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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기본틀-'고대 그리스 철학'
1.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만물의 원리와 원인을 추구했던 최초의 철학자들이 탄생한 곳은 이오니아 식민지의 밀레토스이다. 식민지에 나온 사람들은 타향살이에서 전통적인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 닦은 생활지반에서 오는 여유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해 활기 있는 질문을 하였다. 만물이 그것으로 이루어지고 최초로 그것에서 생성되고, 또 마침내 그것에서 소멸되는 것, 실체는 변하지 않고 모습만 변하는 것, 그런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였다. 이오니아학파에 속했던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는 각각 그것을 ‘물’ ‘무한한 것’ ‘공기’라고 하였다. 이들의 탐구방식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이었다. 한편,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남이탈리아로 이민한 사상가들이 있다. 사모스섬에서 크로토네에 갔던 피타고라스와 콜로폰에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로 갔던 크세노파네스가 바로 그런 사상가들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희구하는 남이탈리아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들은 이오니아 사람들의 경험적 태도와는 달리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하면서도 철학하는 목적을 영혼의 정화에 두고 종교 교단을 창설하였으며,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 대중이 신봉하는 의인적인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전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격적인 유일신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철학적 유산에 의해, 그리스철학에서 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과 정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 2개의 세계로 구분된다. 엘레아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정신의 활동이 감각의 활동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여 플라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재는 부동·불변의 ‘있음’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았다. 한편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 데서 초기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사물의 혼합과 분리라는 방향으로 추구하여 다원론(多元論)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의 ‘4개의 뿌리’, 아낙사고라스의 ‘씨앗’,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原子)’가 나온다. 여기에도 이탈리아와 이오니아의 흐름의 특질이 있어,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정열로써 혼의 정화를 외쳤고, 아낙사고라스는 클라조메나이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아 태양은 신이 아니고 불붙은 돌덩이라고 외쳐 화를 입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아브데라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따라 기하학적으로 분할할 수 있으나, 물질적으로 더 분할할 수 없는 원자를 말하였다
2.소크라테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e)’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開示)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生)과 사(死)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3.플라톤
-플라톤은 아테네 귀족 출신이면서도 정치 생활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에 심취하였었는데,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에 충격을 받아 잠시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으나 아테네에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란 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교육과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의 <대화편>중 후기의 <국가편>은 특히 철학적 모순을 배재하고 일정한 원리들의 진리를 확립하려 하고 있다.
그의 철학 표현 방식은 매우 특이해서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체계적인 논문 형식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화편>을 저술하여 소크라테스의 방법이나 목표에 대한 하나의 성찰로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카데미아에서 보다 철저하게 시행한 교육의 범례로서 이용하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만의 독창적 사상이 표출되었다. 플라톤은 인간의 내면세계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자연과 우주의 문제까지 포섭하여 자연 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며, 윤리설에 있어서는 '사회윤리'를 강조하여 '개인윤리'를 강조하던 소크라테스와 대조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학풍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는 시민과의 대화나 토론등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한 반면,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그 안에서 대중과 격리된 전문적 연구에 종사하였다.
플라톤이 사물의 본질을 밝히기 위하여 사용한 개념이 「이데아」(Idea)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단순한 이름이나 또는 머리 속에 있는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재라는 점이다. 즉 「이데아」는 영원한 객관적 실재로서 현실세계를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 오히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들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 또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거짓된 존재로 보고 초현실적 또는 개념적인 존재를 참된 존재로 보는 점에서 상식을 뒤집은 주장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동굴의 비유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지식은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이성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은 동굴의 비유에서처럼 현실세계의 불완전한 모형을 통하여 잊어버렸던 그 원형을 상기한 것에 불과하다. 지식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요약하면, 먼저 지식은 이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이성적 지식, 변화와 운동을 떠나서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여 얻어지는 개념적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 그런데 참된지식은 밖에서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변을 통하여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플라톤의 지식론이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계발적 교육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것임을 착상하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의 교육 이론은 그대로 윤리설에도 이어져, 이성을 중시하고 신분제를 정당화하며 민주주의를 반대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에게 있는 악의 가능성은 육체적인 욕정이 무절제하여지는 데에 있다. 이성이 기력의 도움을 얻어 욕정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면, 선의 실현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에 있어서 덕이란 이러한 인격의 3요소들이 잘 조화되고 각기 제 몫을 다할 때 발현되는 것이다. 즉 이성은 지혜의 덕을, 기력은 용기의 덕을, 그리고 욕정은 절제의 덕을 지녀야 한다. 이와 같은 조화가 원숙하게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은 종합적으로 '정의'의 덕을 갖춘, 의로운 사람이 된다.
