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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춘하추동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대청공원
前 TBC-TV PD 이정웅씨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 바쁘시더라도 아래 글 한번 읽어보세요.
前 TBC-TV PD 이정웅씨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전문입니다. 끝까지 한번 읽어 주세요 대통령님의 국사에 분주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6.25 30주년 특집으로 참전국들을 취재하여 60분짜리 프로그램을 3회 연속으로 방송했던 은퇴한 PD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절이었는데도 미국.카나다.호주.뉴질랜드 등,내가 취재한 참전국들은 6.25가 마치 자기 나라의 전쟁이었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치열했던 전투와 전우들의 장렬한 죽음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엄숙하게 추모하며 기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인양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참전부대와 참전용사들이 살고있는 지방으로 취재차 이동할 때 마다 그 지역의 신문과 방송이 우리를 역으로 취재해 갔습니다. 우리는 취재당한 우리 취재팀 모습을 봤습니다. 커다란 제목이 붙은 지역 톱 뉴스를......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를 때까지 한국은 이 나라들로부터 원조만 받고 거래만 해왔지 단 한번도 이들 참전국들에게 우리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건의드립니다. (지원국까지 합하면 22개국?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의 대사관 영사관이 주축이 되어 전체 한국의 기업들과 상사의 주재원.교민과 유학생 관광객들까지 한데 모아 몇몇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당시의 참전 부대장들을 초빙하여 함께 그 나라의 국군묘지나 한국참전기념비를 참배하며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며 싸워준 그 은혜에 엄숙히 감사를 그 가족들에게 즐겁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당신들 덕분에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것을 소개하고 푸짐한 선물을 안겨드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매년 계속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성대한 환영식을 갖고 마는 것보다 (물론 금년에는 그것도 병행해야 하겠지만) 한국에 대한 감동이 훨씬 더 잔잔하게, 한국을 편들고 응원하는 한국 팬들과 한국 문화와 한국 상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매년 성대한 의식과 잔치를 21개국에서 베푸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이 감동들이 쌓여서 신뢰를 이룩하게 된다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과 국가나 다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 집의 애경사에 참여한다면 어떨까요? 자기 나라를 선전할 이벤트 꺼리가 없어서 혈안인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허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2002 월드컵 때 관중석 머리위로 파도처럼 춤추며 올라가던 대형 터키국기를 본 터키 국민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감동, 동행하여 이끌어 낸 감동을 생각해 보면 그 효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6. 25 기념물들이 전국 각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각종 승전비.전적 비.순국 전몰 비.참전기념비 등등... 잊지 말자고 세워놓고 우리는 깡그리 다 잊고 말았습니다. 효과적으로 기념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이죠. 참전 16(또는 21)개국의 대사와그 가족들, UN 멤버들, 초청된 각국의 군인 대표들, 각 나라의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외국 관광객들을 모시고 부산시 아니 대한민국이 떠들썩하고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대하고 엄숙한 감사의 추모식을 거행하고 밤에는 부산 영화제 못지 않는 성대한 조명, 불꽃 위령제와 감사의 파티.거창한 규모의 공연을 하여 한국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 최고속으로 이룩했다는 조그만 경제발전에 취하여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별 못하고, 우리 국민들의 정신과 도덕적 판단력 역시 세계 최고속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으니까요. 효순이 미순이라는 두 소녀의 훈련 중 사망사고 때문에 몇 달간의 반미 촛불 데모를 벌였을 때 얼마나 억울했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으면 4성 장군인 당시의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의 반미 촛불 데모에 대한 본국 의회청문회 직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우리 국민에게 방송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묵살 당했습니다.) 그 후 정권이 바뀌고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반미 촛불시위를 몇 개월 동안 벌이는 한국을 보면서 미국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저렇게 은혜를 모르고,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과 한 동포이고 한 국민이기가 싫어지기까지 하더군요. 그 때 이민가려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전국 각지의 6.25 관련 기념비와 전적비에는 기념해야할 날짜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 기념비가 세워져있는 지역의 지방 자치단체와 그 지역의 각 사회단체,기업,학교,주민들이 주최하게 해야 합니다. 참전국의 기념비일 경우, 앞의 두 제언에서처럼 해당국 주한외교관들과 해당 참전부대장과 의장대,생존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 그 나라와 그 부대,그 용사들,그리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감동적인 뒤풀이 행사와 공연,파티와 선물이 이어져야 하겠지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일부 못된 한국인들에게서 당한 절치부심의 원한을 조금쯤 녹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쪽을 위해 더욱 더 좋을 것 같고요.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장대와 군악대를 초청하여 옛날의 전승 기념지에서 생존해 있는 역전의 용사들과 그 지역에 사는 그 부대 출신 예비역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이 어울리는 한바탕 기념행사와 지역잔치를 베푼다면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자기 지역에 대한 애향심과 선열,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질 것입니다. 매년,꾸준히,그리고 신나고 성대하게 베풀어진다면 6.25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우리나라 현대사 현장학습도 시킬 수도 있겠고, 자기나라 군대를 군바리라고 부르는 못된 풍조도 조금씩 고쳐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 각 나라의 정부와 외교관들이 제 나라를 선전할 명분있는 이벤트꺼리를 못찾아 애태우는 것처럼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흔히들 브랜드를 띄우려면 스토리를 만들어라 하고 이야기 하죠. 