츤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시와 사할린 주(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일대의 농촌 지역의 민간인과 그 가족의 대량 파괴를 위해
부하들에게 여러 가지 명령과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명령은 이미 수행되었습니다.
즉 그의 사무실이 가진 권한을 초과하여 살인과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요청했습니다.
살인과 처형 명령
사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은 파르티잔의 일부 동지와 다른 부대에 대해,
충분하지 않고 심지어 이유 없이, 즉 권한을 초과하여, 살해 그리고 처형을 요구하는 여러 명령과 지시를 내렸습니다.
니항사건 당시 일본군의 학살이 없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일본군이 살해한 민간인 수는 최소 수만에서 ~ 수십만까지 추정된다.
니항일대에도 일본거류민, 친일파 등으로 일본군 협력 단체가 구성되어 있었다.
소비에트의 정책에 반대
트리피츤은 붉은 군대 사령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 방향에서 이탈하여, 공무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훼손했습니다.
즉,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Российской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й Федеративной Советской Республики)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지역에서 파르티잔 군대 참모장을 지낸 니나 레비제바(Лебедева(Кияшко)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같은 본부 무장부서 부장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사할린주 지역(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노동위원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Павлуцкий Иван Куприянович (Кирьянович)),
지역 집행위원회 위원장 표도르 젤레진(Железин 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
사할린주 지역 식량위원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
암군-트리스키(Амгуно-Тырски) 전선의 사령관 사소프(Сасов, 한 때 고려인부대장으로 활약)
앞서 언급한 범죄에 공모.
트루프차니나프(Трубчанинов) - 선동으로 자행한 민간인 살해와 고문.
인민 법원은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레비제바(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Лебедева, 1895~1920),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젤레진(Железин),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 사소프(Сасов) 및 트루프차니나프(Трубчанинов)의 위의 범죄에 대해 유죄라고 판결했으며,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는 무죄이지만 트리피츤 정부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것은 유죄라고 판결했다.
양심의 지시에 따라 법원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사할린주 지역(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인구의 약 절반이 사망하고 전체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며,
지역 노동 주민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지속적으로 약화시켰으며,
전 세계의 눈이 소비에트 권력의 정당성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총살형에 처해진) 시민
야코프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니나 레비제바((Лебедева(Кияшко)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1895 ~ 1920. 7. 9. 사망),
하르코프스키(Харьковский Макар Михайлович),
표도르 젤레진(Железин Федор Васильевич),
아쳬빌리-파블루츠키(Оцевилли-Павлуцкий Иван Куприянович (Кирьянович)),
사소프 예핌(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한 때 고려인부대장 역임),
투루프차니나프(Трубчанинов-Кручёный Иосиф Сидорович (Оська Крученый))
는 총살 분대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는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 시와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공공 사업에 배정되어 투옥될 것입니다.”
<......이상 103인 법원의 트리피츤 재판기록 요약 하략......>
이어 군사 본부의 승인을 거쳐 그날 저녁에 처형이 집행될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둘째 날에도 10명이 사형이 선고됨
둘째 날에는 10명이 더 재판을 받았고 이들도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법원은 집단, 친척, 지인들로부터 체포된 파르티잔의 사면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대중을 달래기 위해 법원은 ‘처형’을 집행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처벌 조건은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에 있는 감옥으로 출발하면서 발표되었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죄수들을 께르비에서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압송하기 위해 러시아인 21명, 조선인(고려인) 21명 정도가 동원되었다.
께르비에서 체포된 36명 정도의 이송을 담당했던 조선인들은 니항사건에서 활약한 독립군 사할린부대원으로 구성되었다.
러시아측의 어떤 기록에도 독립유공자 박병길이 니항사건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데 중요한 활약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니항에서 일본영사관 협력단체였던 조선인 민회 회장이 맞다는 기록이 다수이다.
그리고 박병길이 트리피츤을 체포하는 데 활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형된 사람들......)
