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 때문에 왕사성을 휩쓴 붓다에게 있어서 사위성은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중요한 포교거점이었다. 바로 이 무렵 사위성에서 급고독 장자가 왕사성으로 오게 된다. 붓다의 뜻이 급고독 장자에 의해서 구현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또다시 이렇게 우연처럼 시작되는 것이다.
급고독(給孤獨), 고독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존칭
당시 전 인도의 최대 부자는 사위성의 급고독 장자였다. 장자(長者)라는 칭호는 불교경전에 많이 보이는데, 대상무역으로 많은 자산을 확보한 요즘으로 치면 재벌을 의미한다. 장자 말고 남자신도에 대한 칭호 중 유마 거사에서와 같은 거사(居士)라는 것도 있는데, 이 말은 목축이나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부유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즉, 상업자본가에 대한 표현이 장자이며, 목축이나 농업 자산가는 거사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오면 양자는 혼용되어 차이는 사라진다.
붓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많았다는 것은, 붓다가 유연한 사고와 개방적 가치관을 가지고 당시의 새로운 변화를 리드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붓다에게는 시대를 읽는 눈이 있었고, 최첨단의 경제인식을 가진 재벌들은 붓다를 멘토로 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급고독 장자의 이름은 수닷타이다. 급고독(給孤獨)이라는 것은 그가 고독, 즉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별명과 같은 존칭이다.
고독한 사람은 두 부류이다. 첫째는 고독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다. 고아나 과부, 노인과 같은 이들로 물질적인 공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행자로 사유를 통해 정신적인 고독을 관조한다. 물론 이들에게도 물질적인 공급이 필요하다.
급고독 장자는 많은 자산을 바탕으로 이들을 외호하고 보살폈다. 그래서 급고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美稱]를 얻게 된 것이다. 급고독 장자야말로 단순히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분이었다고 하겠다.
급고독 장자와 같은 경우는 요즘으로 치면 다국적 기업을 거느린 거대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위성에 총본부를 두고 있지만, 왕사성에도 지부를 두는 것은 당연하다. 그 지부의 관리자는 호미護彌라는 이름의 손위 처남이었다. 전후 상황으로 유추해보면, 호미가 처음부터 급고독 장자의 처남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왕사성으로 무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결혼관계를 통한 결속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들끼리의 정략결혼과 같은 상황이라고 하겠다. 특히 당시에는 여러 부인을 둘 수 있었으니,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가진 자들이 결속을 강화하고 서로의 이익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급고독 장자는 주기적으로 사업과 관련해서 왕사성을 방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럴 경우 호미의 환대는 극진했다. 친척이라고 다 같은 친척이 아니다.
어떤 친척은 그 사람과 친척이라는 자체마저도 영광인 경우도 있고, 어떤 친척은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다른 약속을 잡아서라도 피하고 싶은 친척도 있다. 그러나 제1재벌 친척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런데 급고독 장자가 갔음에도 불구하고, 호미 장자는 다른 일들을 지시하느라 바빠 환대가 예전만 못했다. 급고독 장자가 일찍이 받아보지 못한 소홀함에 화를 내자, 호미 장자는 사과하면서 내일 붓다와 스님들을 모셔서 공양하기로 해 준비가 바빠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급고독 장자는 그 말을 듣고 붓다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물었고, 호미 장자는 왕사성에서의 붓다의 활약과 가르침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급고독 장자여, 이리로 오라"
급고독 장자는 거대한 사업을 경영하는 매우 영민한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붓다에 대해서 조금밖에 듣지 못했지만 붓다가 대단한 인물임을 직감한다. 마치 바닷물을 조금만 맛보아도 모든 바다가 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래서 호미 장자에게 붓다와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호미는 내일 오시기로 되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간절함은 기다림과 같은 여유 속에는 깃들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주체적인 간절함이며, 이는 그 결과로 새로움의 가치를 파생하게 된다.
급고독 장자는 새벽에 잠을 깼다. 붓다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바른 가르침에 대한 절실함이 잠을 떨쳐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깬 급고독 장자는 새벽을 거닐다, 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게 된다.