그렇기 때문에 더 6.25의 보은 기념 이벤트는 세계적으로도 지방적으로도 너무도 훌륭한 스토리깜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60주년이 되는 금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혼자 행복해 하겠습니다.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통령님의 건투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작전 중에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접 달아주시려고 짚 차로 달려오시다가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전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 전 맥아더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님의 대장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중장으로 전사, 사후 대장으로 추서)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달리 멋진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워커 미 육군 예비역 대장은 알링턴 미 국립묘지의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30년 전, TBC-TV 6.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월튼 워커 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저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중대장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각하는 잘 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중대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는 의전 부대에 맡기십시오. 각하의 휘하에는 반드시 의전 부대가 있습니다. 그 때 이미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맥아더 사령관이 뒤돌아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 했습니다. 저는 이미 워싱턴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 이기기가 싫었겠죠. 그러나 결코 그 결정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군인이 부하를 위험한 전장에 남겨놓고, 치열하게 전쟁 중인 한국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초대 주한 미8군사령관이었던 고 월튼 워커대장과 함께 최초의 미군 父子大將(4 star)이며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 이었다.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워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를 했고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얼마 전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짚 차와 부딪친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1951년 미 8군 사령관을 죽게 한 한국 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아직도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대전을 사수하라는 워커 8군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적을 보병만으로 막아야 했던 불리한 전황 속에서 어떻게든지 대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소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적의 T-34 탱크 한 대를 직접 폭파시키면서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던 미 24사단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이 부대와 떨어져 홀로 36일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잡혀 3년동안의 포로생활을 하였다는 사실, 포로생활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국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뜨려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미군 장성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지만 나무 훈장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도 어느 하사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부끄러워하며 은둔했던 그가 단돈 5 달러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으로서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마치게 한 그 농부가 5년형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형해 줄 것을 한국정부에 간청하여 기어코 출옥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통역을 했던 민간인 이규현이 탈출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규현씨는 후에 중앙일보사장과 문공부장관을 역임했다) 그 나라 민간인의 밀고로 전투 중에 포로가 되고 군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국민과 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지극히 의심스럽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뒤 벤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으므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장군의 증언이다.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치고는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미 2사단 72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이라는 책에서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 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자기 자식들마저 참전시켜 전사를 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끔찍히도 자식들을 사랑하여 거대한 재산을 물려주려고 어떻게든 자식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고 갖은 수를 다 쓰는 벼슬 꽤나 하고 돈 꽤나 있다는 고위층 사람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온갖 꾀를 다 쓰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인기를 누리고 두 명의 소녀가 작전 훈련 중에 사고로 죽었다고 미국 물러가라며 몇 달 동안 촛불 시위로 온 나라를 소란케 하는 국민을 가진 한국 ! 우리는 지금 애국하고 있는가?
이 6.25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60만 우리 국군은 부를 줄 아는가? 부모도 선생님도 군대도 대통령도 다 잊어버렸는데 누가 가르쳤겠는가. 남한 빨갱이 괴수 두 놈은 이미 죽었지만 북한 김정일놈 목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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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동감합니다.
미군들 개인은 순수한 목적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미국 정부를 기준으로 봤을 때, 꼭 세계 평화 수호 뭐 요런 순수한 목적만 가졌던 건 아니거든요.
자기네 이익 안 나는 전쟁에 참여할 이유가 없죠.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로서는 당시 파병이 상당히 고마운 일이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