그러한 결정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니항)의 혁명 재판소 의장 들진 바리스(Дылдин Борис Аркадьевич),
체카(ВЧК, 러시아내전기 볼셰비키측 방첩 경찰) 의장 빌랴예프(Беляев Ефграф),
니콜라예프스크(Николаевск) 체카 단원 및 께르비 지역 체카(ВЧК, 러시아내전기 볼셰비키측 방첩 경찰)의장 비나그라다프(П. Виноградов)
제트-파나마료프(Пономарёв Степан Лукич (Дед Пономарёв)) - 사할린주 지역 집행위원회 식량위원,
전직 부대 사령관들인 파블리쳔카 표도르(Павличенко Федор) 및 스트롈쵸프-쿠르바타프(Стрельцов-Курбатов Сергею)
를 포함하여 60명 이상의 파르티잔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체포된 죄수들을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혹은 자유시로 이송
이 그룹은 즉시 감시 아래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로 보내졌습니다.
1920년 사할린의용대 독립군의 자유시 이동경로
체포된 사람들의 이송을 고려인(조선인) 부대가 담당
체포된 사람들은 조선인(고려인) 부대의 호위를 받았습니다.
(※번역자 의견 :
니항사건과 1920년 7월의 께르비(Керби) 재판 이후 조선인 부대를 장악한 사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박일리야’다.
이르쿠츠크파의 엉터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참고:(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과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남한의 반공 도서가 아닌 한,
러시아측 모든 기록에서, 과거 독립군 기록과 일치되게 박일리야를 ‘사할린부대의 실력자’로 기록하였다.
께르비(Керби)에서 트리피츤이 1920. 7. 4. 일경 친일파 주도로 조직된 반란군의 공격에 체포되어, 며칠 만에 처형된 후에도 박일리야는 조선인 부대의 실권자였다.
광복군을 했던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이미 1910년 이전에 이동휘 등이 세운 학교를 다닌 바 있어, 그 독립정신만은 확고한 분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와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니항사건 이전부터 사할린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할린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의 신문 '국민성'은 니항일대의 독립운동 조직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니항사건에 대한 허위주장이 상당히 많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참고:(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냉전시대 반공학자가 사실이라고 인용한 이르쿠츠크파의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박병길이 380명의 사할린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니항 주민 수천명이 살해되었다'는 등 일본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이 상당하다.)
비나그라다프(П. Виноградов)가 말했듯이,
그들은 바치예프(Бачеев)의 무장 부대가 타이가 숲에서 그들을 살해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감시병과 함께 탈출한 트리피츤의 생존 동료들
가렐레(Горелое)의 겨울 주거지에서,
그들은 호위 겸 감시 팀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과 함께, 다른 경로를 통해 아무르 주 지역에 도착하여 보이카-파블라프(Д. Бойко-Павлов)의 파르티잔에 합류했습니다.
1920년 7월 10일~11일 연해주 공산주의자 회의
1920년 7월 10일에서 ~ 11일 사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러시아 공산당(РКП (б)) 연해주 회의(Примор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에서 아무르 강 하류 지역의 사건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회의의 결의안은
트리피츤과 공범들이,
소비에트 정부를 대신하여 행동하면서,
그들의 아나키적인(무질서한) 행동들은 노동 인민들의 신뢰를 훼손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것을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행동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반항하는 선동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여성, 어린이, 공공 및 사회주의 정당의 사람들, 러시아 공산당 당원(РКП(б))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단지, 하나의 장소 혹은 다른 곳들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우리 조직의 영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공식적인 추정은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번역자의 의견 : 오늘날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중 최호림(崔虎林, 1896~1960, Цой Хорим), 이지택(李智澤), 김낙현(김이노껜지), 최고려(崔高麗, Цой Ко Рё, Цой Ко Ре, 1893~1962), 유익정, 김하석(金河錫, Ким Ха Сек)의 견해가 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과거 1920년 니항사건 무렵부터 5년 이상 계속되었던 소련과 일본과의 평화 교섭과 소련 영토내 독립군 처리에 관한 교섭에 대하여 일제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당도 일본 제국주의와 내통하는 점이 있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일리야의 사할린의용대의 상당수는 레닌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소련과 일본의 1925년 국교 수립이후 러시아 영역인 시베리아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이 약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25년 일본과 소련의 국교 수립
첫댓글 레닌이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박일리야의 사할린의용대의 상당수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1920년대 초반 세계 지도자 중에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중 하나가....
소련 공산당의 '레닌'으로 알려졌습니다.
레닌은 세계 역사에도 영향을 많이 준 인물입니다.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