이러한 플라톤의 윤리설을 국가에 적용하면 그의 이상국가란 이성·기력·욕정 등 인격적 요소들이 조화있게 발달한 개인을 확대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의 이성(지혜)은 국가의 통치자에, 기력(용기)은 무사에, 그리고 욕정(절제)은 생산자에 각각 해당되며 이 세 계급이 제 몫을 다하며 조화를 이룰 때 그 국가는 사회정의를 실현한 이상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은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들고 있는데 이는 철인정치(哲人政治)가 실현될 때 이상 국가의 목적을 원만하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4.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트라키아의 복동 해변에 있는 스타게이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전의(典醫)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아스클레피오스의 가문들은 의학 및 해부의 기술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과학 일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에 등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 곳에서 20년을 보내며, 아카데미아의 예지(銳智)라는 평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비록 그가 결국에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뛰쳐나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이론을 수립했지만 그는 플라톤의 사상과 인품에서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아카데미아에 체류하는 동안 플라톤의 방식대로 많은 대화편들을 저술했으며, 그의 동료들은 그 대화편들의 우아한 문체를 '황금의 강'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는 플라톤의 핵심 이론인 이데아론을 당시에는 긍정했었지만, 얼마 뒤 그 이론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철학자가 될 운명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플라톤의 사상과 언제 결별하게 되었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그 시기조차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주지하듯이 플라톤 자신의 사상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에 있는 동안 변화의 과정 속에 있었다. 플라톤이 말년에 수학과 방법론과 자연 과학에로 관심을 옮겨갔다는 사실을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년의 플라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곤 하지만, 그것을 현재의 정보만으로 재구성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시기에 의학, 인류학, 고고학과 같은 다양한 전문가들이 아카데미아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많은 양의 경험적 사실들을 접하게 될 기회를 제공했음과 아울러 그 자신의 기질 때문에 그러한 지식으로부터 탐구의 필요성을 발견했고, 또 그 지식들이 과학적 개념의 형성을 위해 유용함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후기의 관심들과 특수한 분야에서 수립된 자료들의 유용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의 과학적 기질과 부합되는 철학의 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했던 방향은 결국 누가 좀더 신중하게 현상을 해석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했던 방향은 최종적으로 그를 플라톤의 지평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카데미아에 함께 있었을 때조차도 기질상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수학에 더 적은 열성을 보였고, 경험적인 자료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자연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들에 보다 확고히 고착되어 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 방식이 이 생동하는 자연 속에 뿌리 박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반면에 플라톤은 사유의 세계를 변화하는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시키면서 이데아들에게 참된 실재(實在)를 부과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사상은 초시간적 존재의 정적(靜的)인 영역에 보다 밀착되어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철학을 생성과 변화의 세계, 즉 동적(動的)인 영역에 지향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의 차이가 무엇이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아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명백한 플라톤주의적인 시기는 플라톤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아카데미아의 경영은 플라톤의 조카인 시퓨시포스의 수중으로 넘어 갔고, 수학에 대한 그의 과도한 강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맞지 않아 그는 아카데미아와 아테네를 떠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를 떠나 헤르메이아스 왕의 초빙으로 트로이 근처에 있는 아소스(Assos)에 간 것은 기원전 348-47년이었다. 헤르메이아스는 이전에 아카데미아의 학생이었으며, 당시 아소스의 지배자였다. 얼마간 철인 군주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그의 궁정 안에 소규모의 사상가 집단을 형성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곳에서 3년 동안 저술하고 가르치고 탐구활동을 할 수 있었다. 궁정에 기거하는 동안 헤르메이아스의 질녀이자 양녀인 피티아스(Phythias)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아테네에 가 있는 동안 피티아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그는 얼마 후 헤르필리스(Herphyllis)와 결합하였다. 그것은 합법적이지는 않았지만 행복하고 지속적이며 애정어린 결합이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니코마코스(Nicomachos)였다. 아소스에서 3년을 보낸 후, 그는 인접해 있던 레스보스 섬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뮈튀레네에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가르치면서 동시에 생물학의 탐구, 특히 해양 생물의 다양한 생태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그리스 통일론자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주장은 페르시아의 무력에 대항하는 통일국가가 분산된 도시국가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343-42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립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그의 아들 알렉산더를 교육하게 하였다. 