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은
개화기의 인물이자 마지막 영의정으로 비운의 삶을 마감한 인물이다.
이러한 분의 선정비는 남아 있을까 하여 찾아보니 포천과 수원, 용인에 남아 있다.
그리고 전남에 하나 남아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마멸이 되었다.
포천에 있는 김홍집의 비명은 굉집으로 되어 있다.
언제 개명이 되었는지 찾아야 하지만 기록이 보이지 않는지 찾지 못하였다.
개명은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기록이 있는줄 알지만
필자가 찾지 못 하였다.
포천 영중에 있는 김굉집 선정비
김홍집 -1842년 --1896년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그의 유고집으로 《김총리유고》가 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바 있는 온건개화파이며, 1894년에는 총리대신으로서 갑오개혁,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단발령 등으로 분노한 민중에 의해 아관파천 직후 살해당했다. 말년이 비참한 말로 이었다.
.그러나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갑오개혁 이후 최초의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 되었다.
수원박물관에 앞에는 많은 선정비들이 있는데 그 중에 김홍집의 비가 있다.
고종 26년 기축(1889) 3월 25일(경오) 맑음
26-03-25[08] 수원 유수 김홍집에 대해 하비하기 위해 정관을 패초할 것을 청하는 김직현의 게
○ 김직현이 아뢰기를,
“수원 유수 김홍집(金弘集)을 하비해야 하니,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수원의 선정비는 팔달문과 장안문 밖에 세웠는데 6.25전쟁을 겪으면서 노송지대 옮겨 놓았다.
이후에 수원 박물관에 개관하면서 수원부 관련비는 박물관으로 이전 되었다.
그러나 수원 화성박물관에 유수의 비가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수원 박물관 입구에 있다.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 문과에 급제한 다음, 이듬해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되었다. 몇달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이어 187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약 5년간 거상(居喪)하였다.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고,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다. 1875년 부사과(副司果) · 훈련도감 · 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興陽)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그 결과 내직으로 승진, 1877년 사과(司果), 1878년 남학교수(南學敎授), 이어 호조 · 공조 · 병조 · 예조 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879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1880년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 주차(公使駐箚)와 해관(海關) 세칙(稅則)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비록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는 실패하였으나 황쭌셴[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개화 정책을 채택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뒤 예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민족대백과사전
김홍집이 경기 감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 용인에 선정비가 있다,.
선정대한 명문이 있다.
위정이인 爲政以仁 병심지공 秉心至公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 비는 전라도에 있는 멀리 있지만 처음에 확인 이 안되어 3번이나 찾아가서 확인 하였다.
대부분 있는지도 모른다.
1842년(헌종 8)에 태어나 1896년(고종 33)에 사망했다. 1867년 벼슬을 시작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인천 개항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때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항기 개화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항기에 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고, 온건개화파로서 갑오개혁 등 개화정책을 적극 펼쳤다 ---- 한민족대백과 사전
한 사람의 일생을 비 하나로 평가를 할 수 없지만, 남아 있으면 좋은 것이다.
사람의 일생이 태어남과 죽음이 이지만,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문집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이고 조선왕조 실록이나 다른 기록도 있지만 비석 은 인물의 벼슬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때 도있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 선정비에 보이는 경우가 가끔이 보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조선말의 개화파인 김홍집의 선정비는 대부분 경기 지역에 있으며, 필자가 가기도 어렵다.
이 번에 김홍집의 비를 정리 하면서 개화파 인물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다시 하여 본다.
옥산 이희득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