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농설 (神農說)
'마시면 쓰나 목에서 단것은 茶이다.' 《茶經》에서 차(茶)의 맛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차의 그 오묘함을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茶經, 五之煮》, '其味甘檟也, 不甘而苦荈也. 啜苦咽甘茶也.(그 맛이 단것은 檟라하고, 달지 아니하고 쓴것은 荈이라 한다. 마시면 쓰나 목에서 단것은 茶이다.)'
인류가 차(茶)를 일상에서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차를 알게 되었으며, 이를 유용하게 식음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까? 삶의 전부가 주위환경의 지배아래에 있었던 원시인류에게는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사는 것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야생의 찻잎도 먹을거리로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고, 용도를 아는 것도 야생에서 여느 먹을거리를 처음 찾았을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먹을거리로 차나무를 발견하고 그 잎을 먹어봄으로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번의 시식경험을 통해서 별다른 해(害)가 없음을 확인하고, 처음에는 식용으로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피가 나거나 삐었을 때 환부에 발라보니 피가 빨리 멈추고 부기도 쉽게 빠지거나 가라않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로는 찻잎에 약리작용이라는 특별한 효능까지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식용과 약용으로 두루 쓰였을 것입니다. 문명의 발전을 거듭하던 인류는 농경시대(農耕時代)라는 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농경시대의 도래는 인류에게는 복음과 같은 것으로, 황금기를 맞이하는 축복입니다. 많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었고, 안전한 저장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저장법을 발견하고, 이를 발달시켰습니다. 당연히 곡물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으며, 이에 힘입어 야생에서 채취한 차나무 잎도 다른 곡물의 저장법을 원용(援用)하는 등으로 오랜 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차(茶)의 유래는 원시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다양한 식생활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하였으며 나아가 기호음료로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차 문화가 크게 성장하게 되고, 나아가 차가 주는 정치사회적인 의미가 커지자, 차 문화를 통해서 집단의 정체성을 찾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활용하게 되었으며, 차나무의 대량재배까지 성공하게 되자, 이제는 큰 부(富)를 창출하는 경제의 한 수단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차(茶)가 인간의 생활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크게 미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는 음다(飮茶)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기원(起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억측과 설(說)이 무성할 정도로 많이 생겨났으며, 그중에서 어느 설은 일부에서 크게 호응도 얻고 있습니다. 그 설들 중에는 '차를 마시는 것은 신농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노공(周魯公)에게서 들었다.'1)는 기록이나, '염제신농씨가 식경(食經)에 이르기를 차를 오래 복용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 있고 뜻을 기쁘게 한다.'2)고한 기록 등에 힘입어 차(茶)는 염제신농황제때부터(BC 2517~2475) 기호음료로 사용되었다는 설(說)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차 기원의 시조(始祖)설인 신농설(神農說)입니다. 염제(炎帝)신농씨(神農氏)는 중국 상고(上古)시대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태호(太昊)복희씨(伏羲氏), 황제(黃帝)헌원씨(軒轅氏)와 더불어 삼황(三皇)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신룡(神龍)에게 점지를 받아 사람의 몸에다 소의 머리를 한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농씨를 낳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염제라고 하였습니다. 염제는 불의 덕(火德)이 주제하는 것을 일컬은 것으로 계절은 여름입니다. 불이니 상징색은 당연히 붉은색이며 방위는 남방입니다. 별칭으로는 적제(赤帝)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농경(農耕)이 여기에 속하게 때문에 신농씨(神農氏)라고 단순히 부르기도 하며, 합칭(合稱)하여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라고도 합니다.3)
* 1) : 《茶經, 六之飮》, '茶之爲飮 發乎神農氏 聞於魯周公.' * 2) : 《茶經, 七之事》, '炎帝食經云 茶茗久服 令人有力說志.' * 3) : 일부 학자의 反論도 있다.《손에 잡히는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 왕웨이 외 著, 박점옥 譯, 2001》