알렉산더의 당시 나이는 열 세 살이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장래 통치자의 스승으로서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58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 제도를 수립한 방대한 정치 제도집을 구상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필립이 사망한 후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으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기원전 335-34년, 아테네로 돌아온 즉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의 지원하에 자신의 학원을 세웠는데, 그 학원은 소크라테스가 사색하며 산책했다고 전해지는 수림(樹林), 즉 아폴론 신전 부근의 리케이온(Lykeion)의 숲속에 있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숲속의 산책로 페리파토스를 거닐면서 철학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etic)라 불리우게 되었다. 산책로에서 행해지는 소요 토론 이외에 강론이 있었는데 오전에는 소수의 제자들을 상대로 고도의 탐구를 요하는 문제를 강론했고, 오후에는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좀더 대중적인 문제를 강론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최초의 거대한 도서관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곳에는 수백 권의 수고(手稿)들과 지도들, 동식물 표본들이 소장되어 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강론 도중에 예증(例證)하는 것으로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리케이온은 제자들끼리 자체 내의 지도자를 서로 교대하며 담당하는 형식적 절차를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절차를 위한 규율을 제정해 그 규율에 따라 자신도 공동 식사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향연을 베풀었다. 그 향연에서는 한 명의 제자로 하여금 나머지 제자들의 비판에 대해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는 방식을 익히게 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12년(혹은 13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론의 원장으로 재직하며 교육과 강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사상들을 발전시켰다. 이곳에서 여러 과학의 분류에 대한 그의 생각과 시도들, 그리고 새로운 논리학, 철학과 과학의 모든 주요 분야에 대한 그의 사상들과 특히 보편적 지식에 대한 비상한 지적과 관심을 표출하였다.
알렉산더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기원전 323년) 직후에 발생한 반마케도니아의 풍토는 아테네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마케도니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며,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 불경죄로 기소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불경죄로 고소되었으나,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에 대해 또 한 번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라고 말하면서 리케이온을 떠나 칼키스(Chalcis)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오랜 지변이었던 위장병으로 사망하였다.(기원전 322년) 그의 유서에는 그의 세심한 인간적 배려가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이 유서에는 자신의 친지들에 대한 엄밀한 배려와 함께 노예들의 처우 문제까지도 소상히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노예들을 팔지 말 것과 몇몇의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해방시키라는 유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도 매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오랜 세기동안 철학을 지배하는 철학적 이데올로기, 혹은 좌표가 되었으며, 하나의 굳건한 전통이 되었다. 그의 광범위한 철학 체계는 오늘날까지, 혹은 철학이 존립하는 그 날까지 완전히 허물 수 없는 거대한 성전이라는 점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인정하는 점이며, 대부분의 학문에 반영되어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원류(源流)의 한 줄기를 담당하여 왔다.
5.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①스토아 학파
B.C. 315년경 키프로스섬 출신의 제논에 의해 창립되었는데, 그가 아테네의 스토아 포 이킬레라는 건물에서 가르쳤다 하여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학풍은 이후 아테네, 타르수스, 셀레우케이 아, 로도스 등지에 계승되고, B.C. 2세기경 로마에 전해졌 다. 로마에서 통속적인 도덕 철학으로서 환영을 받아, 세네카, 아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 펠리우스와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배출되었다.
스토아학은 윤리학·자연학·논리학으로 되어 있는데, 그 근본 사상은 이 우주의 만물은 일정한 이법(理法 : 로고스) 에 의해 생성 유전되는 근본 물질인「불」에 지배되고, 그「블」은 또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므로 전 자연은「불」의 필연성, 즉 이성적인 신의 섭리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 기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이 자연의 이성과 법칙을 통찰하며, 굳은 의지와 체념을 가지고 감정과 쾌락을 물리치며, 그리하여 자기의 내면적 독립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덕이 생기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이 학파는 하나의 법(자연법)에 의한 세계 국가를 내세워 이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 나 시 민이 될 수 있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특정 국가의 속박을 배격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로마의 중심 철학이 되었다.
②에피쿠르소 학파
스토아 학파와 아울러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철학 학파로 에피쿠로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인 인생관이 강하였는데,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여 마음의 평 화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국가와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허전했던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복음처럼 퍼져 갔다.
외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점에서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스토아 학파와 같지만, 스토아 학파가 덕을 덕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한 데 비하여, 그는 마음의 평화, 즉 행복을 위하여 추구했던 것이다. 이 철학은 사후(死後)의 존재를 부정하고 현세에 있어서의 최대의 개인적 쾌락이 최고의 덕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B.C.342-270)는 쾌락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마음의 행복이었다. 로마의 루크레티우스에 의하여 더욱 보급되어 기원 후 4세기까지 존속되었으나, 이 학파가 소멸된 후에도 그 사상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출처: www.naver.com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