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문예 11월호 연재 장해익
신혼등반
나는 겨울이 끝나지 않는 3월 초에 결혼을 했다. 음력으로는 1월이었으니까 아직 봄은 한참 저 멀리 머물고 있을 때였다. 결혼 날짜를 받고 보니 그 다음은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나 제주여행 등 패키지의 여행이 없었던 그 시절, 다른 신혼부부와 어울려 평범한 신혼여행을 하기가 싫었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보다 뜻있는 통과 의례로 치루고 싶었던 욕심으로 결정한 것이 신혼등반이었다.
나는 평소 산에 관한 철학이 있었다. 산은 내 삶의 안식처요,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산은 찾을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 또한 오르면 오른 만큼 뭔가 보여주었고, 땀을 흘린 만큼 힘을 얻게 해주었다. 산은 계절에 따라 말없이 변하며 완벽에 가까운 정중동의 변신을 보여주었고, 봄의 환회와 여름의 왕성한 젊음과 열정을 가르쳐주었다. 가을이 오면 단풍 잎 갈아입고 유비무환의 겨울 준비를 서둘렀고, 동지섣달 눈서리 맞으며 새봄을 기다리는 그 끈기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의 산에서 삶의 진리를 배운 것이다.
산은 가식이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며 말 많은 인간사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오직 초연한 자세로 바라 볼 뿐 속내를 끝내 보이지 않는다. 천금같은 그 침묵 속에서 바다 같은 겸손을 언제나 내게 가르쳐 주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고, 언덕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삶의 진리를 일깨워 주기도 했다. 산행에 맞는 준비심도 가르쳤고, 목표를 향해 실패 없이 닦아 가는 우보(牛步)의 법칙도 가르쳐주었다. 그 뿐이 아니다. 산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안식처로 제공해 주기도 한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이 여가를 이용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산은 내가 실의에 빠졌을 때 오뚝이 같은 칠전팔기 용기와 불굴의 의지도 가르쳐주었다.
거기다가 산은 아내와의 만남을 주선 해 준 곳이기도 하다. 아내를 만나 이산 저산을 옮겨 다니며 젊음을 불태워 무수한 추억을 쌓곤 했다. 그 옛날 인왕산 북악산은 오늘날 남산과 같이 산책하며 데이트하기에도 좋은 산이었다. 지금도 산봉우리와 계곡에 맺힌 그 숫한 추억들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더구나 서울 근교는 아내와 함께 안 오른 산이 없다.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관악산, 청계산 등등 이렇게 많은 골짝 골짝에는 젊음을 불태웠던 추억이 새겨져 있다.
보현봉이나 원효봉에 올라 한잔 술에 얼큰한 기분으로 저 멀리 계곡 넘어 백운대 인수봉을 바라보는 산사람의 마음을 어쩌면 윤고산이 그리도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하노라.”
아무도 없는 숲속 단 둘이 앉으면 벌들이 날아와 시샘도 하고 비, 구름이 몰아쳐 심술을 부리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소나기 만나 흠뻑 젖은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던 산행 길이었다.
그래서 신혼여행도 산행등반으로 잡고 싶은 것이 내 바램이었다.
우리는 산에서 만나 산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산으로 하여금 무수한 삶의 진리를 터득해 왔으니 신혼여행을 산행등반으로 하는 게 어떨까? 하고 평소의 내 뜻을 밝혔다. 일가친척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반대를 했다. 그러나 아내만은 나의 속셈을 이해하고 산행에 동의해 주었다. 그래서 신혼여행을 속리산 등반으로 결정했다. 결혼식이 끝나 막상 버스로 보은 속리산에 도착하니 잔뜩 흐린 날씨는 끝내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민박집을 찾아 짐을 풀고 나란히 누우니 첫날밤을 축복이나 하듯 눈은 끝없이 내려 퍼부었다. 일기예보에서도 폭설경보가 내려진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에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신혼산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조그마한 보조배낭을 꾸려 메고 길거리로 나왔다. 사방은 눈보라 속 어두움에 잠겨 있었고 가로등만이 졸고 있었다. 눈은 이미 발목을 덮고 있었고, 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뿐이었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날에 산행을 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안다.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계획한 산행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잠시 망설여졌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길에 닥쳐올 무수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산행을 강행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리 길을 더듬어가는 데 법주사 부근에서 열 서넛살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나타나 같이 가겠다고 나선다. 잠시 주저되기도 했지만 소년이 그곳 출신이라는 점과 그 표정이 너무 순진하여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모든 산길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무지팡이 하나 줏어 들고 이곳저곳을 짚고 더듬으며 복청암에 이르니 암자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아래로 깔리고 있었다. 신발과 옷이 젖어 있었으나 생긋이 미소 띄며 처다 봐주는 새 신부가 고맙기만 했다. 산등성이로 힘들어 올라서니 여기저기에서 눈 무게를 못이긴 소나무 가지 꺾이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이에 놀란 까마귀가 까욱까욱 푸념을 하며 계곡 밑으로 날아간다. 미끄러지며 넘어지면서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산 정상에 다달았다. 녹쓴 철제 사다리를 타고 문장대에 오르니 하늘도 신혼등반을 축하하며 지척을 분간할 수없는 폭설이 휘몰아쳤다. 이렇게 많이 내리는 폭설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시계는 눈보라에 가려 어둡기만 했고 사방은 내리는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부의 젖은 옷 위로 내려 덥히는 눈을 털어주면서 얼은 두 손을 잡아 무언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따라온 소년이 쑥스러운지 외면해 주는 게 기특했다. 그리고는 엉금엉금 기어 바위 밑에 있는 초가집에 들어서니 50대 중반의 부인이“이런 날에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놀라 혀를 내 두른다.
“신혼여행 차 이렇게 올라왔다”하니 온갖 군것질을 다 내 놓으며 진심으로 환영해 준다. 초가지붕 처마에 길게 드리워진 고드름마저 신혼등반을 축하하는 듯했다. 늦으막하게 된장찌개를 끓여 산채 점심을 대접받고는 잠시 뜨끈한 온돌방에서 몸을 녹이며 휴식을 취한 후 하산 길에 들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하늘 문이 활짝 열렸다.
눈부신 대자연은 분명 우리 신혼부부에게 축복을 해주었으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로 여겨졌다. 속리산의 설경을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천하일품의 산수화였다. 산이 좋아 산으로 간 우리 부부의 신혼등반은 잊을 수 없는 대자연의 장광을 선물 받으며 환회의 축복 속에서 이렇게 끝났다. 지금도 순간순간 미끄러지며 넘어지던 속리산의 그 설경은 영원히 내 가슴 속에 추억으로 새겨져 있다.
장해익 ❚ 일본에서 출생. 남가주대 행정대학원. UCLA 경영대학원ㆍ서울대 행정대학원ㆍ고려대ㆍ경희대대학원ㆍ국방대학ㆍ경북대학에서 수학.
허균문학상 수상
현) 한국신문예문학회 회장. 호서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