중국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남쪽에 천대천하고(天臺天下古)라 일컫는 천대산(天臺山)이 있습니다. 이 산은 진령(秦嶺)산맥에서 한 갈래로 뻗어 나왔으며, 높이가 이천 미터(해발 2198m)가 넘는 산으로 산세(山勢)가 깊고 험준합니다. 특이한 것은 주봉(主峰)인 연화정(蓮花頂)을 둘러싸고 있는 봉군(峰群)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산형(山形)이 마치 돌 연꽃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나듯 솟아나있는 것이 삼미생기화(三味生奇花)를 보듯, 별칭이 들어맞는 산입니다. 연봉 아래로는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단애(斷崖)가 병풍을 치고, 이쪽과 저쪽의 계곡은 사이사이에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만들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샘(天泉)에서 끊임없이 솟아내는, 천지의 혈맥이요, 생명의 원천인, 맑은 단물을 받아내니, 위와 아래의 산(山)과 수(水)가 어우러져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천대산의 많은 샘들 중에는 염제(炎帝神農氏)가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구룡천(九龍泉)도 있습니다. 맑고 시원한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이 샘물은 물맛도 단것이 일품인 샘으로, 예부터 신성하다고 하여 성천(聖泉)으로 봉하였습니다. 천대산지역은 염제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었던 곳으로,1) 염제는 이곳에서 홍수를 막아 백성들을 살렸고,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쳤으며, 모든 풀을 직접 맛을 보며 시험해 보았기에, 후세에 농업과 의약의 조신(祖神)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2) 육우는 '차(茶)는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고, 한의학 최초의 본초서인《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나 《淮南子 修務篇》에 '신농씨는 백가지 풀의 맛을 보고 하루에 일흔 두 가지의 독을 먹었지만, 차(茶)로 이를 해독(解毒)했다.(神農嘗百草,日遇七十二毒,得茶而解之)'는 기록 등으로 보아 차(茶)는 염제신농황제때부터 약재(藥材)나 음용(飮用)으로 사용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그 일은 다인(茶人)에게는 상징적으로 '차 문화의 시조(始祖)'로 받드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 1) : 《寶鷄文史資料 第11輯, 1993》, 『염제신농(炎帝神農)은 몽욕(蒙峪)에서 태어나 구룡천에서 목욕하였으며, 강수(姜水)에서 성장하였다. 이리하여 강(姜)이 족성(族姓)이 아닌 씨칭(氏稱)이 되었다. 현재 보계 남쪽의 강성보(姜城堡) 일대에 강씨가 살았던 마을도 그대로 있다.』 * 2) : 《詩經, 小雅, 甫田之什, 甫田》, 我田旣臧, 農夫之慶. 琴瑟擊鼓, 以御田祖.(나의 밭은 농사가 잘되니, 농부들의 경사로다. 거문고 타고 북을 치며, 신농씨를 맞아들인다.) 여기서 전조(田祖)는 선색(先嗇)이란 분이니, 처음에 밭을 갈은 자를 이른 것으로, 바로 신농(神農)을 지칭하는 것이다. 《周禮, 籥章》에 '온 나라가 풍년을 田祖에게 기원하면 豳雅를 연주하고, 土鼓를 두드려서 田晙을 즐겁게 한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염제신농황제의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4500여 년 전인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당연히 충분한 물증을 가지고 그것을 뒷받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삼황(三皇)시대는 아직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先史時代)였습니다. 문자의 발명은 그 후로도 천년이 지난 후인 BC 1600년경인 상(商=은殷 BC 1600경∼BC 1046년까지 실재)대에 와서 처음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생겼으며, 그 이후로 역사시대(歷史時代)가 열린 것입니다. 《다경(茶經)》등에 기록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구전(口傳)에 의한 전설(傳說) 등을 근거로 했을 뿐으로, 전거(典據)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이야기들은 인용된 책의 편찬연대뿐만 아니라,1) 책의 내용 중에 차(茶)를 지칭한 문자의 뜻에도 오류(誤謬)나 오역(誤譯)이 있을 수 있음을 주지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염제신농황제때부터 차를 마셨다는 사실에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차의 기원으로서의 신농설(神農說)은 사실(史實)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염제신농씨가 비록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중화민족 발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로서, 모든 것의 시원(始原)으로 믿고 싶어 하는, 그런 맥락에서 음다(飮茶)의 기원이라는 설(說)까지도 인정하려는, 중국인들의 마음까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2) 염제신농황제가 생존했다고 하는 BC 25∼26세기에 음다의 풍속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빙할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대에 기록된 문헌이나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결론지어야함에도, 차(茶)에 대한 연원(淵源)으로 가장 오랜 기록인 신농설(神農說)을 굳이 내세우는 이면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신농씨와 밀접하게 연결 지어 말하는 것은 신농씨가 삼황오제시대를 연 신화적 인물이요, 농업과 의약 등의 조신(祖神)으로 불리어지고, 차 문화의 시조(始祖)로 숭앙받는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에 관계없이 신농설이 주는 의미는 중화권의 차문화를 굳건하게 세우고 만드는 정신적 지주의 시원(始原)으로서는 그 영향이 넓은 범위에 걸쳐 대단히 크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역사적인 사실관계와는 별개인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 1) : 한의학 최초의 본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무슨 책인가? 이 책을 염제신농씨가 지었다는 사실이 맞는가? 