그것은 진리로 인도하는 빛, 즉 붓다의 후광이었다. 급고독 장자와 붓다의 만남에는 극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제1 재벌이지만 스스로 교만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진리를 찾아 잠을 떨치고 나서는 주체적 노력. 그 결실로 그는 시끄러움을 이긴 고요의 붓다를 보게 된다. 급고독 장자에게 스승은 그렇게 다가온 것이다.
당시 붓다는 시타림에 계셨다. 인도 말 시타(Śita)는 ‘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시타림은 한림(寒林), 즉 ‘찬 숲’으로 번역된다. 이 숲은 왕사성 북쪽에 위치 하는데, 숲이 우거져 찬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사람들이 시체를 많이 유기해서 으스스한 기운이 겹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시타에 대한 음사로 시타(尸陀)가 주로 사용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시다(尸多)로 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시타림은 ‘시체가 많은 숲’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가 오늘날까지도 불교적으로 사용되면서 스님들이 상가집에 가서 염불하는 것을 ‘시달림’이라고 한다. 참으로 절묘한 음사이다. 이러한 음사를 음의겸역(音意兼譯)이라고 하는데, 한자와 같은 뜻글자만 가능하다. 오늘날 코카콜라를 커코우커러(가구가락-可口可樂)로 음사하여, ‘맛있고 즐겁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도록 한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시타림이야말로 가장 오랜 생명력을 가지는 음의겸역의 최고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타림에 이르렀을 때, 급고독 장자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던 듯하다. 아무래도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두려움도 많은 법이다. 그때 저 멀리에서 "급고독 장자여, 이리로 오라."는 붓다의 인도 말씀이 들렸다. 그러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온화한 밝음이 고였다고 한다.
사위성으로의 초청과 사리불과의 인연
급고독 장자는 붓다를 뵙고 가르침을 듣자, 곧 진리의 눈이 청정해지는 수다원을 증득한다. 급고독이라는 미칭이 붙을 정도의 선근과 그쳐서 기다리지 않고 찾아나서는 주체적인 문제해결의 의지가 붓다를 만나 그의 영혼을 각성시켰던 것이다.
급고독 장자는 붓다를 자신의 활동무대인 사위성으로 초청한다. 여기에는 붓다를 가까이 모시고 싶은 애틋함과 더불어 자신의 재력을 드러내 보이려는 자랑의 마음도 공존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초청을 단번에 수락하지 않는다.
붓다에게도 사위성은 전 인도로 가르침을 펼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곳이었다. 그럼에도 붓다는 거듭되는 급고독 장자의 요청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사위성은 동쪽에 위치하여 개방적이었던 왕사성에 비해, 아리안의 문화가 강하게 남은 보수적인 곳이었다. 즉,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하기에 쉽지 않은 면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붓다가 사위성에서 기적을 일으켜 외도들을 굴복시키는 천불화현(千佛化現)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단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사위성에 처음부터 든든한 포교거점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급고독 장자의 영민함은 결국 이를 눈치 채고, 붓다께 사찰을 지으면 낙성식에 참석해 주실 것을 요청하게 된다.
급고독 장자가 사위성으로 돌아가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기로 했지만, 문제는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당시는 불교가 생긴 지 얼마지나지 않은 때라, 사찰건축과 같은 개념이 채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를 감독해 줄 스님을 요청했다. 붓다께서는 사리불과 함께 가도록 지시하신다. 급고독 장자와 사리불의 깊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사리불을 만난 급고독 장자는 사리불에게 “스님께서는 제가 출발한 뒤 하루 있다가 출발하시지요.”라는 다소 황당한 요청을 한다. 사리불은 영문을 잘 몰랐지만 일단 수락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급고독 장자가 하루 먼저 가면서 가는 곳마다 임시숙소를 만들기 위한 배려였다. 마치 황제가 순행할 때 먼저 신하가 앞서 가면서 머물 수 있는 임시행궁을 만들고 황제가 그곳에 도착해서 쉬듯이, 급고독 장자는 사리불을 위해 스스로 길잡이를 자처한 것이었다. 급고독 장자의 이러한 존경심은 복이 어떤 사람에게 깃드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물이 낮은 곳으로 고이듯, 복 역시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에게 모이는 것이다.
출처 : <월간 불광의 자현 스님 글>
첫댓글 급고독장자인 수닷다 장자의 이야기가 <경전이야기>방에 올려져 있어 이 글을 함께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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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수닷다 장자의 신심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