이 본초서는 신농씨가 백초를 직접 맛보며 한의학 본초의 틀을 세웠다는 책으로 신농씨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대단히 높다. 이 책은 한의학에서는 고대로부터 본초 분야의 절대적 위치에 있으며, 예부터 한방의서의 원본으로 인식되어졌으며, 본초학의 문헌으로서 한의학 본초사(本草史)에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책은 신농씨가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다. 고대 중국의 문화적 특징 중의 하나가 뛰어난 저작을 특정 성인에게 가탁(假託)하여 권위를 부여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책도 다름없이 그에 따랐다. 《신농본초경》은 신농(神農)씨로부터 3000년 가까이나 지난 후한시대(後漢時代 AD 25∼220) 말(末)에 편찬되었다. 그동안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사학상전(師學相傳)하던 것을 장중경(張仲景 AD 150∼219)이 오랜 세월에 걸친 의학적인 경험과 판단으로 집성편찬(集成編纂)한 것이다. 그것을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한의학의 비조(鼻祖)로 숭앙되고 있는 신농씨(神農氏)의 이름을 빌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 한 것이다. * 2) : 《중국 茶의 향기, 박정도, 2001》
근래에 와서 차나무 재배가 한분야로 굳건히 자리를 잡자, 품종 개량을 통하여 동아프리카와 남미까지 차의 재배지가 확대되었습니다. 이제는 전 세계에 걸쳐 고루 재배하는 작물이 되었으며, 이것은 인류에게는 축복이고, 귀중한 자산 중에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류는 야생의 차잎을 여러 용도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갖게 됨으로서, 차문화는 한걸음씩 앞으로 내디디며, 조금씩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동진(東晋 AD 317∼420)의 상거(常璩)는 《華陽國志, 券1 巴志》에 서주(西周)시대 초기(BC 11세기경)에 파촉(巴蜀)지방에서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221)에 와서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때에도 찻잎은 여러 용도로 이용하였는바, 그중에는 나물류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습니다.1)
* 1) : ① 《茶經, 七之事》, 晏子春秋, 孀相齊景公時, '食說粟之飯, 炙三戈五卯, 茗菜而已.'(안자춘추에 안영이 齊나라 景公의 재상일 때에(BC 547∼BC 490) '메조미 밥과 세 꼬치의 구이와 다섯 가지 푸성귀와 차 나물을 먹을 뿐이었다.') ② 《詩經, 邶風 谷風篇》, '誰謂荼苦, 其甘如薺. 宴爾新昏, 如兄如弟.' 십오국풍(十五國風) 중에 패(邶)나라의 노래를 모은 패풍(邶風 谷風篇)에 나오는 구절로 '그 누가 차를 쓰다 하던가, 냉이처럼 달고도 단데.'라고 말하며, 비록 지아비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오히려 지아비의 정(情)을 더욱 바라는 두터움의 지극한 뜻을 비유로 나타낸 노래다. 여기에 보이는 도(荼)의 의미도 주ㆍ진(周秦)까지 차를 '荼作二解,一爲茶,一爲野菜.'로 병용하였음을 볼 때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에는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로부터 춘추(春秋)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여 년간의 시가(詩歌) 305편이 수록되어 있음으로, 시기는 늦어도 춘추 중기 이전임을 추정할 수 있다.
드디어 남북조(南北朝 AD 420년∼589)시대에 이르러, 비록 아직도 일부계층에서만 애용하는 정도였지만, 음다(飮茶) 풍조는 일반양민에게까지도 보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당(唐 AD 618∼907)대가 되자, 갑자기 차문화는 활짝 꽃이 피었으며, 당연히 음다 풍조도 크게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당대는 중국에서 차문화에 따른 시대구분을 말할 때에 '차의 극성시대(極盛時代)'로 분류할 정도로 차문화가 크게 발달한 시기였으며, 오늘날의 차문화가 온 세계에 걸쳐 크게 번창하도록 만든 르네상스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茶經》을 바탕으로 하여, 차문화 전반의 체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1) 이를 상기해 볼 때 육우(陸羽)의 공(功)이 결코 작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1) : 당나라의 차문화 중에는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세 가지가 있다. 육우(陸羽)의 《茶經》저술과 조찬(趙贊)의 '다금(茶禁=茶稅)제도'이고 또 하나는 노동(盧仝)의 '차가(茶歌)' 보급이다.
육우(陸羽)는 그릇에 도를 담는다(器以載道)는 일념으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不可一日無此君), 집집마다 즐기는 마실 거리(比屋之飮)를 위하는 일에, 한 평생을 모두 바쳤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아, 하늘의 명(命)은 깊고 멀어 그침이 없다(維天之命 於穆不已)"고 하였으나, "지극한 진실(誠)은 그침이 없거니와, 그침이 없으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효험이 나타난다"고도 했음으로, 그 말씀을 믿어 죽을힘까지 다했으니, 그 이후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육우(陸羽)는 《茶經 六之飮》에서 '이제 번진 풍속으로 당(唐)나라에도 성(盛)하여, 두 국도(國都)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형주와 투주(渝州=중국 수, 당(隋,唐)대에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바현(巴縣)을 중심으로 있었던 州)사이에 집집마다 즐기는 음료로 삼았다.(滂時浸俗 盛於國朝 兩都幷荊渝間 以爲比屋之飮)'고 안도하듯이 말하고 있음을 보아, 하늘의 명령(維天之命)을 따랐음은 물론이요, 그의 개인적인 소망까지도 이루고 있음에 만족함을, 감히 어림짐작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음은, 필부(匹夫)의 소견머리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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